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삼키라 2002-06-07 19:03:16 read : 15877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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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 욥기 33:15 ~ 18
사람이 꿈을 꿀 때에, 밤의 환상을 볼 때에, 또는 깊은 잠에 빠질 때에, 침실에서 잠을 잘 때에,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경고를 받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며, 사람의 목숨을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서신서의 말씀 : 고린도전서 15: 51 ~ 58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될 것인데, 마지막 나팔을 울릴 때에, 눈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 요한복음 11: 38 ~ 44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문은 돌로 막혀 있었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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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희들이 수난절도 지내고 부활절도 지냈습니다. 수난절의 죽음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부활을 통해서 새롭게 사는 이야기. 사실 수난절을 지내며 저희들은 인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오늘 부활 두 번째 주일, 마지막 이야기에서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이야기는 천지창조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처음 만든 이야기입니다. 제가 인도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지창조 신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도사람들은 윤회설을 믿는 사람들인데, 이분들이 갖고 있는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하나 관심 있어서 찾아 봤습니다.
처음에 창조주가 남자를 만들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순서는 성경의 말씀과 같은 것 같습니다. 남자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록은 없는데, 여자를 만든 기록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여자를 만들 때 연못 속에 있는 연꽃을 가지고 여성을 만들었더니, 여성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창조주가 여성을 불러서 제안을 합니다. "아름다운 그대에게 아름다운 집 하나를 지어 줄텐데 어디다 지어 주면 좋겠는가?" 그래서 창조주가 제안을 합니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아라. 그 속에 내가 용궁하나를 지어 주마." 그래서 여성이 연못 속을 들여다봤더니 연못 속에는 귀신이 우굴 거리고 물뱀들이 너무 많아서 거기 들어가기 싫습니다. 창조주가 다시 그 여성을 광야로 데려가서 넓은 들판을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이 들판에 집 하나를 지어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여성의 말이 "저는 본래 연꽃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되어서 몸이 약합니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비바람이 쳐서 제가 견딜 것 같지 않습니다. 싫습니다." 그 다음에 창조주가 동굴로 데려갑니다. 바람도 없고 비도 들이치지 않는 동굴로 데려가서 "이 동굴 속에다 집 한채 지면 어떻겠는가?" 물었더니 이 여성 말이 "저는 본래 밝은 데서 산 사람이기 때문에 어두워서 싫습니다."
집을 지을 장소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가 어떻게 할까 궁리중인데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데, 먼저 창조함을 받은 남자가 '벤죠'라고 하는 악기를 치면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창조주 앞을 지나갑니다. 그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좋아서 남자의 가슴속에 여자의 집을 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여성을 불렀습니다. "내가 보아하니 저 남자 가슴속에 집을 지어 주고 싶은데, 한번 가슴속을 들여다보아라." 여성이 호기심이 나서 남성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딱 들어다보니 첫 번 떠오른 장면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남자의 가슴은 꼭 연못과 같아서 속이 음침하고 뱀이 우굴 거리고 간교합니다. 그 가슴에 들어가기 싫습니다." 우리 남자들 가슴은 그런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본 남자의 가슴은 완전히 살벌한 광야와 같아서 모진 바람만 생생 내리칩니다. "거기 싫습니다." 또 한쪽 가슴을 봤더니 동굴과 같이 음침하고 음흉합니다. "거기도 싫습니다." 창조주가 장소를 못 정했습니다.
