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영적 빈익빈 부익부의 교훈 2002-09-16 14:34:06 read : 24295
2002/09/08 //마가복음4:21-25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共存 共榮 共生’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이념이라 할 수 있고 그 삶의 틀은 말할 것도
없이 국가와 종교가 수행해야 할 역할질서입니다.
그런데 이 공존사회는 부의 분배과정에서 생기는 고소득층과 저소득층과의 깊
어져만 가는 골 때문에 ‘공존하는 사회'의 궁극적인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소위
사회주의 체제를 선호하고 유지 발전시키려는 경향이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
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일간지에는 한국은행 경제통계국 박천일 차장의 “지난해 5억원
이상 계좌 수는 전년에 비해 16.6%, 예금액은 13.7% 증가하는 등 외환위기 이후
ꡐ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ꡑ현상이 뚜렷해지는 추세”라고 분석한 사실
이 보도되었습니다.
즉 소득분야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사
회 전반에 걸쳐 찾아볼 수 있는 현실입니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전국의 1000가구를 표본으로 해 인터넷 이용률을
조사한바 있습니다.
내용인즉 소득과 학력이 높을수록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는 조사결과가 발표
되었는데 그것은 정보화 사회에서의 ‘빈익빈 부익부'현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술계에서도 체육계에서도 일상의 모든 범사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부인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 공존의 의미를 상실한 것을 지적하는 소리 또
한 높아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심리학적으로도 그것은 같은 현상입니다.
언제나 웃고 행복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삶의 틀에서
살아가지만 늘 불평하고 원망하며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삶의 틀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을 불러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을 차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훈합니다.
잠언 4:23절 말씀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
라.”
잠언 15:13절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
라.”
그렇습니다.
그것 또한 축복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입니다.
오늘말씀은 그래서 참으로 신앙생활에 더 없이 중요한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위치질서 법칙의 교훈
21절입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냐”
이 말씀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책임성을 강조하는 메시지이며 위치질서가 강조
되는 말씀입니다. 즉 말할 것 없이 등불은 등경위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곧 그
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이 빛이어야 함을 일깨우는 메시지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신학적 입장에서는 여기의 ‘등불’은 두 가지로 이해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불이라는 단어 ‘뤼크노스 (λύκνος)' 앞에는 정관사 ‘호 (ὁ)'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그냥 ‘등불’ (a lamp)이 아니라, ‘그 등불’ (the lamp)
로 해석이 됩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 유일 무이한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
칭하는 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취도록 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하는 그리스도인
의 사명이 요구되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진리가 있지만 그 모든 진리가 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
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
리의 등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
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
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
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곧 그것은 “너희 착한 행실”이라는 말씀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위치질서는 한 마디로 무질서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할 때 이미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잃어버린 것입니
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강조한 그리스도인의 빛 된 삶의 내용은 곧 오늘의 그
리스도인이 마땅히 있어야 할 삶의 자리입니다.
곧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내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결하며 거룩함을 옷 입고 살아야 합니다.
보복해서는 안 되고 자기 의를 위해 헛된 맹세를 해도 안 되며 나를 힘들게 하
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를 용납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
니다.
구제를 힘쓰고, 기도에 힘쓰고, 자기의 육신적 소욕을 제어하기 위해 금식하
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진리를 헛되이 하지 말고 필요할 때는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삶
이어야 합니다.
편한 것을 좋아하지 말고 힘들어도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하고, 말씀을 듣고 지
키는 가운데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입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면 등불은 등경 위에서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 수용 법칙의 교훈
24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
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이 말씀은 마태복음 7:2절과 누가복음 6:38절에 같은 뜻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주제는 “타인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깊이 묵상해 보면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복음을 수용하
는 마음자세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욱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진리를 역설하는 용법입니다.
그렇게 복음 수용이 되면 통관(通觀) 대관(大觀) 달관(達觀)의 인격과 신앙을
일상생활에서 연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연스럽게 남을 비판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는 넉넉함의 인격과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은 먼저 “스스로 삼가라”고 권고합니다.
듣는 것도 삼가고 말하는 것도 삼가야 하는 교훈입니다.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우리 교회는 122명의 피택항존직분자 마지막 세미나
가 경주 콩코드 호텔에서 있었습니다.
모든 수련회가 마무리되고 제가 마지막 당부한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여러분에게 안수하여 임직케 한 목사를 미워하거나 대적하지 말
고 존중하고 기도하라”였습니다.
