하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 2003-04-01 21:51:36 read : 16863
구약의 여성①
인류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문이 끝나자(창 3: 9-19), 여자를 꾀어 타락하게 하였던 최초의 "뱀"처럼, 뱀의 꾐에 빠졌던 그 여자도 또한 자기의 남편인 아담을 꾀어 타락하게 하였다(창 3:6)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꾐은 타락을 낳았지만, 타락은 야훼 하나님의 자비를 낳았던 것이다.
즉,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1)그 여자는 아담으로부터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하와"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고(창 3: 20), (2)"하와"는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남편과 함께 "가죽 옷"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창 3:21)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선포(창 3: 20과 3:21)는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날카로운 심문(창 3: 9-19)의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전혀 예기할 수 없는(!) 결과로서 매우 신비로운 감동과 충격적인 은총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성서 주석가들은 여기서 타락 사건에 대한 보도의 두 결론(①창 3:23과 ②창 3: 22,24)을 상상하였다. 즉 인간의 타락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심문(창 3: 9-19)이 끝난 다음, 한편에서는 <①"야훼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아담을] 내보내시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 3: 23)라고 하는 결론>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②<"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 22, 24)라는 결론>이 나타난다고 상상하였던 것이다. 만일 타락 기사가 단일한 한 단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이야기를 그 배경에 갖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러한 추론은 상당히 그럴듯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놀라움은 오히려 그 타락 이야기를 결론 짓는 곳에서 그 결론을 단순히 징계로 마무리하지 않고 이와는 달리 오히려 더욱 강력하고도 지구력 있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일로 마무리하는 "정교한 신학적 마무리 작업"(①창 3: 20 ②창 3:21)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 "마무리 작업"은 분명(!) "자애(慈愛)로운 징벌(懲罰)의 징표"(a sign of the merciful punishment; cf. C. Westermann)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낙원 추방"은 야훼 하나님께서 인간창조의 사업을 인간의 타락 때문에 단념이나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창조를 인간의 타락 때문에 오히려 인류 구속사업(救贖事業)으로 전이(轉移)시키신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인류 타락 이야기의 진정한 결론은 창세기 3장 23절이라고 할 수 있고, 야훼 하나님께서 인류를 낙원에서부터 추방한 그 진정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은 창세기 3장 22절과 24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타락 이야기의 신학적 마무리 작업은 창세기 3장 20절, 21절(!)에서 이루어 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 영생할까 하나님께서 두려워 1
하신다(창 3:22)라는 신화시적 표현으로 이루어 진 "하나님의 시샘 주제"(the motif of the envy of the God, cf. Westermann)는 "뱀"의 유혹(창 3:5)의 핵심주제요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인간 오만(휴브리스)의 본질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시샘 주제"는 또한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기 이름"을 내고 그리고 인간의 힘이 결집되지 못하고 지면에 흩으지게 되는 것을 면하자(힘을 뭉쳐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 대항하자?)라고 주장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초기의 명령(창 1: 28)에 대항(對抗)하는 또는 감히 "창조자≠피조자"라는 엄격한 창조질서(창 1:1)까지 깨려는 반역(叛逆: cf. W. Brueggemann)을 도모한 "거인주의적(巨人主義的) 오만(傲慢Hubris)",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타이타니즘(titanism)적 오만과 정확히 평행된다(창 1: 28 →창 11: 4)고 하겠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창조질서 파괴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조 의지를 굽히시거나 창조질서 유지를 단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러한 은혜를 수여하는 매체로서 야훼 하나님은 아담 보다는 하와(Hawah)를 선택하신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던 것이다(롬 5:20). 이 "하와"라는 이름이 영어권에서는 "이브"(Eve)라고 표현된 것은 "하와"의 희랍 음역 "헤와[봐]" 또는 "에와[봐]"가 라틴 음역 "Heva" 또는 "Eva"(Jerome)로 전이되고 그리고 이 이바(Eva)로부터 영어의 이브(Eve)로 전이(轉移)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점은 이 "하와"의 히브리적 의미가 갖는 그 기능이다.
