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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다스리라
2002-06-18 14:59:12   read : 19461

창세기37장1-11절 // 2002-06-16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요셉을 통해 신앙적 교훈을 얻어내는 방법이며, 또 다른 하나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초점을 두어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전자의 방식으로 설교를 한다면, 이렇게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형제들에게 말함으로써 시기를 받았다. 하지만, 결코 그 꿈을 잊지 않았다. 결국, 요셉은 꿈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인생의 성공을 원한다면, 어떠한 환난이 찾아와도 그 꿈을 잊어서는 안 되며, 놓쳐서도 안 된다." 그러나, 오늘 저는 요셉을 시기하는 형들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차적인 원인은 아버지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은 열 두 명의 자식들 중에 유독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까,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요셉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했습니다. 야곱이 어느 정도까지 요셉을 신뢰했는지에 대해서는 11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그렇습니다. 야곱만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는 표현은 '그 말을 지키었다'는 뜻으로써, 야곱 자신이 요셉의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동시에 요셉이 꾼 꿈의 내용이 야곱 자신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힐 정도의 기대치와 일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요셉을 그토록 사랑했던 것입니까? 첫째는 요셉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을 일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아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라헬은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요, 더욱이 뒤늦게 낳은 늦둥이였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그만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뜩이나 요셉에 대한 사랑이 다른 아들들에 비해 편중되어 있었는데, 그의 생모마자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야곱은 요셉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과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요셉이 남다른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 나이에 생모를 잃었으니 더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야곱이 요셉만을 감싸는 것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4절 말씀을 봅시다.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여기서 "언사가 불평하였더라"는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이 그에게 샬롬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샬롬"이라는 말 즉,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가족간에 아는 체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암만 가족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는 체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말도 안 되는 꿈 이야기를 하자,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 부모에게 절을 받으며, 어떻게 그 형제들에게 절을 받고 섬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형들의 분로를 사서 애굽에 팔려가게 됩니다. 오늘 저는 요셉의 형들의 마음속에 생긴 분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문제제기 : 분노란 무엇인가?

성도 여러분, 분노란 무엇입니까?

찰스 R. 스윈돌(Charles R. Swindoll)목사는 "분노란 우리 자신이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개인적인 불쾌함을 가져다주는 적대적인 감정적 반응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분노라는 말대신에 "시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나'(??????)로써, '부러워하다', '시기하다'라는 말로 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음속의 분노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즉,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말한 꿈 이야기를 듣고는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분노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심리학에서는 분노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가벼운 짜증(irritation)의 단계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의해 초래된 가벼운 불쾌감 정도로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경험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분개(indignation) 단계입니다. 분개의 단계에서는 잘못된 것에 대한 앙갚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짜증과 분개는 표현되지 않은 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격분(wrath)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격분의 단계에 이르면 보복하려는 강한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격노(fury)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격노하게 되면 폭력과 감정적인 통제의 상실까지도 나타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광분(rage)입니다. 광분은 가장 위험스런 형태의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의 언행으로 적어도 그의 형들의 분노가 격노와 광분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야 단순히 '시기했다'고 하지만, 사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말에 격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2. 분노의 정당성

그렇다면, 요셉의 형들이 "분노했다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옳지 않은 것입니까?"

사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분을 품은 것 자체는 그리 큰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것이 잘못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말씀처럼,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누구나 분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도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열여덟 번 이상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님 역시 성전 안에 있던 상인들을 향하여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좀 들어 보시오. 당신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진 않소. 그렇지만 지금 당신들이 하는 일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오"라고 유순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어도 조건이 따릅니다. 무엇보다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날이 저물기 전까지 마음속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사움해도 며칠씩 가면 안 됩니다. 형제들과 싸우더라도 며칠씩 가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낮에 있었던 불쾌한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밤잠을 설치는 경험을 한 두 번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무엇을 하게 됩니까? 씩씩거린다거나 욕을 한다거나 그 사람을 저주한거나, 어떻게 하면 골탕 먹일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골탕 먹일 방법이 떠오르면 그제야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잠을 자게 되지 않습니까? 참 우습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들고 나야 잠이 오니,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죄짓는 길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 말씀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장 19절로 21절 말씀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죄짓지 않기 위해서 분노를 하지 말며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찰스 R. 스윈돌 목사는 정당화 될 수 있는 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고의로 불순종 되었을 때 분노해야 합니다. 만약 다른 성도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그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황금 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것을 보고 화를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자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의 말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말년에 이방여인들과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신을 들어와 섬기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왕기상 11장 9절과 10절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공개적인 불순종을 선택할 때 언제나 강하게 분노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원수들이 자기들의 권한 밖에 있는 지배권을 취할 때 분노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그 노가 크게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자유가 위태로워질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오히려 가만히 앉아 구경꾼으로 있는 것은 죄가 됩니다.



