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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극복하기 위하여 2002-07-22 15:13:50 read : 23410
2002. 7. 21 // 행 10:9-16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죄라고 생각지 않는 것 중에 알고 보면 의외로 무서운 죄악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편견'입니다. 우리가 별로 죄라고 생각지 않지만 성경은 편견을 무서운 죄악이라고 규정합니다. 이 편견이 무서운 이유는 큰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그것을 큰 죄라고 여기시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 정치가는 인간이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지구촌 문제의 90% 이상이 지금 당장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얘기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바로 편견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수많은 우리들의 문제가 편견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1992년 봄, LA 폭동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큰 무리의 흑인들이 LA 시내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5,200개의 빌딩이 불타버렸고 1조원의 재산 피해가 났습니다. 2,383명이 부상을 당했고, 그 중 54명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피해의 대상이 누군지 아십니까? 거의 한국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모를 잃고 우는 이들, 평생 피땀 흘려 재산을 모아 가게를 샀는데 보험 하나 넣지 못하고 그것이 다 불타버려서 가족이 통곡을 하고 있는 장면이 미국 TV에 생생하게 방송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폭동 사건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놀랍게도 그 이유는 없었습니다.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던 까닭은 백인 경찰들이 한 흑인을 방망이로 구타하는 장면을 어느 시민이 찍었는데, 그것이 TV 전파를 타고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어요. 그러자 흥분한 흑인들이 떼거리로 몰려나왔습니다. 백인들을 공격해야 되겠지만 그들은 백인 동네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백인들을 공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군중들이 한인타운으로 들어와서 온 건물을 불지르고 총을 쏘아서 그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습니다. 우리 한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니요, 아무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흑인들의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흑인들은 우리 한국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편견을 굉장히 간단하게 정의하는데, 그것은 '미리 정해진 판단'입니다. 사실을 잘 쳐다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이미, 미리 판단을 가지고 사실을 대하는 겁니다. 선입관, 그것이 곧 편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TV 장면을 보신 우리 모두가 그 사건을 보고 내심 분노했을 것입니다. 저도 그 당시 미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통곡을 하는 한인타운의 한국 사람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제 마음에 분노가 치솟았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있는 전 해병 전우들이 중무장한 채로 LA로 몰려가 총을 쏘며 흑인들과 대결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아무 잘못 없이 죽고, 아무 잘못 없이 재산을 잃고,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며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인상을 쓸지 모르지만 놀라운 것은 우리 안에도 이러한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 안에 이만한 일을 저지를 가능성 있는 편견들이 얼마든지 자리잡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잠시 여러분의 시간을 내어 개인적 편견 시험에 응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질문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흑인들을 바라볼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립니까?" "흑인들이 왜 한국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었나요?"
그것은 먼저 발단이 한국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90% 이상이 흑인 타운에서 사업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흑인들 때문에 먹고살아요. 그런데 이곳에서 일하여 부자가 된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흑인들을 무시하는지요. 그들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 하여 흑인이라고도 부르지 않습니다. '검둥이'라고 부릅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거기서도 '깜디'라고 합니다.
하루는 교인들이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검둥이가 왔어요." 합니다. 이에 누군가 "깜디는 왜 데려왔노?" 했더니 흑인이 피부를 막 문지르면서 "나도 언젠가는 뽀예질 겁니다." 한국말로 이랬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을 가지십니까? 또는 아주 돈이 많은 부자들을 볼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십니까? 경상도에 사는 여러분들은 전라도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들 개개인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으신가요? 그들의 능력과 그들의 인격에 따라 대우하시나요? 아니면 전라도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단체로 생각하시나요? 불구자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정신병원에 치료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수많은 편견 속에 살아갑니다. 그것이 죄악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종교적인 편견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다른 교단의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로교와 침례교와 성결교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루는 한 성도가 서울에서 이사를 내려왔습니다. 몇 주 교회를 다녀서 제가 만나 우리 교회에 등록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싫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목사님, 영안교회가 너무 좋습니다. 예배도 좋고..." 그는 칭찬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왜 등록하는 것을 꺼리십니까?" 그가 말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장로교를 갔는데 어떻게 침례교를 다니겠습니까? 등록을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그의 대답은 저를 참으로 우울하게 했습니다. 제가 그 앞에서 말은 못했지만 그가 가진 편견을 마음속으로 꾸짖었습니다. 편견입니다.
여러분, 장로교면 어떻고 침례교면 어떻습니까? 침례교가 사람 잡아먹는 곳입니까? 저는 교인들이 이사갈 때 침례교를 꼭 가라고 고집한 적이 없어요.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성도들에게 "좋은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저는 항상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가 가는 곳에 좋은 교회를 살핍니다. 그리고 그 중에 좋은 장로교와 나쁜 침례교가 있으면 저는 가차없이 망설이지 않고 장로교를 추천합니다. 지금 이사 간 우리 성도들 가운데 홍정길 목사님 교회에 다니는 분이 두 가정 있습니다. 제가 소개했습니다.