비록 이 "하와"라는 말의 아람어적 의미가 "뱀"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하와가 아담을 유혹할 때 뱀이 행한 유혹 방법을 하와도 택하였을 것이라는 그런 고대적 관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하와"라는 말의 신화적 의미, 즉 "뱀"의 형상을 한 페니키아의 "지하세계(地下世界)의 여신(女神)"에서부터 그 본래적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러나, 우리의 구약 본문은(!!) "하와"라는 말을 "생명" 또는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즉 "모든 산 자의 어머니"(생명 모체[母體])라는 의미로 신학적 해석을 하였고(창 3:20) 또 철저히 이 "하와"라는 말의 의미를 "생명 나무"의 기능과 연결하여 이해 하였다는 것(창 3: 22, 24)은 매우 주목할 만한 놀라움이다.
그러므로 "하와"의 프로필은 "하와"라 이름하는 한 개인의 프로필이 아니라 "원 인간 여성" 즉 "여성 인류" 모두의 원 조상의 프로필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여성신학을 외치는 자이든 아니든 간에, 여성의 창조적 기능에 대한 이러한 성서의 창조신학적 견해에 대하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냉정하고 올바른 이해를 갖고 그의 신학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첫째, "하와"는 생명 모체로서 생명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다.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이다. 모든 생명은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에 나온다. 어머니[母體]는 "자궁(子宮)"을 가진 자의 권리와 책임을 가진 자이다. 즉 어머니는 생명을 만들고 보존 양육하며 생명을 산출(産出)하는 자의 권리와 책임을 가진 자라는 말이다. 왕도 신하도, 천재 지식인도 둔재 민초도, 남성도 여성도 모두가 어머니의 "자궁"을 통하여서만 세상에 온다. 어머니는 생명의 기원(起源)이요 현재(現在)이며 미래(未來)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모든 생명을 가진 자들 중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다("지극히 높으신 분=엘·엘룐"). 그러므로, "어머니"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그래서, "뱀"은 유혹할 대상으로서 "하와"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6[9]절까지에서, 즉 야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심문하고 그 심
문을 마치기 까지의 전 과정을 "여자"가 홀로 전적으로 주도해 가는 주역 역할을 한다. 남 자는 심문이 끝나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침묵한다. 뱀과 여인 사이의 그 중요한 대화 속에한번도 끼어 들지 못한다. 그리고 단지 여자가 용기있게(?) 그 열매를 먼저(!) 따먹고 함께 있는 남자에게 줄 때, 남자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먹기만 하였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나, 꼭 "모계사회(母系社會)의 배경"같은 것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여자"가 "남자"를 이끌고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뱀"이 유혹의 대상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를 선택한 것은 "여자"를 만만히 보아서가 아니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나타나는 이 절묘한 대화극의 대화가 "뱀과 여자"라는 양자구도를 띈 것은 그 둘이 양대 진영의 대표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의 선공(先攻)이 들 판의 모든 생물 중 가장 영리한(아룸) 생물이 "뱀"이므로 이 "뱀"이 그의 정교한 대화의 상대로 삼은 자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는 것은 여자가 그 능력에 있어서 남자를 압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모든 우주선들이 돌아가 쉴 곳이 모선(母船)인 것처럼, 남자가 돌아 갈 품은 오직 여자였다(cf. 렘 31: 22).
