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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 앞에 선 하나님의 할 일 2002-08-27 17:41:12 read : 28220
(막5장35-43)2002.08.25.
인간 수명의 한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름도 알 수 없는 아픔, 슬픔,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독, 외로움, 아픔, 이별, 죽음이라는 말들을 자주 씁니다. 사람들은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더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 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아픔은 점점 더 깊숙이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사랑을 잃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잃어버립니다. 남아 있는 것은 고독과 슬픔과 상처투성이인 병든 모습들입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사람들은 절망과 고독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예수님 안에 진정 거하지 못할 때 이런 고독과 절망을 느낍니다. 오늘 이 시대에 그렇게 많은 병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예수님 안에 진정으로 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아무리 영양보충을 잘해도 하루밖에는 살지 못하며 정성껏 보살핀 일년생 화초도 해가 바뀌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타고난 수명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수명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로 9백69세를 살았으며, 노아의 홍수 이후로 지구의 환경적인 변화와 더불어 사람의 수명도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생물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생물들이 성숙하는데 필요한 기간의 6배 정도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태어나서 성숙하는 데까지 걸리는 기간이 대략 20여년 정도 되므로 사람의 타고난 수명은 1백20년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첨단의료기술과 의약품의 개발로 평균수명이 늘어나긴 했지만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남자가 67·4세 여자가 75·4세인 것을 보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고난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좋은 음식과 좋은 환경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렸던 중국의 역대 황제들의 평균수명이 39·2세 로마제국의 황제들 역시 평균수명이 37세,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들의 평균수명도 43.3세인 것을 보아도 좋은 음식과 편안한 생활이 건강과 장수를 보장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깨우고 못 깨우고 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다
때로 살다보면 인간이라는 한계 앞에 직면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특별히 생명에 관계된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병원 중환자 실에 가보면 같은 의식불명의 환자인데 어떤 사람은 깨어나서 회복되고, 어떤 사람은 끝내 깨어나지 못해 죽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럴 때는 인간의 힘이란 게 참 무력하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을 깨우고 못 깨우고 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무력감'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인간의 수준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을 당한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회당장이라는 사람입니다.
절망과 소외 가운데 살았던 여인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병과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았던 여인이 나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절망의 원인은 병이었습니다. 이는 피를 쏟는 병입니다. 하혈을 합니다. 구약에서는 이 병을 유출병이라 합니다. 혈루병은 그 당시 문둥병처럼 저주를 받았던 불결한 병입니다. 피가 계속 흐르는 병입니다. 이는 정상적인 생리적인 출혈 말고 그밖에 다른 이유로 하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암 종류가 아닙니까? 난치의 병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난치의 병이라고 하더라도 고칠 희망이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칠 희망이 없다면 절망입니다.
이 여인이 이 병으로 얼마나 절망과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26절에 보면, "많은 의원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들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12년 동안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양의, 한의, 민간의약 다 바쳐보았지만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있는 것까지 다 허비하였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절망하였습니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삶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외경에 보면 이 여인의 이름이 베로니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외경이란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실 때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그 얼굴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버렸을 때 무리 가운데 뛰어나와 자기 손수건을 자기고 예수님의 땀방울을 닦아주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고 또 넘어질 때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조롱하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라는 열두 해 혈루병 걸렸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았던 여인은 무리 속에서 뛰어나와 예수님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손수건에 뜻 밖에도 거룩한 예수님의 얼굴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떠나주소서' 와 '와주소서'의 차이
22-23을 보십시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회당장 이라면 회당의 일을 책임지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제법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나이도 지긋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30대 초반밖에 되지 않는 예수님께 나와서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23절에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번만 요청한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여러 번 간청했고 엎드린 채로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간청한 내용은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그 아이 위에 손을 얹어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체면을 버렸습니다. 나이도 버렸고 지위도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셔서 내 어린 딸을 고쳐주소서' 참 귀한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감투나 지위 때문인데 이 회당장은 이런 것에 아랑 곳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는 앞에서 있었던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과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군대귀신 들린 자가 낳아서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17절,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바로 눈앞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서, 이적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눈앞에 서있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많은 능력과 풍성함보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작은 손해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치던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이 어찌 돼지에 비교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돼지 때문에 영생을 주시는 주님을 거절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찾아오기도 하는데 친히 찾아가신 주님을 떠나 달라고 밀어냈습니다. 감사는 못할망정 쫓아내지는 말아야하는데 내어쫓았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포기해야할 작은 것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내 쫓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에 비해 회당장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는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자기 안에 있는 작은 것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체면, 나이, 지위, 사람들의 눈, 여론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예수님 우리 집에 와 주소서'라면서 여러 번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에는 목숨을 걸지 못합니다.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돼지 키우는 일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예수님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에 반해 회당장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사소한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소한 것은 던져버리고 예수님께 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말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회당장의 요청을 듣고 그 집을 향하여 가는 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35절에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마옵소서"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걸어가고 있는 회당장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상황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마옵소서" 얼마나 충격이 크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능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가니 내 딸은 살겠구나' 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집을 향하여 가던 회당장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구나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한마디 더 한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마옵소서"
이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은 이제 부질없는 짓이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표현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내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고 나의 고통의 현장에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이 괴롭히는 것입니까? 신앙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괴롭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면 예수님은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온 산과 들을 헤매시는 주님입니다.