그래도 창조주가 제 3의 장소를 물색해야겠는데 장소가 없습니다. 할 수 없어 창조주 말합니다. "장소를 아직 못 정했는데 집을 못 지으면 그대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다. 자살을 하겠는가 그래도 살길을 찾겠는가?" "살길을 찾겠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남자의 가슴에 들어앉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자에게 분부합니다. 너는 남자의 가슴에 들어가서 그 가슴이 연못처럼 음침하고 음흉하거든, 그 속에서 하나의 진주가 되어 남자의 음흉한 가슴을 변화시키며 살거라. 그 남자의 가슴이 광야처럼 거칠고 바람이 치면, 한송이 백합화가 되어 그 남성을 변화시키면서 살거라. 남자의 가슴이 동굴같이 어둡거든, 작은 태양이 되어 어둠을 밝히며 살거라." 그래서 여성이 고민 끝에 결단을 하고 남자의 가슴속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삽니다. 이렇게 시작한 창조는 돌고 돌아서 한 인생이 마감을 하면 다시 처음 출발한 인생으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로 태어나던가 합니다. 그건 빙글빙글 도는 동그라미 역사입니다. 무엇으로 태어날지는 모르나 창조의 이야기는 다시 빙글빙글 돌아서 끝없이 돌아갑니다. 영겁의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세계를 움직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 창조 신화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를 움직입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하실 때 "이 세상이 왜 이렇게 각박합니까? 어둠침침합니까? 정치는 왜 이렇습니까? 경제 사회 도덕 모든 상황이 침체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이 땅의 세계를 지배하는 남성들의 가슴이 타락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여성들이 진주, 백합화, 태양을 다시 한번 만들어 갑시다. 그러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지배하든지 간에 빙글빙글 도는 역사도, 우리 이해에 의하면, 십자가에 오면 일단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이 전하는 창조설화를 보면, 우리는 빙글빙글 도는 동그라미 역사가 아닙니다. 그런 사관이 아닙니다. 출발에서 마지막까지 직선으로 움직입니다. 이 직선은 돌아올 수 없는 직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선을 따라서 살다가 십자가 골고다 언덕에서 일단 마감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는 남자를 창조하고 갈비뼈 하나를 빼다가 여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갈비뼈 하나가 모자라서 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 여성들이 갈비뼈 가지고 온 거 도로 줍시다. 그러면 세상이 좀 나아질 것 같습니까? 창조의 형태를 바꾸면 되겠습니까? 어디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까? 갈비뼈로 만든 하나님의 인간 창조역사도, 인도의 창조 역사도, 세계 모든 창조 역사가 십자가에서 일단 마감을 합니다. 그 마감을 가리켜서 죽음이라 이름합니다. 이 마감된 죽음, 거기까지 가는 행로 그 이후에 가는 길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의 답은 하나입니다. "죽음을 삼켜라." 죽음을 삼킬 수 있는 건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죽음을 삼킬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의 기록입니다.
죽음이 있기까지 우리 인생은 여러 가지 과정을 밟아 오는데, 사람은 살아가면서 불평등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차별도 많습니다. 인종의 차별, 빈부의 차별, 힘있는 자 힘없는 자에 대한 차별, 이런 속에 살아가는데 제가 보기에 모든 인간에게 세 가지만은 아주 평등합니다. 첫 번째 평등은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살 권리가 있습니다. "생명권!" 이것만은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권입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생명권은 있습니다. 두 번째 평등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죽는 건 권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죽을 의무!"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평등이 있습니다.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경험하는 의무"는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경험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으나, 죽음에 관한 설명은 아무도 못 해주었습니다.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하신 말씀, 성령을 통하여 하신 말씀, 성경말씀 전체가 다 죽음 이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리를 추구합니다. 진리란 그냥 말의 진리가 아니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진리, 경험된 진리이어야 합니다. 그 진리가 바로 구체적인 진리요, 그것만이 참 살아 있는 진리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갑니다. 경험될 수 없는 것! 몰 역사적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격합니다. 경험할 수 있는 진리. 죽음을 다 경험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다 죽습니다. 진리입니다. 사람이 다 죽음을 다 경험할 수 있습니까? 경험담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죽음은 진리입니다. 경험담은 못 듣습니다. 그러면 죽음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까?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진리입니까? 경험 할 수 없다고 진실이 아니라고 벗겨내야 합니까?