둘 째, "하와"는 인간으로 하여금 "참 인간"(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인간)이 되게 하는 "참 인간 형성의 가장 적절한 구조자"(succor)로서 창조되었다. 창조주 야훼 하나님은 인간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를 보시고 "좋지 않다[악하다!]"라고 말씀하시고 "혼자 있는 인간"을 매우 부정적으로(quite negatively) 평가하셨다(창 2: 18). 말하자면, "혼자 있는 인간"은 "악(惡)"이라고 보셨던 것이다. "좋은 인간=참 인간"은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창조업적의 궁극목표요 동시에 참 인간을 재건(하나님 형상을 회복)하시려 하시는 인간 구원사의 최종 목표이기도 하였다(눅 10: 25-27).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고 이룩할 참 인간 회복의 유일한 대안을 야훼 하나님께서는 "여자 창조"라고 보셨다는 것이 바로 성서기자가 마침내 도달한 신학적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히브리 성서는 "여자 하와"를 이름하여 "인간에게 가장 알맞은 <에쩰[돕는 배필]>"이라고 하였다. 이 "에쩰"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는 "돕는 자"(helper)라고만 번역되었으나, 여기서는 매우 특수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하와"에게 적용할 이 "에쩰"이 여성 명사인 "에쯔라"가 아니고 남성 명사인 "에쩰"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용어가 남성, 여성하며 분류하는 그런 소극적인 성(性)의 개념은 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 "에쩰"이라는 용어가 구약 전체에서 21회 사용되지만 여기 창세기 2장 18절과 20절에서 "하와"를 가리킬 때와 단 한번 "민족"을 가리킬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하와"의 "에쩰" 기능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준(準)하는 절대적 구원행위의 기능을 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현자는 이러한 "에쩰"로서의 여자를 가리켜서 가장 이상적인 "현숙한 여자"(잠 31: 10-29)에 비유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즉 남자(자식과 남편)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고 남편들은 일어나 칭찬하는"(잠 31:28) 그 "에쩰"로서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여자 "하와"는 태초의 창조 때, 이미, "좋지 않은 인간 아담"을 구원해 내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인간 아담"을 만들어 내는 신적 사명을 부여 받았던 자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인간을 만드는 기능"은 그 무슨 두뇌적 우위성이나 지혜의 좀 더 간교한(아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그 어떤 본성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인간을 그 편협한 이기주의로부터 해방 시켜 더불어 사는 공존적(共存的)인 그리고 상호협력적인 "사회적 존재"(social being)가 되도록 만드는 고유하고도 특수한 기능을 가리킨다. 즉 불완전한(하나님
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기능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원 여성(原女性:proto-female) "하와"는 인간의 "사회성"을 돕는 하나님의 대행자적 인간 구원자(succor)로서 하나님의 인간구원 사역의 대행자적 역할을 하는 "돕는 자"(divine helper)이었던 것이다. 비록 사회변화의 역사 속에서 "여성"이 "남성"의 예속적 존재 또는 "내조자"(內助者)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오고 또 비하(卑下)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하와"는 결코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여성신학적 운동은 이런 "원 여성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여성"은 남자의 부차적 협력자라는 개념은 창세기 3:18, 21-24의 신화시적인 표현에 대한 주석 과정에서 발생한 "신학성의 결핍"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놀라웁게도, 이 "하와"라는 말은 우연하게 생겨 난 이름이거나, 아람어적, 또는 페니키아적 "뱀"신화의 영향 아래에서 생겨난 이름이 아니라, 야훼 신앙의 혁명적 신학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올브라이트(W. F. Albright)는, "하와"라는 말은 "야훼 신명(神名)의 어원(語源)일 수 있다"고 하여 그 둘 사이의 밀접한 연결성을 지적한 바가 있다. 사실, "야훼"라는 신의 이름은 "하와"의 사역형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무척 크다고 하겠다(히브리어 자음 "헤"와 "헤드" 사이의 상호 전이성을 주목하라). "땅"이, 사제 신학자(P)에 의하면, 모든 식물의 생명 모체로서 "반(半) 창조적 기능"(창 1: 11)을 하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듯이, 야훼 신학자(J)도 또한 여인 "하와"가 타락의 주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을 영원토록(!) 유전시키는 "반 창조적"(半 創造的) 기능을 하는 자로 서술하였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하와"에게 부여한 이러한 생명 창조 기능의 부여는 원인간으로 회복되지 않은 타락한 인간이 회개도 없이 여전히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永生)하는 불행을 막으려고 [인간회복 때까지]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지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와"는 "존재하여야 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One who causes to be=yahweh)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야훼"와 그 이름이 어원론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것(비록 Albright의 가설이기는 하지만)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 "하와"는 또한 아람어적-페니키아적 "뱀"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의 입을 빌려) "하와"에게 이러한 생명 창조적 신의 역할을 맡기시므로, 타락한 인간이 회개(인간회복)없이는 가까이 갈 수 없도록 그 "영생의 길"(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창 3:24) 그 하나님의 징벌을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에 이 인간 역사 속에서 출산의 고통을 통하여 "보상"(報償)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하나의 역설적 구원사적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야훼 하나님께서는 하와와 그의 후예들(어머니들)을 통하여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 와 "원인간"을 회복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그 날까지 인간의 생명전승이 이 인간 역사 안에서 중단되지 않도록 하신 것이라 하겠다. 실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와"는 다가오는 미래의 그 끝 간데까지 창조주가 하실 생명 창조, 보존의 신성한 업무를 우리의 역사 속에서 대행하는 자로서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하게 된 것이다.
김이곤 교수(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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