우리와 다른 신앙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편견은 교묘히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 속에 있는 편견을 치료하는 작업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깊이 침투하여 나도 모르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하는 것은 때로 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초래하는 수도 있습니다. 때로 내 전통을 포기해야 합니다. 때로 내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합니다. 때로 내 무마를 부정해야 합니다. 때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내 가훈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일을 행해야만 합니다. 왜요? 편견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무서운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편견을 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저는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제 설교는 두 개의 큰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만 이해하신다면 제 설교를 충분히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가, 편견이 왜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인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로 이 편견이 그렇게 무서운 죄악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먼저 편견의 무서움을 살펴보겠습니다.
왜 편견이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인가? 그 이유로 본문은 두 가지를 지적해 줍니다. 첫 번째, 편견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의 무서움
1. 편견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게 되면 사실을 보는 눈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사실이 사실되지 못하는 것, 그 곳에서는 진리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억울한 자가 끊이지 않는 법입니다. 온갖 미움과 시기가 그로 말미암습니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 사실이 사실되지 못하는 곳, 진리가 비진리로 바뀌어 버리는 곳, 그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게 되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고넬료입니다. 그의 출신은 이달리야 사람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2절에서 단정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의 삶을 세 가지로 특징짓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백성을 많이 구제했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요? 그는 이달리야 사람이었어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어요. 로마에서 백부장은 그렇게 높은 위치가 아닙니다. 워낙 높은 계급이 많으니까요. 오늘날로 말하면 중대장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백부장은 그 당시 위치로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가장 높은 계급으로 로마로부터 파견된 사람이 천부장이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통째로 다스리는 이 천부장 바로 밑에 있는 계급이 백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위치 아닙니까?
열등국가의 사람들이 우등국가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습니다. 이는 미개국가에서 선진국을 흉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진국 사람들이 미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고넬료의 입장이 그러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의 통치 아래 있었고, 로마는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삼아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넬료, 백부장의 위치를 가진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얘기합니다.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백성들을 학대한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을 많이 구제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기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는 온 집안 식구와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본문은 얘기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놀라운 일이 베드로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요? 고넬료의 신분 때문입니다. 그가 이방인이었어요. 이방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가 고넬료의 모든 아름다운 일들을 무효화시켰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신앙생활을 통해 감동 받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은 오히려 냉소하며 냉담했습니다. 왜? 고넬료의 삶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고넬료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와 구제, 이 모든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한낱 허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이처럼 편견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국의 비평가 버나드 쇼가 있습니다. 그가 영국 사회를 관찰해보며 사회가 잘못된 것을 비평해 나가는데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로뎅의 작품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버나드 쇼가 그 사람들의 편견을 교정하기 위해서 한 계획을 갖습니다. 집에 큰 파티를 열었어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초청을 했어요. 만찬이 무르익어 갑니다. 만찬을 마칠 때쯤에 버나드 쇼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아주 귀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그림을 하나 가지고 와서 걸었습니다. "여러분, 멋있지요? 이것이 로뎅의 작품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웅성웅성 합니다. 이어서 편견에 사로잡힌 혹독한 비평들이 쏟아집니다. "야, 색깔이 왜 저 모양이냐!" "그래, 맞지? 우중충하지?" "어떻게 구도가 저 모양이냐?" 급기야는 "저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나?" 이러한 난도질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버나드 쇼가 다시 마이크 앞에 나아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합니다. "아! 여러분,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만 그림을 잘못 갖고 나왔네요. 이 그림은 로뎅의 작품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숙연해졌어요.
여러분,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것이 로뎅의 작품인 줄 알았을 때는 그 그림이 형편없어 보였던 겁니다. 왜?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었습니다. 이처럼 편견은 사실을 사실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편견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편견이 왜 무서운가? 진리를 진리 되지 못하게 하고 사실을 사실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2. 아무 이유 없이 상대방을 미워하게 만든다
편견에 사로잡혀서 타인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셨나요? 그들은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LA에서 있었던 폭동 사건처럼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경멸했습니다. 알프레드 엘드쉐인이라는 한 유대인 크리스챤이 유대인들의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연구해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이방인 아기는 태어나는 그 순간 부정하다." 애가 부정하답니다.
