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예언 2002-06-25 15:47:23 read : 20972
2002년 6월 9일 // 이사야서 55:1 ~ 3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와서 들어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겠으니, 이것은 곧 다윗에게 베푼 나의 확실한 은혜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14:20 ~ 25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혀와 외국 사람의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신자들에게 주는 표적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적이고, 예언은 불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방언으로 말하면, 초신자나 불신자가 들어와서 듣고, 여러분을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예언을 하면, 불신자나 초신자가 들어와서 듣고, 모든 사람에게서 질책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서 심판을 받아서, 그 마음 속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하고 선언할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4:15 ~ 24
상 앞에 함께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였다. 그런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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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린도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으면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언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방언도 큰 은혜지만,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예언의 은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뭐고 예언이 뭔지 우리는 다 압니다. 방언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게 되는 알 수 없는 말을 가리킵니다. 방언을 하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말하는 사람도 모릅니다. 방언의 내용은 방언을 주시는 성령과 그것을 해석할 은사를 받은 사람 외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기적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며, 신앙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미 방언의 은사를 아는 사람들끼리 모인 교회에서는 그런 방언 가지고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예언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예언은 모르는 말이 아닙니다. 한마디 하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한마디 설교로, 하나의 찬양으로, 하나의 기도로 소리가 울려나면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하늘도 알고 땅도 알게 그렇게 하는 말을 가리켜서 예언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주 쉽게 설명했습니다. 방언도 하나님의 이야기, 예언도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나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미래를 말하는 예언 역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어서 통역사, 해설자가 필요하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은 초신자들에게 필요하지만, 성숙한 신앙인들에게는 예언이 필요합니다. 방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서로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알려지고 전해지는 공동체, 그런 교회가 복이 있습니다. 저는 경동교회가 방언을 넘어서 예언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난주에 핀란드에 가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주관하는 회의에서 특별위원회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회의에서 진행된 얘기를 다 보고드릴 수는 없으나, 방언과 예언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헬싱키에 관한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핀란드 헬싱키 하면, 여러분 다 아시는 곳입니다만, 제가 헬싱키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면서, 그곳에서 꼭 우리 나라로 가져오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헬싱키의 호수였습니다. 호수는 헬싱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란드 전체가 호수의 나라였습니다. 호수가 몇 개냐 물었더니, 그쪽 설명이 그 자그마한 나라에 호수가 19만 개나 된다는 것입니다. 헬싱키 시내를 차로 돌아다녀 봤는데, 가는 곳마다 호수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일반적인 도시가 아니라, 완전히 호수로 이루어진 도시! 완벽한 환경,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사람 마음씨까지도 깨끗하고 순박하고! 이것들은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었는데, 특별히 오염이 심하고 각박한 서울로 가져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져올 수 없는 안타까움!
그런데 핀란드에서 가져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습니다. 거기도 요즈음이 여름인데, 회의를 마치고 밤 11시가 되었는데 해가 아직도 안 지는 거예요. 11시 반쯤 되니까 해가 지고 어두워졌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새벽 3시 반쯤 되니까, 해가 동쪽에서 환히 떴어요. 밤이 너무 짧아서 잠자기에 힘들었는데,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 말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구경할 거라고 합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헬싱키 북쪽으로 올라가면 북극인데, 북극에 가면 여름에 73일 동안 밤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예 24시간 해만 뜨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름밤을 하얀 밤(白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어두워져야 잠을 자는 우리 생활습관과는 달리, 해가 비쳐도 안 비쳐도 시간만 되면 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에 따라 살지만, 그 사람들은 시계 바늘에 따라 삽니다. 그래서 차라리 밤낮이 분명한 우리 나라가 좋다. 호수는 핀란드가 좋지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겨울은 어떻습니까? 내가 만난 목사님 설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난 12월 크리스마스날 예배를 낮 11시에 드렸는데, 바로 그 시간이 막 해가 뜨는 시각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가를 부르고 점심 먹고 다 끝나서 막 헤어지려고 한 때가 2시였는데, 그때 해가 졌답니다. 3시간 동안 해가 떠 있었던 거예요. 북쪽으로 올라가면 1년에 51일 동안에는 해가 없습니다. 밤만 있습니다. 여름에는 낮만 있고 겨울에는 밤만 있고! 살기 어떻겠습니까?
제가 느낀 것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에 모든 복을 다 주시지 않고, 호수를 주신 대신 태양을 왔다갔다하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사시사철을 주신 대신 호수는 적게 주신 것 같습니다.