둘째는 “앞으로 어떤 경우도 같은 항존직분자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고 비판
하지 말고 좋은 말만하고 칭찬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 이 두 가지를 저는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평신도
의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남의 말을 하는 것도 교회에서 쉽게 판단하는
것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항존직분자가 되면서 서서히 말이 많아지고 남을 판단하
게 되고 자기 의가 앞서고 타인의 허물과 약점만 보이게 되는 부끄러운 사람으
로 변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허물과 약점은 100가지나 되는데 한 두 가지 약점과 허물
이 있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면서 스스로 의인이 되는 부끄럽고 타락한
신앙인으로 전락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면서 평가한다는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
을 깨달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남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으나 그와 동시에 나도 다른 사
람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평가받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코페르니쿠스’를 비웃었던 ‘마르틴 루터’와, ‘갈릴레오’를 이단자로 정
죄한 중세의 카톨릭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세상 말이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있습니다. 오늘 옳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되었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지나고 보니 옳은 것이었음으
로 일깨우는 교훈 아닙니까?
진실로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기준이 옳은 것일 수 있습니까? 이 교훈을 깨닫지 못하면 후일에 주님 앞에서
그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수용의 법칙은 남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랑이
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남의 일에 대하여 헤아리고 싶어 못 견디겠거든 꼭 헤아릴 수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 헤아리지 말고 장점 헤아리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 믿음 없는 것 헤아리지 말고 믿음 있는 것을 헤아리기 바랍니다.
남이 나를 못되게 해롭게 한 것 헤아리지 말고 잘해 준 것만 헤아리기 바랍니
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 헤아리지 말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 헤아리기 바랍니다.
이웃에 대하여 형제에 대하여 섭섭한 것 헤아리지 말고 고마운 것만 헤아리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 수용 법칙의 진리요 축복으로 가는 대로입니다.
영적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
25절입니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입니다.
이 말씀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첫째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하는 자는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둘째는 남에게 베푸는 사람은 많이 베풀수록 더 많이 보상받는다는 교훈입니
다.
셋째는 열매를 많이 거두기 위해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둔다는 교훈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하면 영적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입니다.
우리 속담에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더 많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도 계속 하는 사람이 더 잘합니다.
모든 원리가 그렇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에 부요해야 합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더 기도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더 전도합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더 봉사합니다.
헌신하는 사람이 더 헌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사랑합니다.
더 이상 말해 뭣하겠습니까?
있는 자는 더 있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주님의 이 말씀보다
더한 교훈이 뭐가 있겠습니까?
20년이 넘는 목회 생활에서 얻은 공통점입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드리는 훈련이 된 사람이 더욱 드리게 됩니
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런 성도에게 말할 수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하고 믿음 없는 자처럼 헤아리고 드려야 할 때도 손을 펴지 못
하고 움켜잡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봉헌이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점점 세상
에서의 물질축복도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면 하나님이 범사에 복을 더하실 줄 믿습니까? 어김없이 주일 성
수가 됩니다.
온전하게 헌물을 드리면 세상에서 물질로 인해 고난받지 않고 풍성한 삶을 살
게 하심을 믿습니까? 어김없이 십일조를 드리고 때를 따라 감사함으로 온전하게
드림의 삶이 실천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믿음의 삶을 엮어 가면 자손 대대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
을 믿습니까? 그렇게 생활하게 됩니다.
이 모든 모든 것을 믿지 못하고,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있는
자는 더욱 있게 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을 불신하는 사람
은 그대로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이 더 있기 위하여 힘쓰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더 있기 위하여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더 있기 위하여 힘쓰시기 바랍니다.
봉사도, 헌금도, 전도도, 구제도, 더 있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말씀대로 우리에게 더 있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영적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입니다.
결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
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있게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
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
야 합니다.
사랑하는 말을 자꾸 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자꾸 칭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할 수 있다, 된다는 말을 자꾸 해야 합니다.
그래서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네가 잡혔다”는 잠언의
교훈은 진리입니다.
우리 교회는 계속 부흥한다.
우리 교회는 날마다 행복하다.
우리 교회는 날마다 축복을 노래한다.
내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
우리 교회는 나 때문에 평안하다.
우리 목사님은 나 때문에 즐겁게 목회한다.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좋은 생각 좋은 말이 많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의
장에 들여놓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더욱 더 더하기가 되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
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그것이 영적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입니다. 아멘.
 |
 |
|
 |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  | Contact Webmast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