셋째, 부모들이 그 자녀들을 불공평하게 다룰 때 정당화 될 수 있는 분노가 발생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공평치 못하게 다룸으로 인해 그들을 격동시킬 때 그들은 분노로 반응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 가지 이외에 일어나는 분노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잘못된 동기에서 나오는 분노라든지,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분노한다든지, 진실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채 너무 속히 반응을 한다든지 하면서 분출시키는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피해를 주게 됩니다. 홧김에 범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아버지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여 그만 네 명이나 되는 자기 자녀를 모두 익사시키기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노는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삶에서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⑴ 사소한 감정을 잘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알랭(Alain Emile Auguste Chartier)이라는 사람은 그의 행복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사람은 흔히 큰 불행에 대해서는 체념을 갖지만 조금 기분 나쁜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은 큰 불행보다는 사소한 일에 있다. 사소한 기분 나쁜 일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기는 것이며 또 그 사소한 일들이 도화선이 되어 큰 불행으로 발전하는 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그릇이 기울어지면 엎어지는 물과 같은 것이니 늘 조심성 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일단 기울면 평화와 조화가 파괴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기울기 쉬운 순간에 억제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화가 나거나 분노가 치미는 것은 알랭의 말대로 아주 사소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주 사소한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인간관계에 성공할 뿐 아니라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힘센 사나이라고 믿고 있는 한 장사가 어느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걸어가다 보니 사과 크기만 한 이상한 물건 하나가 길의 중앙에 놓여 눈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감히 내가 가는 길을 막고 있다니.' 그는 길에 놓여 있는 것을 발로 툭 한 번 찼습니다. 그러자 사과 크기만 했던 그것이 어느 새 수박 크기만 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장사는 그것을 보고는 더 힘껏 발로 찼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바위만큼 커져 버렸습니다. '뭐야, 나를 이겨 보겠다고? 어림도 없다!'하며 열이 오른 장사는 몽둥이로 그것을 마구 내리 쳤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키보다 더욱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는 그것을 들고 집어던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커져만 갔고 덩달아서 그의 얼굴도 일그러져 갔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게 된 장사는 가만히 그것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앞에 여신이 나타났습니다. 여신은 산더미만큼 커진 물건을 보고는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주자 순식간에 다시 사과 크기만 하게 변해서 길모퉁이에 툭 떨어졌습니다. 그 때 여신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꾸 건드리지 마세요. 그것은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두거나 오히려 웃어넘기면 작아지지만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더 커지고 만답니다. 조금만 참으면 곧 잊혀지는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 중에 많은 것들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여 문제를 더욱 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노하기를 더디 하십시오. 잠언 19장 11절 말씀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⑵ 혀를 억제해야 합니다.

혀를 억제한다는 것은 분노를 다스리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분노를 일으킬 만한 소지를 제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에는 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장 8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많은 경우 성도들이 상처받는 것도 이 "혀의 문제" 즉 "말의 문제"에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이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인격을 무시하는 말을 내뱉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그러니, 쉽게 상처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할 수만 있다면 말을 적게 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혀를 다스리는 지혜입니다. 혀를 다스리기에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혀를 결단코 길을 들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내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성도는 모든 문제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으려고 해야만 합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문제만 다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상관치 말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문제를 찾고 그것을 인정할 때 혀가 통제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혀를 통제함으로써 아름다운 말만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5장 1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혀를 다스리십시오. "노를 쉬게"할 것입니다.



⑶ 의사 전달에서 정직성을 개발하고 분노가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 분노가 자라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짓을 버리고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 가운데서 말해진 정직한 말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말 한 마디라도 사랑스럽게 또 진실하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실이 담긴 말이야 말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스런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는 것을 듣고 불평할 때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언뜻 보아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발언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차 없이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본질적인 생명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삶이 복되며 더욱 발전하기 원한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고 듣는 고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의 태도가 아닌, 상대방의 인격적 발전에 초점을 맞춘 엄중하고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긴 안목으로 본다면 솔직함과 허심탄회함, 곧 가차 없는 진실보다 유익한 것은 없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⑷ 분노를 억압하지 말고 솔직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에 대한 반응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분노를 마음속에 가둬두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삭힌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노를 꾹 억누르고 참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물어봅니다. 화가 났을 경우 그것을 마음속으로 꾹 참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만약 분노를 참음으로써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 다음에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화를 참기만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데이빗 비스콧 박사는 "우리는 감정에 충실하게 삶으로써, 가장 생동감 있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것을 권면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인간의 감정이란 통제되면 통제될수록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킬 소지가 더 있습니다. 그럼으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분노의 근본적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제대로 표출한다면 오히려 쉽게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저명한 상담가들은 분노를 다스리는 한 방법으로 "솔직하라!", "당신의 분노를 소유하라", "그것을 거리낌없이 표현하라!",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정면으로 맞서라", "분노를 있는 그대로 말해 주어라." "다른 이들에게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확실히 알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저는 여기에 딱 두 가지를 꼭 덧붙이고 싶습니다.

첫째, 표현은 하되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분명,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정을 드러내기 앞서 "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고, 문제가 없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럴 때, 또 다른 분노를 야기시키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둘째,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나에게도 분명한 단점과 실수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분노는 인간관계를 망치는 가장 치명적인 행동입니다. 분을 다스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분노하는 것, 내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분노하는 것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소한 감정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세요. 혀를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사심없는 사랑과 진실의 언어로 말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보다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힘써 지킴으로써,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일터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춘천중앙교회 온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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