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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상의 종교" 2002-06-07 18:56:30 read : 14913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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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ː
구 약― 출애굽기 34 : 29-35
서신서― 고린도후서 3 : 7-11
복음서― 마태복음 17 : 1-8
우리 인간은 두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하늘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과 슬픔이 있는 이 땅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빛의 세계를 경험하기도 하고, 그 세계를 희망하면서 살지만,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두운 이 땅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저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합니다. 빛과 영광이 가득한 그 곳에 이르는 것 자체가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설을 말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사는 사람은 항상 저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두 가지 방향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인간
의 근본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초월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고, 비전과 현실을 잇는 것이며, 신적 권능과 인간적 무능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두 차원이 교차하는 것이 바로 인간 실존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사람의 제자를 데
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서는 평소처럼 말씀을 선포하시지 않고, 하나의 상징을 보여 줍니다. 말하자면 변화산 상의 환상 같은 기적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예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갑자기 등장해서 똑같이 빛난 얼굴에 흰옷을 입고서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목도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고 감격한 나머지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너무 좋습니다.
이러한 광경이 영원히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여기에다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한 초막에는 주님이 계시고, 다른 하나에는 모세가, 또 다른 초막에는 엘리야가 계시도록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기적과 같은, 환상과 같은 장면의 연속입니다. 너무 흥분되고 두려워서 세 제자는 땅에 엎드려 눈을 가리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 말라." 제자들이 일어나 보니, 빛났던 스승의 얼굴은 옛날 모습 그대로이고, 빛나는 흰옷 입었던 모세와 엘리야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얼굴이 빛난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에도 있습니다. 오늘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나올 때, 모세의 얼굴이 너무 빛나서, 그의 얼굴이 하나님의 광채로 가득 차서 이스라엘 백성이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을 만날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고, 하나님과 이야기할 때만 얼굴을 드러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얼굴에 비친 광채를 보고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모세 얼굴의 광채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광채로 함께 계십니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광채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예수는 구약성서에서와 똑같은 장면에 모세와 함께 출연하십니다. 하나님께
서 감독이 되시고, 예수께서 주연이 되셨습니다. 제1막이 시작되면서 주연과 함께 조연으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관객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셋이 출연한 그 광경, 광채가 임한 변화산 상의 그 황홀경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성서말씀에 보면 예수의 "모습"이 변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란 말은 우리의
생김새입니다. 모습은 영어로는 figure라고 합니다. figure가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변화산 상의 이야기를 "Transfiguration"이라고 합니다. 모습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사실 변화산 상의 이야기는 기적과 같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에도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영화 중에 소위 SF 영화들이 많이 나옵니다. Science Fiction입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러나 인간들이 바라는 온갖 기적과 같은 이야기를 영화 화면에 담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아까 장로님께서도 기도했습니다만, 이번에 폭설이 내려서 얼마나 고생들 많이 했습니까. 제가 겪은 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눈이 쏟아지던 지난 목요일 아침 9시쯤에 집에서 나왔습니다. 11시에 제가 주재할 회의가 하나 있어 교회로 오는 길이었는데, 참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9시에 출발했는데 오후 3시 반에 겨우 한남동 로터리에 도착했습니다. 도저히 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도 봐야 되겠고 배도 고픈데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3시 반쯤 한남동 로터리에 차를 세워두고 교회까지 걸어 왔습니다. 1시간 더 걸렸습니다. 그래서 4시 반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차를 타고 오는 6시
간 반 동안 차 안에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아 내가 배트맨이었으면 금방 날아서 갈텐데!" 하는 생각입니다. '배트맨'이라는 영화, 여러분도 보셨죠? 박쥐 같이 날개를 달고 의로운 일을 향해서 밤이고 낮이고 뛰는 박쥐 인간 이야기입니다. 배트맨. 그것도 일종의 변화산 상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입니다. 자동차를 몽땅 들고 날아서 경동교회 주차장까지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 같은 그 생각을 6시간 내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 변화산 상의 이야기를 설교로 드리려고 하면서 이 생각을 했습니다. 인
