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죄인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요4:39-42 2002-11-06 11:15:01 read : 931
(요4:39-42)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 하시매(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참으로 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방인 취급받는 사마리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를 다섯 명씩이나 갈아치운 여자로 낙인찍히고,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나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따돌림받고, 입에 오르내리는 여인이었으며,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없이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삶이었습니다. 이제는 지쳐서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삶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난 자신의 삶을 가리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을 나타내기를 꺼려왔습니다. 동네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도 이 여인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동네 여인네들은 마주치면 눈을 흘기며 쑥덕거리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남정네들은 마치 창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며 거친 말들을 내뱉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무엇인가는 잘 모르지만 마을에서 어른들이 지명해놓은 나쁜 여자라는 인식에 놀려대며 돌판 매질을 해 댔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아무도 물 길러 가지 않는 정오의 시간을 택해서 그 작렬하는 뜨거운 햇볕을 맞아가며 물을 길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외면 당한 인생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 왜 자신이 이런 인생의 깊은 늪 속에 빠져버리게 되었는지를 아무리 생각해 보고 의문을 가져 보아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악하고 나쁘게 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살려고 몸부림치며 살았던 삶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가치하게 흘러온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고 돌이키려해도 이미 모든 것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절망과 눈물과 한숨만이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고정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당하고, 여인 자신도 더 이상 자신에 대하여서 철저히 포기한 삶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죽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셨습니다. 철저히 부서진 인생에 위로와 소망의 모습으로, 마치 기갈이든 메마른 땅에 촉촉한 단비와 같이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제까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어떤 사람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받아보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다정히 다가오셔서 병들고, 상처난 자기의 전 인생을 완전히 치유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의 은혜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너무나 기뻐서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예수를 만났던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예수께 와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상면하기를 꺼려했던 마을 사람들 앞에 이 여인 은 당당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전에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얼굴을 들지 못하고 피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 참된 기쁨을 머금은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버림받은 여인으로 낙인 찍혔던 이 여인을 통해서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첫째로, 이 여인은 예수를 마을 사람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요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이 여인은 자신이 만난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있었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마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꺼리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이 그녀의 모든 부끄러움을 잊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과거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륜으로 가득한 자신의 과거를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한다는 것이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어렴풋하게 자신의 과거를 알고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오히려 분명하고도 상세하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이 자신을 무시하고 , 조롱하며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어 버리는 자들 앞에서 다시는 생각하기 싫고 , 영원히 잊고싶은 자신의 과거를 발가벗듯이 드러내기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거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한가지는 이제껏 자신을 멸시하고 멀리했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만나 주셨다는 것을 자랑하며 인정받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우리들에게 깊은 의문을 가져다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좀더 이 여인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을 알리시지 않으시고, 왜 하필이면 과거가 불륜으로 가득찬 이 여인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 의문을 깊게 생각해 보면 답을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자신의 의로 가득찬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높이기보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과시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가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 주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입니다. 또한 마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님 만난 사실을 전해 준다고 할지라도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의로운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결코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메시야 만난 사실을 결코 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의를 나타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삶이었기에 오직 그리스도만을 순수하고도, 영광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적합자로 선택받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죄악으로 물들어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도 예수님이 만나 주셨는데 마을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겸손하고도 순수한 생각을 갖고 예수님 만난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드디어는 이 버림받은 여인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많은 죽어 가는 생명들이 살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예수님 당신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복음이 필요하고, 복음을 들은 죄인이 그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내 자신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 만난 구원의 감격을 내 가족과 이웃에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내 가족과 내 친지와 이웃은 반드시 나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며, 전파된 복음은 반드시 그 영혼을 구원시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푸른동산교회는 하나님이 제일로 기뻐하시는 일을 기획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올 11월달에 있을 '추수감사절 태신자 초청 잔치'를 여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애쓰고 노력하여서 추수감사절 때 초청하여 복음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과 또한 사마리아성의 많은 사람들과 같이 그 놀라운 구원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뜻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혼자 구원받는 것에 그치지 말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증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살려 내라는 것입니다.
<말씀 선포>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 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능히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복음의 증인으로 굳게 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태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요(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야가 그들 앞에 나타났는데 보고만 있다면 그토록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즉시로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여 예수님을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시게 강권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성의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처신이 확실하고도 시원해 보입니다. 그들은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늘 손가락질 해 왔던 그 여인의 증거를 듣고는 즉각적인 믿음의 반응을 보여 예수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질질 끄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올 때 결단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곧 결단하는 생활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도 믿고, 말씀도 믿고, 기도도 하는데 계속적으로 머뭇거리고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정오 때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의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 것을 보고는 아브라함이 즉시로 달려가 그 세 사람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모셔들이고는 물을 가져다가 발을 씻기고, 떡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만들어 그들을 대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접받은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기쁜 축복의 소식을 주고 가는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년이 지나면 부인인 사라가 아들을 얻게 된다는 축복의 소식이었습니다. 드디어 한해가 지나가자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경수가 끊어진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믿음의 눈을 가졌기에 지나가는 사람 셋을 천사들로 바라볼 수 있었고, 즉시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함으로써 아들을 얻는 큰 축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과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어떤 일에서나 머뭇거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사마리아여인과 그 성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로 결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일에 분주하지 말고 이번 추수감사절 태신자 초청 주일에 작정된 자들을 초청하는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요, 가장 축복된 일이요 가장 좋은 상급을 하늘나라에 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요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잘 들어야 마음에 결정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생겼을 때 드디어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갖고 난 후에는 고백하는 단계가 반드시 요청됩니다. 고백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백을 통해서 그 동안 감춰졌던 것이 드러나고, 그 진심이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는 사람도 그 고백으로 인해 반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젊은 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녀는 7년 동안 사귀었는데 7년을 사귀고는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 동안 정성을 들였던 마음과 시간과 물질 모두가 수포로 돌아가고만 것입니다. 경험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고 만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할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
|
 |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  | Contact Webmast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