사람들이 언제든지 예수님께 나와 도움을 요청할 때 가장 기뻐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드리는 일은 가만 계시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우리 공동체를 위해, 고통 당하는 병자들을 위해, 죄악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 나가 수시로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주님 저기 저 죽어 가는 죄인을 구원해주십시오. 이 병든 자를 고쳐주십시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시옵소서" 이렇게 주님을 찾는 자를 제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편하려고 했다면 하늘에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무엇 하려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오셨습니까? 병들고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이런 일을 귀찮아하시거나 괴로워하시지 않습니다. 좋아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누가 주님을 찾아도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하십니다. 수시로 주님을 찾는 것, 이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당장이 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은 것은 전혀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거절했던 거라사 지방 사람들이 주님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36절에 이와 같은 보고를 들은 회당장은 두려움에 빠졌고 낙심했습니다. 이제 딸이 죽어버렸으니 예수님을 모시고 가도 별 수 없다는 생각에 잡혀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는 이 생각을 하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혈루병 여인을 고친 것을 원망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인 때문에 지체하지만 않았더라면, 조금만 빨리 갔으면, 내 딸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1) 일단 하나님께 알려드린 문제는 하나님이 처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알려드리면 그 문제는 이제 내 손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리하십니다. 7이렇게 하나님께 맡겨드린 다음에 인간이 할 일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잘 처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고도 안절부절하고, 염려하고, 결과를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내 손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비하신 성품을 따라 가장 좋은 결과를 주실 것입니다. 고통받는 세상에서 데려가 천국에서 편히 쉬는 것이 좋다면 그렇게 하실 것이고, 고쳐서 이 땅에 사는 것이 좋다면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문제를 맡겨드리는 이유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최선의 것으로 이루실 것을 믿기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2) 한계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회당장이 여기서 울고불고 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께만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이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한계 앞에 선 인간이 가져야 할 유일한 힘입니다. 회당장도 여기서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한계상황에 와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절망에 처해본 적 있습니까? 그리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더 이상 할 일은 없습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믿음을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시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을 따라 가장 적절한 방으로 해결하실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혈루병든 여인을 고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아이가 죽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길에서 이 여인 고쳐주느라 늦어졌기 때문에 도착하기 전에 아이가 죽어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실수 하신 것처럼 보여집니다. 아이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이요 혈루증 여인은 12년째 앓아왔기에 만성적인 질병입니다. 이것 때문에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는 도중에 이 여인을 고치고 대화하느라 시간이 지연되었습니다.
아마 회당장은 '저 혈루병 여인만 아니었으면 내 아이가 살았을 텐데...."하면서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우를 당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난 정말 급해 죽겠는데 주님은 느긋하시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체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대책이 있으시기에 늦어진 것입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늦게 도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응답이 늦어지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응답하십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회당장의 요구는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딸이 살아났습니다.
41, 42절을 보십시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 ..."
회당장의 요구는 이루어 졌습니다. 다만 회당장이 예상한 시간과 주님이 행하신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도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꼭 내가 예상한 통로와 시간을 따라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방법, 내 예상, 내 시간대로 응답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때로 어떤 문제는 주님께 맡겨 드렸는데도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처럼 주님께 알려드렸는데 아이가 죽어버린 경우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염려합니다. 주님이 안 들으셨나? 내 기도가 주님께 합당치 않는가? 왜 하나님께 드렸는데 문제가 더 악화되느냐고 낙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당하셨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이런 경우를 당했습니다. 밧새바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죄를 회개하고 금식하며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왕 다윗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죽어버렸습니다. 기도했는데,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 드렸는데 더 악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아이 데려가시고 솔로몬이란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대책이 있기에 때로 문제를 악화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살았을 때보다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인해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기도했는데도 더 악화된다. 그렇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믿고 기대하십시오.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 소망을 갖고 기다리십시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제한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끝이다, 하나님도 여기서는 못해본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먼저 포기해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만 바라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이 한시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면 그 순간부터 믿음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마귀는 늘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속삭입니다.
"현실을 봐라 너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지금 너는 배고프지 않느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말합니다. 회당장에게는 '지금 이 아이는 죽었다 죽은 것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산 것이나 죽은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면 무엇이든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현상황만 아니라 그 이면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사막에서 물이 없다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비를 주시고 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로 바위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바위가 깨지고 거기서 샘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홍해바다라는 현실 앞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바다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봤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갈라져 길이 생겼습니다. 겉보기에 가뭄으로 말라 갈라진 땅도 깊이 파보면 여전히 지하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막에서도 흐르는 지하수를 볼 수 있는 사람이고, 바다 앞에서도 길이 있음을 보는 사람이며, 원수의 포위 속에서도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고, 죽음 속에서도 영생을 보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천국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깊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마리아는 빈 항아리 속에서 가득 찬 포도주를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계 앞에 섰을 때 그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7:1-2)
꽉 막힌 현실 속에서도 은밀히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낙심치 않는 사람--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고개를 숙이면 땅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면 하늘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받고 마음에 두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고백이 없는 믿음은 힘이 없고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감추어 두어서는 안됩니다. 은혜 받은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닫고 있다면 그것은 병든 침묵입니다.따라서 여인에게 나타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은 비밀이 될 수 없었습니다.예수님께서 여인을 부르시자 여인은 두려워 떨며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그리고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씀 드렸습니다.간증은 내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역사 하신 일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능력이 임하셔서 삶이 변화되고 영혼이 치료되고 몸이 건강하게 되는 기적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행하신 큰 일을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간증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1.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2.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3. 나를 향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가능한대로 병들지 않는 것이 더 좋고, 병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병들었을 때는 건강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병은 의사에게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난치병, 불치의 병은 하나님이 치료해 주셔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치료됩니다. 주님을 만나야 치료받습니다. 기도로 만날 수 있습니다. 끈덕진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치료를 받아 건강을 얻기를 바랍니다. 건강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껏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 가지 문제로 한계 상황 가운데 계신 분들은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며,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높이며 찬양하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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