핀란드에서 모인 이번 WCC 회의는 정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교회와 개신교는 갈등이 심합니다. 이 갈등을 어떻게 하든지 조정하려고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한 2년째 활동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번에도 해결하지 못하고 논란만 벌이다가 만 게 있습니다. 좀 있다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핀란드의 헬싱키에 가면 유럽 대륙에서는 제일 크고 장엄하게 지은 정교회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러시아 짜르 황제가 지은 성당입니다. 회의 둘째 날은 그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날은 핀란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은 러시아 풍의 루터교 성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교회와 루터교, 정교회와 개신교, 둘 사이에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둘이 합하여 예배를 교환해 드리고, 또 나아가서 토의를 했습니다.
핀란드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1115년에, 약 천 년 전입니다만, 스웨덴 선교사들에 의해 핀란드 땅이 발견됨과 동시에 신대륙처럼 핀란드는 스웨덴의 일부 영토가 되었다고 합니다. 약 7백 년 동안 스웨덴의 영토였다가, 1809년 러시아의 짜르 황제가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면서 핀란드는 러시아 영토가 되었습니다. 일종의 러시아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한 백년 정도, 그러다가 1917년에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짜르 왕조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세계가 섰고, 그때 바로 핀란드도 러시아에서 독립하여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독립한 지가 백 년이 채 안 됩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 스웨덴의 일부로 살다가, 러시아 식민지로 백 년을 지내다가, 그 다음에 독립하여 채 백 년이 못되는데, 이 나라의 생존 방법은 중립이었습니다. 동서 이데올로기의 냉전이 최고조에 달할 때도 그들은 중립, 말하자면 필란디제이션을 지켰습니다. 그들에게 중립은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종교도 어려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4년에 종교개혁을 하고 개신교가 시작될 때 독일에서는 천주교와의 싸움으로 나라의 반쪽밖에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깊고 가장 넓게 받은 곳은 바로 스칸디나비아 제국들이었습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스칸디나비아 제국에 가면 루터교가 국교이며, 국민의 80에서 90%가 루터교 신자입니다. 핀란드 역시 스웨덴의 영토였기 때문에 주민의 90% 이상이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3백 년경이 지난 1809년에 핀란드는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는데, 러시아의 국교는 정교회입니다. 정교회 신자인 황제가 핀란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보려고 러시아에 있는 어떤 정교회보다 더 훌륭한 정교회 성당을 헬싱키에 지어 주고서, 핀란드 사람들을 정교회 신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핀란드 사람들은 대단히 강인했습니다. 현재까지 정교회 신자가 전체 인구 520만 명 중에 단 1%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비록 러시아의 식민지하에서 살았지만, 종교개혁 때부터 믿었던 루터교, 국교이자민족의 종교일 뿐 아니라, 민족의 얼이요, 정신인 루터교를 버리고 정교회로 넘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도 안 되니까 짜르 황제가 루터교 교회도 지어주었는데, 정교회 성당과 똑같은 규모로 아주 돈을 많이 들여 러시아의 정교회 풍으로 지어주었습니다. 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그곳에서 예배를 보았습니다. 황제가 정교회식으로 지은 루터교 교회, 거기서 루터교 목사님이 설교하시고 정교회 신부님이 기도도 하셨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드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예배, 말씀의 예배는 정교회나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예배를 함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로부터 이천 년이나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만찬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지금도 함께 드리지 못합니다.
정교회 입장에서는 개신교가 베푸는 세례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베푸는 교회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에 이런 교회가 꽤 많습니다. 정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지 않는 세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만찬 역시 세례 받은 자만이 참석할 수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헬싱키에서도 세례와 성만찬만은 공동으로 집전하지 못했습니다. 각자 따로 집전하기로 하고, 그러나 서로의 세례와 성만찬은 인정해 주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선포의 전통을 따라서 오늘의 말씀 중심, 설교 중심 예배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생애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지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일주일이 예수 생애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토요일 무덤에 계시다가 주일날 아침 부활하신 그 일주일 동안의 기간은 우리가 해석하기에 성만찬 예배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흘리신 보혈, 찢기신 몸,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신 부활의 영광을 떡과 포도주를 떼는 걸로 기념합니다.