그래서 미쉬나(Mishnah;유대에 율법책을 해석해 놓은 책)에는 이방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 그를 돕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의술이 발달해도 애를 낳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그 옛날 애를 놓을 때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산모와 아이가 동시에 죽기 십상이었어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책에 이방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그들을 돕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가 아기를 짐승에게 맡기겠는가!" 유대인 아기를 이방인 의사에게 맡기는 것은 아이를 짐승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전통이요, 문화였습니다.
말이 됩니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가르친 하나님의 마음입니까? 아니잖아요? 전혀 하나님의 마음과 상반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왜요? 편견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개개인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이방인이라는 한 그룹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무조건 무시했던 겁니다. 그 무시함 때문에, 그 교만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결국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오늘 여기 나타난 베드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대사도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편견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가질 수 있다고, 베드로가 그 편견을 가졌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편견의 무서움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악을 범할 수도 있는 것이 편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편견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하게 만드는 거죠.
1999년도에 아메리카의 한 작은 나라인 온두라스, 에스테반이라는 마을에 한 선교사가 도착하여 선교를 하려고 하나 선교가 되질 않아요. 왜? 한 부족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사는데 얼마나 싸우는지 그들이 수십 년 간 전쟁을 하면서 죽여 온 사람들, 그 때까지 죽은 사람들이 80명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두 집안에 무슨 철천지원수가 져서 80명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는가 이를 궁금히 여긴 선교사가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기막힌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30여 년 전인 1966년도에는 그 두 집안이 굉장히 사이가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안에 잔치가 있어서 어떤 경기, 닭싸움을 벌인 겁니다. 아끼는 닭을 데리고 왔으니 처음에 잘 안 싸우잖아요? 그러니까 부리를 막 서로 맞대지요. 닭이 나중에는 피가 나도록 싸웁니다. 박수를 칩니다. 한참 물고 뜯더니 한 마리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날 이후 이 두 집안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자손들은 조상들이 왜 서로 미워하는지 몰랐고, 더군다나 닭싸움 때문에 그런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어른들이 닭싸움 때문이라고 얘기했겠습니까? 저놈은 나쁜 놈이라고, 저 집안은 우리 집안을 괴롭혔다고 날마다 얘기했겠죠. 그러다 하루는 밀었을 겁니다. 주먹을 쳤을 거예요. 그러면 저 집안이 우리를 병신 만들었다 해서 사람을 죽였을 거예요. 이에 원수를 갚아야지! 그 작은 이유 하나 때문에 80명의 젊은이들이 그 동네에서 희생당한 사실을 이 선교사는 발견하였던 겁니다.
왜 미워합니까? 편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많이 당하게 됩니다. 옛날에 얼마나 시집살이를 당했습니까? 시집살이 얘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집살이 당한 며느리가 자녀에게 그 얘기를 다 하는 거예요. 그냥 얘기합니까? 시어머니가 하나 얘기했으면 열을 보탭니다. "그래서 하여튼 너네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렇게 자란 아이는 할머니에게 한을 가집니다. 할머니가 얼마나 손자를 사랑합니까? 그러나 한국의 옛날 동네를 살펴보세요. 할머니에 대해 증오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머니의 편견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록 고생을 하였을지라도, 괄시를 당했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 할머니는 손자를 괄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손자는 왜 할머니를 미워하나요? 편견 때문입니다. 할머니를 일 대 일로 부딪히는 게 아니고 어머니의 편견을 통해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미움들이 나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으로 인한 영향이나 편견에 말미암아 발생합니다. 편견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편견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편견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입니다. 편견은 우리 사회를 파괴합니다. 편견은 이 세상의 공의를 굳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편견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편견을 치료하는 방법 몇 가지를 본문은 소개해 주고 있는데, 먼저 편견을 고치는 일이 인내와 고통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편견을 치료하는 방법
1. 인내와 고통이 필요하다
편견을 고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습관 하나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습관 하나 바꾸는 데 때로는 몇 개월, 몇 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하물며 우리가 자라왔던 문화와 전통을 바꾸는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은 이 베드로의 잘못된 편견을 고치기 위해 몇 가지 사건을 사용하십니다.
마침 베드로가 막 배가 고파 있었어요. 낮 12시인데 왜 배가 고팠는가? 아마 그날 아침은 베드로가 금식하는 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침 금식을 위해 먹지 않았을 경우 12시쯤 되면 정말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음식을 시켜놓고 그는 지붕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지붕에 올라가 기도한다고 하니까 또 흉내낸다고 지붕에 올라가지 마십시오. 한국 지붕은 삼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에 올라가 기도하면 떨어지기 딱 알맞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이에요. 편편합니다. 그래서 여름 저녁이 되면 더위를 피해서 거기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있고 기도의 장소로도 사용하고 했던 겁니다.
