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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결실이 있습니다
2002-11-22 10:13:06   read : 41329

2002년 11월 3일 // 시편 1:1-6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의 작품 중에 ‘노인과 바다’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멕시코 만류에서 고기잡이하는 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84일 동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드디어 85일 만에 5미터나 되는 고기를 3일간의 사투 끝에 잡게 됩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낚은 고기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를 만나 항구에 돌아왔을 때는 앙상한 뼈만 남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내용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허무함입니다. 헤밍웨이는 직접 전쟁에 참전해 보았기에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권총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는 아버지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헤밍웨이는 삶을 보는 시각이 긍정적일 리 없습니다. 낚시나 여행을 많이 즐겼다고 하는 그도 결국 엽총으로 마감하고 맙니다.

사투를 벌이며 낚았던 고기, 정작 고기를 잡은 기쁨을 나눌 항구에 들어 왔을 때는 앙상한 뼈만 남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헤밍웨이의 말이 맞는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잠시 행복하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인이자 극작가인 존 드라이덴은 인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기위해 태어났으니 아무도 진정한 행복을 자랑할 수 없으리, 그러니 똑같은 마음으로 일어나는 일을 다같이 견디세.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세상사에 지나치게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마세나. 정해진 곳으로 가는 나그네처럼 우리도 어차피 가는 것이니 세상은 여관이요, 여정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네.” 이렇듯 인생에 대한 문학과 철학의 결론은 허무함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그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인생이라 합니다.

사는 동안 가장 화려하게 부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전도서 1장에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살아온 것이 결실 없는 헛된 인생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러분! 이러한 측면이 인생 가운데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삶이 결국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라면, 노력도 기쁨도 일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같이 나눌 말씀, 성경전체의 서론이기도 한 시편1편은 보람된 삶의 결실이 어디에 있는지 명쾌하고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데, 시편 1편 조차도 인생의 허무한 면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겨와 같은 인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겨는 알곡을 꺼내고 남은 껍데기로 곡식으로서의 가치와 생명을 골라내고 난 뒤에 남는 찌꺼기입니다. 겨는 형체가 없어서, 많이 쌓여 있을 때는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먼지와 껍데기 더미에 불과해 바람이 불어오면 형태가 바뀌기도 하고 날려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겨는 뿌리가 없습니다. 땅 위에 쌓여져 있지 땅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뿌리가 없기에 성장이 없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쉽게 움직이며 흩어지는 것입니다. 겨는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생명이 있는 알곡은 조건만 맞으면 싹이 납니다. 그러나 겨는 생명 즉, 알갱이를 만들지 못합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겨는 겨로 끝나고 나중에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경 조차 우리 인생이 겨와 같다 라고 맺었더라면 헤밍웨이나 존 드라이덴과 별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겨와 함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비교합니다. 우리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지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의 다스리심에 의지하는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인생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결실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결실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고, 그 분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허무하지 않습니다. 맺어야 할 마땅한 결실을 맺는 삶, 마지막 날 심판의 때에 풍성한 열매로 드리며 주님께 인정 받는 삶이 여기 있습니다. 결실 있는 삶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오늘 주신 말씀 안에는 인생에 결실이 있기 위해서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나무가 심기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땅에 먼저 나무를 심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심겨지는 과정을 거쳐야 행복과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그 자리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나무가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과실을 맺는 나무인데, 과실을 맺는 나무는 농부가 골라서 열매 얻을 것을 기대하고 심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본래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6장 20절, 21절 말씀에 “너희가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 사망의 열매 밖에는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에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평생을 열심히 산다 해도 마지막은 죽음이며, 죽음이라는 열매 외에 삶의 궁극적 열매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살아서 맺는 열매도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입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식이라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은 없고 생명을 맺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지적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51편 5절 말씀에 “다윗은 죄 중에 잉태되었다”고 말합니다.

부모님의 삐뚤어진 생활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녀들이 지금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어하는 부모, 그러나 부모가 남긴 삶의 열매로 인하여 아픔 속에 살아가는 자녀들, 그러나 자녀 된 우리 역시 남기는 삶의 열매는 어떠합니까? 이웃들과 가족들, 더불어 사는 이 시대 사람들이 내가 맺은 열매로 인해 희망, 소망, 생명을 갖고 살맛 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러분의 삶 속에 분쟁과 시기, 원수 맺는 것, 분리됨, 투기와 술 취함 그리고 방탕은 없습니까?