예루살렘은 성만찬 예배의 상징, 갈릴리는 말씀 선포 예배의 상징! 개신교는 갈릴리 중심으로, 정교회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갈릴리의 예수와 예루살렘의 예수는 한 분이신데, 교회는 갈릴리 예수와 예루살렘의 예수로 지금 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갑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 개신교도 마찬가지, 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례와 성만찬을 함께 나눌 수 없다고 하면, 우리는 서로 알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서로 알 수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됩니다. 정교회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개신교가 이해하지 못합니다. 개신교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는데, 정교회가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만 알고 나도 모르는 이야기, 방언입니다. 정교회는 지금 방언하고 있는 겁니다. 정교회 눈으로 보면 개신교도 방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언과 예언이 뭔지 아십니까? 방언은 아는 자들만 아는 말, 하나님만 알고 혹시 나만 알 수 있는 말, 다른 사람은 통역관을 세워야만 알 수 있는 말, 이런 말은 은사는 은사지만 방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은 뭡니까? 미래를 얘기하는 것만이 예언은 아닙니다. 예언이란 방언처럼 성령에 감동을 받아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예언은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알고 내 말을 듣는 옆 사람도 아는 말입니다. 가족도 압니다. 교회가 알고 사회가 압니다. 그걸 가리켜서 예언이라 이름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고린도교회 여러분, 방언한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방언이 최대의 은사인 줄 알지만, 방언은 통역자가 필요합니다. 방언도 중요하지만, 그 방언은 예언으로 승화되고 또 심화되고 확대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독백과 같은 방언 때문에 교파가 갈라졌습니다. 우리 사이에 독백이 아닌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으면, 동시에 모든 인간끼리, 교회끼리의 대화가 있으면, 우리는 이미 방언의 은사를 넘어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 경동교회는 분명히 방언을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이 아는 구원의 메시지 속에 내가 풍덩 담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내밀한 대화를 하십시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받으셔야 됩니다. 그러나 경동교회는 하나님과만 통하는 수직적 관계, 곧 방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와 봉사와 찬송 속에, 모두가 다 알고 함께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그 일들 가운데에서 경동교회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언의 은사를 받고 있습니다.
예언하는 은사, 이 은사를 받아야 방언이 제 빛을 발합니다. 십자가를 보시면 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줍니다. 십자가에는 수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방언으로 서로 대화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반드시 주위의 사람들과도 신앙과 사랑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수평입니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함께 담고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는 방언의 은사도 받고 예언의 은사도 받아서 구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를 마련했으니 이곳에 와서 함께 마시고 먹고 즐깁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절했습니다. “저는 땅을 샀기 때문에 가봐야 되겠습니다.” “저는 소 몇 마리 샀기 때문에 가봐야 되겠습니다.” “장가를 막 들었으니 잔치에 못 가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를 열어놓고 복된 자리에 다 오라고 했더니,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그것이 방언인 줄 알고 못 알아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감동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있지만 마음의 귀가 뚫린 사람, 눈이 있지만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만이 듣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보는 것은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땅의 음식만 아니라, 하늘나라 음식도 함께 먹으십시오. 장가들어서 못 가겠습니다? 부인까지 데려오면 될 것 아닙니까? 소 몇 마리 사서 안되겠습니다? 그 소도 돌보고 와서 마음의 소도 살찌우면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 먹는 것, 복이 있습니다. 방언만 하는 사람은 못 알아듣습니다. 예언까지 하는 사람은 그 심오한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이 합하고,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나라가 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점으로 모두가 합하면 우리는 성령의 엄청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 하나를 여러분 오늘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이미 우리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런 은사는 돈 주고 사는 게 아닙니다.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먹으십시오. 값도 지불하지 말고 먹으십시오.” 그 먹는 것을 포도주와 젖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양식을 거저 줄 테니, 이 양식을 먹되 혼자 먹지 말고 나누어 먹으십시오.”
어느 시인이 이런 내용의 시를 읊었습니다. “수직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또한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눔으로써 함께 살찌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여, 뭔가 잃었다고 애달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가진 것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빼앗아 가실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너무 비굴하게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부요하게 하십니다. 부요하다고 오만하지 마십시오. 심판을 받습니다. 누더기 옷을 걸치더라도 희랍의 철인 디오게네스처럼 당당하게 살아 보십시오. 욥처럼 가진 것 다 잃고 건강마저 잃고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유를 가져 보십시오. 천하를 얻고 왕이 된 다윗이지만, 하나님이 회개를 요구할 때 엎드려 눈물로 회개하는, 높은 자의 겸손을 가져 보십시오.”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함께 받는 사람은 인간의 높이를 압니다. 인간 마음의 깊이도 압니다. 방언의 은사만 아니라 예언의 은사까지 받은 사람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넓고 넓은 은혜를 압니다. 큰 폭의 마음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사 가운데에서 넉넉한 사랑 나누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울음 속에 하나님의 초청장이 있음을 깨달으십시오.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에 담긴 하늘의 뜻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아름다운 천지창조의 비경을 느껴 봅시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 속에, 파도 소리 속에, 바람소리 속에, 꽃잎이 흔들리는 모습 속에, 이슬과 노을과 등대와, 계절을 따라 자라는 곡식을 보고, 우리는 하늘이 주시는 조화, 하나님의 섭리, 하늘의 복을 깨닫고 그것을 서로 나누는 기쁨, 그것은 방언과 예언을 함께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방언의 은사, 하나님이 주신 복이 너무 고마워서 그것을 이웃과 교우들과 함께 나누는 예언의 역사, 이 두 가지 역사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회가 방언만 하는 자기 모놀로그 사회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예언의 능력을 갖추고서 서로 대화하며 살아가십시다. 성령은 방언의 주인이요, 또한 예언의 주인입니다. 이 은사를 여러분에게 동시에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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