베드로가 음식을 시켜놓고 아마 음식 냄새를 견디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 기도나 해야 되겠다!"하고 "주여, 저의 배고픔을 참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여튼 기도했는데 비몽사몽간에 환상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 위에서 그릇이 내려옵니다. 오늘 이 그릇이 정확하게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이 국을 끓일 때 쓰는 큰 요리그릇 모양을 한 것 같아요. 이에 베드로가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할렐루야! 하늘에서 음식이 오는구나 하고 딱 보는 순간에 베드로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거기에 부정한 짐승들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눈 것을 아시지요? 비늘이 없는 것은 부정한 겁니다. 말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부정합니다. 쉽게 말하면 돼지고기는 부정한 것이라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지 않아요. 지금도 먹지 않습니다. 뱀장어, 메기 등도 안 먹습니다. 메기는 탕을 끓여도 구수하고, 미국 사람들은 메기를 튀겨 먹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메기 먹는 것을 보니 너무 먹고 싶습니다. 튀겨 먹으니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자기들은 율법에 의해서 못 먹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메기를 먹긴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먹느냐 하면 메기와 잉어를 접붙였어요. 그래서 태어난 것이 요즘 한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회인 향어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머리가 좋습니다.
그들은 이 부정한 것들을 얘기해서 먹지 못하게 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그때 베드로가 하나님께 얘기합니다. "하나님, 제가 평생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았습니다. 제가 깨끗지 못한 음식을 입에 댄 적이 없는데요. 못 먹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두 번째 동일한 그 환상을 보여주시며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못 먹겠습니다!" 다시 세 번째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못 먹겠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몇 번 주님을 부인했지요? 세 번입니다. 세 번이나 주님의 말씀과 이름을 부인하고는 그가 얼마나 후회했습니까?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는 변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성령을 받아서 사복음서의 그가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거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편견 때문입니다. 내 문화와 전통을 바꾸는 것, 내 어릴 때부터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내가 가진 편견을 하나님 앞에서 고치는 일이 이렇듯 어렵다고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저도 그것을 느낍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을 지금 모습으로 봐야 되는데 그 사람의 과거를 봅니다. 조상을 봅니다. 동네에 가면 옛날 어른들이 안 좋은 얘기를 했던 모습들이 그 사람을 바라볼 때마다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이 전과 2범이라고 하면 어떻게 보겠습니까? 만약 그가 하나님 앞에 정말로 회개하고 변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우리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에게 있었던 편견을 버리지 못합니다. 편견을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 앞에서 먼저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라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계속 아니라고 얘기하니까 하나님이 두 번째 와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세요.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우리가 상대방을 바라볼 때 보아야 할 것은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저 사람을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닙니다. 어머님이 그를 어떻게 보았는가, 내 친구가 그를 어떻게 나에게 얘기했는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볼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나님이 과연 그를 깨끗케 하셨는가? 과거에 그가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지금 하나님 앞에 그는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하나님이 만일 그를 깨끗케 하였다면 우리도 그를 깨끗케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오늘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신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받으셨나요? 어떤 우리를 받으셨나요? 우리가 깨끗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를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여 있을 때, 우리의 가치관이 잘못되어 있을 때, 우리의 인생관이 잘못되어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이 비뚤어져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 차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신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 부모가 나에게 편견을 심어 주었든 아니든, 우리 조상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심어주었든지, 내가 이 교회에 나왔을 때 어느 집사님이 저 사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나에게 심어놓았던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편견을 버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선입관을 버리고 그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화목이 우리에게 찾아올지, 얼마나 많은 기쁨이 그 가정을 샘솟게 할는지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이 아침에 미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의 명단이 떠오르십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왠지 모르게 싫어하는 사람, 지금 현재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불편하게 지내는 이유를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를 하나님 앞에서 명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혹 그 이유가 그 사람의 집안 내력이나 주위 사람의 혹평에 근거한 것은 아닌지요? 당신이 정말 그 사람을 직접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냥 일 대 일로 만나 얘기를 나누어 보시고 삶을 체험해 본 다음에 우리가 그를 비판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혀서, 선입관에 사로잡혀서 회복해야 할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불편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상처를 심어줍니다. 억울한 마음을 생기게 합니다. 사실을 사실되게 하지 못하고, 진리가 진리 되게 선포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견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유대인들 마음에 심겨 있는 이 죄악을 고치기 위해 오늘 그 유명한 사도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치부를 드러내신 겁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못합니다!" "잡아먹어라!"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방인 고넬료는 깨끗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만은 아닌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일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편견 때문에 고통 당합니까? 편견 때문에 상처받아 보셨습니까? 지금 당신은 누구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혹 편견 때문은 아닌가요? 여러분이 가졌던 문화와 전통과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인간의 눈과 잣대로 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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