나무는 스스로 심겨질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열매 맺는 나무를 심어놓은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에 행하신 일입니다. 원래 모습은 그 열매가 사망이며, 열심히 노력하며 애써 맺는 열매가 방금 열거한 내용들뿐인데, 그러한 내 인생을 열매 맺는 나무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에 바울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땅에 오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는 그 모든 일들, 그것은 나를 사망과 분열과 다툼과 음란과 더러운 것과 죄의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생명을 맺는 나무로 바꾸어가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허무함으로 끝맺을 수 밖에 없던 우리 인생에서 생명을 맺는 귀한 나무로 변화시키시는 것,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의도와 뜻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인생이라고 고백합니다.

열매를 맺는 두 번째 단계,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가 잘 심어져야 합니다. 소중한 열매를 기대하며 심는 나무를 말라 비틀어진 황무지에 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가 정하는 장소는 비옥한 땅, 생명을 공급해주며 메마르지 않도록 영양분과 수분을 공급해주는 시냇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심겨진 나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출생”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출생했다면 바람에 나는 겨의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가 주시는 풍성함으로 인생의 나무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있는 인생은 메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보십시오. 가뭄이 들었을 때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면서 시절에 맞는 열매를 맺어내고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않습니다.

뿌리가 완전히 내려 시내에 닿아 수분과 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농부는 그 깊이까지 구덩이를 팝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인생의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주위가 가물고 곤고하고 어려울 지라도 여전히 풍성하여 그 풍성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믿을 때까지 주님은 땅을 파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신화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살고자 하면 돈이 많아야 된다 라는 생각, 권세가 중요하다는 생각, 건강이 최고라는 생각, 형제간의 우애, 가족간의 화목이 인생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신념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단단한 신념을 깨기 원하십니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려면 그 뿌리가 시내까지 뻗어서 수분과 양분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풍족한 삶, 메마르지 않는 삶을 누릴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까지 우리 인생의 땅을 파 내려가십니다. 내 경험과 상식을 깨트리십니다. 이것은 아픔, 고통, 연단이 있는 창조적 고통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달될 수 없다’하는 유대인의 단단하고도 전통적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들에게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소나 돼지와 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욥바에서 기도하게 하시면서, 하늘에서 못 먹는 벌레를 담은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먹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정해 놓은 벌레입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이것을 먹어라.’ ‘하나님 이것은 율법에도 어긋납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더럽습니다. 지저분합니다.’ 그러자 보자기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옵니다. ‘하나님, 이것은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동안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고넬료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가라 명령하십니다. 순종하여 명하신 대로 간 베드로는 이방인 이달리아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의 간증을 듣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곳에서 깨닫고는 드디어 이 천년 동안 내려오던 그 단단한 땅이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시는구나.’ 그때부터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드십니다. ‘돈을 의지하며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라, 돈이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도다.’ 이렇게 살면 돈 때문에 곤고함을 당하게 만드셔서, 혹은 세상의 권세나 명예 따위를 의지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곤고하게 하셔서 우리가 의지하는 헛된 대상을 깨뜨려 버리십니다. 고통을 주시려 함이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공급처는 그리스도외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깨달을 때까지……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물가에 뿌리를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 (예레미아 17장 7,8절)”

하늘의 왕자인 독수리는 바다가 보이는 절벽에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단단한 가시나무로 집을 만들고 둥지 안에는 들쥐를 잡아 그 가죽으로 포근하게 만든 후 새끼를 키웁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가죽을 걷어내는데, 그러면 따가워하는 새끼들을 등에 업고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떨어뜨립니다. 새끼 독수리는 정신없이 곤두박질 칩니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어미가 다시 등에 태웁니다. 새끼 스스로의 날갯짓으로 창공을 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합니다. 하늘의 왕자답게 살게 하려는 어미의 의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훈련 받은 독수리는 태풍이 불어와도 날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날개 각도를 맞추어 날개 짓을 하지 않고도 하늘을 날면서, 태풍 부는 높이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태풍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고 합니다.