죽는 것은 사실입니다. 죽음의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만, 어느 시인이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죽음의 세계여 그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나, 왜 사람이 당신한테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까? 그곳이 그렇게 좋습니까?" 그곳에 가면 철통같은 감옥인지 모르나, 선인도 악인도 가면 함흥차사가 됩니다. 그렇게 좋습니까? 아무도 거기에 대한 보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믿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인 건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이야기가 오늘 요한복음에 써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동생을 잃은 마리아가 예수에게 와서 사정을 합니다. "내 남동생이 너무 일찍 아깝게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예수께서 나사로 보고, "나사로야 죽음에서 나오너라" 나사로가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이 나사로가 살아난 얘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부활하시기 전에 이미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어디에도 나사로가 살아나서 자기가 경험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살아난 것은 현실이나, 자기가 살아났던 경험을 나사로조차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처음 천지만물 만들 때, 사람을 창조할 때, 천지창조의 모든 기사 가운데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혼돈과 공허 가운데서, 빛을 만들고 천지만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무(無)로부터의 창조", "아무것도 없는 무(無)세계에서의 창조", "크레야지오 엑스 리힐로(creatio ex nihilo)", "아무것도 없는 리힐로(nihilo)부터의 창조"라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무(無)로부터의 창조입니다. 문제는 무(無)로부터 창조된 우리 인간은 실증적 역사를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음에서 살아 나왔는데, 나사로가 나흘동안 있었던 죽음의 세계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제가 천지창조의 일을 가지고 보면, 나사로는 무로부터 살아났습니다, 죽음의 세계란 무의 세계이며, 첫 번 창조를 받은 아담은, 아무것도 없던 무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인간입니다. 그게 아담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가지고 우리가 살아갑니다.
죽음 이후에 올 죽음이라는 무로부터의 새로운 창조는 부활이라 이름했습니다. 부활을 받은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생명, 그것을 성경말씀은 제 2의 아담, 곧 그리스도의 생명의 세계라 이름했습니다. 둘 다 한쪽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 또 한쪽에는 죽음이라 이름하는 무, 거기에서 창조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창조의 세계는 우리는 경험했지만 말 할 수 없는 세계, 앞으로 말못할 세계를 앞에 확실하게 그리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 둡시다. 그것은 살아 계셔서 지금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 손안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쿵 저러쿵 논리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단, 우리가 오늘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살 것입니까?
두 가지 인생관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이 죽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인간 세계사, 인생사의 마감, 마침표입니다" 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오늘 우리의 현실은 답답할 수도 있고, 죽음으로 마침표로 되는 인생, 인생관이 성립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증언을 통해서, 마침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쉼표일 뿐입니다" 하고 확신한 사람의 오늘 이 생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죽은 이후의 생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생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일 뿐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하나님께 맡기더라도 쉼표로 생각하고, 오늘 부활의 역사가 우리에게 약속된 이상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은 논리가 아닙니다. 그 약속은 실증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약속은 믿음으로 믿고, 오늘 주어진 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가 좋아하십니다. 죽음을 삼키는 건 우리가 삼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한테 삼키게 하고 우리는 삼키기 이전의 생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갑니다.