이지선 자매는 이화여대 사범대학 유아교육과 97학번으로 2001년 8월에 졸업했습니다. 이년 전 7월 서울 한강로 일가에서 6중 추돌 사고가 났습니다. 6중 추돌사고의 현장에서 불이 난 마티즈 승용차 운전자 이 모씨가 바로 이지선양이었습니다. 사고 원인이 된 가해 운전자는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 0.35%의 만취상태였다고 합니다. 당시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지선 양의 오빠는 차가 폭발하기 직전 불과 1-2분 사이에 지선양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머리 뒤통수는 다 찢어져 너덜거렸으며,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응급실에 옮겨졌을 때도 고기 탄 냄새가 진동하였고, 얼굴은 새카맣게 타서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 지선자매를 보고 있던 그녀의 가족들과 친척, 교회식구들은 담당 의사로부터 마지막일지 모르니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고소식을 듣고 전가화 목사님이 달려오셨고, 기가 막힌 상황에 한 20분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채 앉아계시다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 이 사건을 위한 믿음이라.’ 십 년이 넘게 하나님을 믿어온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간의 신앙생활 동안 가진 믿음이 이 어려운 때를 이겨나가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 살 때 돈, 가족, 명예, 건강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절망의 순간, 아무것도 공급 받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심기어진 시냇가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희망, 생명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주위에서 불어오는 황량한 바람, 바싹 타 들어가는 가뭄에도 상관없이 뿌리로부터 공급 받는 수분과 영양분으로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철을 따라 과실을 맺을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시편 92편에 “그들은 늙어도 결실하며 지내기 풍족하고 빛이 청정하여서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시리로다.” 그리고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담대해지고 인생의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열매 맺어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고 싶지 않아도 아름다운 과실을 맺는다”고 요한복음에서 전합니다. 어떤 계절이든지 열매를 맺어야 할 때 열매를 맺어 농부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고난의 때에도 평안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 받는 사람들이 맺는 열매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선가는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까? 개신교인의 사회봉사 참여가 저조하다는 등 이견이 분분합니다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통계상 참여인의 67%가 개신교인으로 높은 참여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학교가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100년 전 런던의 센 바들로이오 병원도 라헤레라는 어떤 크리스천에 의해서 세워진 최초의 병원입니다. 영국의 노예제도가 중단된 것은 영국의 26살의 젊은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가 주님을 믿고 자신의 거듭남을 확인하며 일평생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애쓴 결과입니다. 우리 민족이 암담하여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일제치하, 1919년 3월 1일 하나님을 믿는 가슴에서부터 민족 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가 되어 나라 전체가 희망이 없는 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놀라운 생명력의 공급은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귀한 일들을 감당해 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맺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주일 성수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여도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없다면 그 열매는 여전히 육의 열매입니다. 주님과 교제할 때에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절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중 주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열매입니다.

오랫동안 주조를 하신 어떤 분의 장례를 집례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 자녀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아버지를 전도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신앙 생활하셨는데, 장례식에서 할 설교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업가로 성공했다고 많은 칭송을 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남긴 열매는 유산으로 싸우는 자녀들의 안타까운 모습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맺는 삶의 열매가 가족 혹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이 남긴 열매가 여러분의 인생을 참으로 아름답게 하고 있습니까? 부모님의 돈이 여러분의 인생에 참다운 만족, 행복을 주던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참된 행복과 결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죄와 사망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접붙여서 생명을 맺는 나무로 만드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황량한 곳, 척박한 곳에 심기를 원치 않습니다. 시냇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곳에 심으십니다. 땅을 깊게 파되 양분을 흡수하고 공급자 되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파 내려가십니다. 그래서 맺는 열매는 많은 사람을 화목하게 합니다. 죽어가는 인생을 살리는 열매입니다. 방향을 잃은 인생들에게 삶의 방향을 주는 열매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죽고 나면 끝나고 마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 이 결실의 계절 가을에, 어떤 인생의 결실을 맺고 살아야 할지 주님 앞에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의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놀라운 결단이 지금 이 시간, 여러분 마음속에서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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