내년이면 저희가 월드컵 경기를 합니다. 그래서 축구경기가 벌어질 텐데, 제가 인생의 흐름과 경기를 한번 비교해 봤습니다. 우리가 월드컵 때 16강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전 국민적인 열화가 있었는데 16강에 들지 못했습니다. 이번은 개최국가니까 들어갈텐데…. 경기를 할 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룰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경기에 참여할 수 있으나 선발을 해서 16강에 진출을 하고, 거기서 또 추려서 8강가고, 4강가고, 준결승 가고, 결승 가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든 게임 룰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룰을 적용하신다면 이렇게 하실 것 같습니다. 장수하시는 분, 그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장수하고 싶은 분들, 장수하시는 분들, 기뻐하십시오. 아마 16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준결승까지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시는 것 같습니다. 아깝지만 요절하시는 분, 또 중간쯤에서 생을 마감해야 되시는 분들, 그 분들께서는 준결승까지 못 가고, 4강이나 8강이나 16강에서 마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불공평합니까? 그것에 대한 답은 전 모르겠습니다. 단 하나님께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에게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썩혀서는 안됩니다. 장사해서 많은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장수하여 능력이 있어서 경기를 많이 하게끔 부름 받은 사람, 어떤 사람은 그렇게 경기를 많이 할 필요가 없어서 첫번 예선만 치르고 마감하는 사람, 불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불의 한 것 같진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게임 룰이고, 하나님의 룰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비유를 주시는데, 예수를 통해서주신,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인이 와서 품꾼들을 뽑아서 포도원에서 일하게 합니다. 그들과 계약을 체결합니다. 하루종일 일한 품삯이 일 데나리온입니다. 아홉시에 인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12시에도 인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오후 3시에도 데리고 왔습니다. 오후 5시에도 데리고 왔습니다. 마지막 일이 끝나고 주인이 인부들에게 품삯을 줍니다. 그런데 품삯은 저녁 5시에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똑같이 일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먼저 와서 일한 인부들이 불평했습니다. "노동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똑같은 임금을 주십니까?" 주인의 대답입니다. "임금을 주고 말고는 내 뜻에 달린 것! 왜 간섭이냐!" 나는 얼마나 일했던지 간에 일 데나리온을 주기로 했으면 그것만 주는 것이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가 오래 살고 싶고 건강하게 살고 싶고, 누구나 소망이 있습니다. 오래 사시는 분들은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축복 주셨습니다. 그러나 꼭 결단하십시오. 게임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일찍 가시는 분들은 서러워하십시오. 그러나 다행이라 생각하십시오. 게임을 적게 해도 됩니다. 많이 하나 적게 하나는 하나님의 뜻, 마지막 결승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승 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가 경기에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경기에 출전하든 출전하는 경기가 연습인 경기는 없습니다. 일단 출전하면 최선을 다해서 예선에 통과해야 결승까지 올라가는 것 아닙니까? 누가 인생을 보고 예선이라 했습니까? 누가 인간에 있는 모든 결단을 보고 이것을 연습이라 했습니까? 연습인 경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최후의 결단과 똑같습니다. 모든 경기마다 최선을 다합니다. 결승전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순간 순간,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들, 그 자체에 영원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시간이 그냥 현실적 시간이 아니라 종말적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더 계속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순간이 종말적 신앙입니다. 시간입니다" 하고 사는 사람, 그 사람에게 역사적 순간이 의미 있는 결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제가 여기에서 물고기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일식집에 가서 고기 많이 드시죠? 제가 대구탕을 잘 먹는데, 대구는 먼바다에서 잡아 음식점까지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데 대구라는 생선은 냉동시키면 맛이 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냉동시키지 않고 가지고 오는 방법 중 하나는 바닷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그 속에 넣어 오는데, 밀폐된 공간에 대구를 넣어오다 보면 생선살이 흐물흐물해져서 막상 탕을 끓이면 맛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낸 방법이 있습니다. 대구가 제일 실어하는 물고기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물고기가 메기입니다. 이 메기를 밀폐된 공간에 대구와 함께 넣으면 대구는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요동친다고 합니다. 음식점에 가서 우리 밥상에 나오기까지 이 대구는 살기 위해서 메기와의 대결에서 사생결단을 하고 움직인다고 합니다. 죽지 않고 움직인 대구는 맛이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게 일식전문가들의 답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밥상에 올라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재능과 모든 축복이 변질되면 안되겠습니다. 맛있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보람 있게 살고, 정의롭게 살고, 이걸 어떻게 보장할까? 그래서 우리 삶 속에 늘 메기떼를 보냅니다. 도전이 없는 인생이 있습니까? 비판이 없는 생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그냥 잠잠한 냉동된 상태로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물이 가득한 곳에 그냥 몸이 부풀려서 살고 싶진 않습니다. 뭔가 도전 속에 좌절과 함께 동거동락 하면서,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자부심, 우리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의 피조물성! 이것을 지켜가려고 합니다. 그 지켜 가는 기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생명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는 동거동락 하기를 여러분께 약속합니다.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맛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도, 가정도, 개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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