간은 위를 향해서, 기적을 향해서, 비전을 향해서 살아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너는 아직도 땅 위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변화산 위에서 예수께서 변모를 통해 상징적으로 주신 교훈은 이렇습니다. "모습이 변한 것 하나 가지고 그대들은 얼마나 흥분했습니까. 엄청나게 흥분해서 이곳에 집을 짓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습니다. 땅 위에 있는 집 말고 변화산 상에 있는 집을 하나씩 가지십시오. 그곳에서 삽시다.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모습 하나 변한 것 가지고 그렇게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모습만이 아니라 속에 있는 인간까지 완전히 변해서, figure(모습)만 변한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substance(본질)도 변해서 소위 trans-substantiation가 일어나야 합니다. 생의 본질까지도 완전히 뒤바뀌어서 과거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1막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해주신 하나님은 변화산 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엄청난 미래를 약속해 주십니다. 그분의 광채 속에는 죽음이란 게 없습니다. 그 광채 속에는 곡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 흰옷 속에는 우는 것도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변화산 상의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상도 못할 위대한 세계를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변화산 상의 이야기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살고, 죽어도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 약속 때문에 우리는 고달픈 오늘을 살아갑니다. 변화산 상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 미래는 우리가 상상을 통해 그려내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한 비전이요, 장차 오고야 말 약속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구름 가운데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들으라. 나는 예수
이 사람을 좋아한다.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말씀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우리가 바라지만 가보지 못한 그곳을 향해서, 실제로 존재할 위대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지금 살아갑니다. 신앙을 가지신 여러분, 이 비전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괴테라는 위대한 문호가 쓴 작품 중에 하나가 「파우스트」라는 작품입니다. 이
파우스트라는 작품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파우스트 박사가 사탄과 흥정을 합니다. 흥정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탄은 앞으로 24년 동안 파우스트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24년이 지난 이후에는 사탄은 파우스트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계약의 내용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이 작품에서 24년 동안 온갖 명예와 부와 권력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었습니다. 24년이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24년이 되던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사탄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약속대로 파우스트의 생명을 가져오라! 사탄이 파송한 부하가 있습니다. 그이름이 메피스토펠레스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와서 파우스트 박사에게 말합니다. 12시에서 1시 사이에 나는 그대 생명을 거두어 가겠다. 이 작품의 대부분은 12시에서 1시 사이의 긴장과 갈등과 회한에 관한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파우스트 박사 집에서 뭔가가 생겨납니다. 이제 마지막 인생이 결판나는 순간입니다. 그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동네사람들이 들어보니 마치 세상에 있는 모든 뱀들이 몽땅 모여서 또아리를 틀면서 서로 얽히고 부딪히고 울부짖는 소리 같습니다. 지금 파우스트 박사를 데리고 가는 그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가 1시가 가까워오면서 거의 절정에 이르다가 1시가 다 되자 소리가 점점 약해지면서 그 속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비명이 울립니다. "사람 살려 주시오."
괴테가 보기에 우리 인생은 24년만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24년이 지나면 우글
거리는 뱀들이 와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갈 것입니다. 살려달라는 절규를 세상 곳곳에서 듣습니다. 절규하는 소리가 잦아들면 우리의 생은 끝이 납니다. 인간의 기막힌 고뇌를 이 작품 속에 묘사했습니다. 변화산 이야기는 다시금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뱀들이 우글거리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채가 임하는 나라, 그대들이 꿈꾸던 나라로 그대들을 데려갈 것입니다. 뱀들의 소리가 아니라, 예수께서 태어날 때 하늘에서 불렀던 그 천군 천사들의 찬양 가운데에서 그대들을 데리고 갈 겁니다.
제1막이 끝나고 제2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어깨를 치면서 "놀라지 마라.
일어나라." 하시자 엎드렸던 세 제가가 일어나 눈을 떠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얼굴은 이미 옛 모습입니다. 그 예수께서는 산을 내려가서, 동네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고 하십니다. 미래의 엄청난 복을 확신한 사람들은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산에
서 초막을 지을 생각을 하지 말고,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곤궁이 있고, 빈곤이 있고, 죄악이 있고, 슬픔이 있지만, 그곳으로 내려가서 그곳에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에 계신 예수님의 광채에 확신을 가지고 세상의 복판에 내려가면 그곳에
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를 지고 땅 아래에서, 산 아래에서 우리와 함께 고난 당하고 슬픔을 함께 지셨습니다. 세상을 가슴에 끌어안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 예수는 그러나 그냥 예수가 아니라 하늘에서 있었던 광채를 짊어진 부활의 영광을 지닌 예수였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광채를 뒤로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향해 선 모습들, 십자가를 지고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 이
두 모습이 오늘 변화산 기적이 보여주는 두 모습,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두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된 모습입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전제하고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집니다. 하늘과 땅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이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갑니다. 십자가 속에 광채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렵게 살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광채가 함께합니다. 광채 가운데 계신 예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시간이 있습니다. 한 가지 시간은 달력에 따른 시
간입니다. 그 시간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지나갑니다.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다른 한 가지 시간은 우리의 생물학적 생명의 시간입니다. 달력의 시간과 상관없이, 객관적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인간의 몸뚱이가 살아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생물학적 인간의 시간이 끝나면, 그 인간에게는 세계 역사와 상관없이 모든 역사가 끝납니다. 그런 시간도 있습니다.
캘린더에 따른 역사의 시간 속에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고 부활의 광채가 비치면
이 역사가 변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생물학적 시간 속에 부활의 광채가 임하면, 우리가 건강하든 아프든, 이 세상을 오래 살다 죽든 짧게 살다 죽든 상관없이 우리 속에는 영원한 생명의 광채가 임할 수 있습니다. 달력의 시간, 생물학적 인간의 시간은 계속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들 안에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깃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시간을 내어놓고 거기에 하늘의 시간이 포개지기를 기도하십시오.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나의 시간과 하나님 시간 사이의 대화,
역사의 시간과 하나님 시간 사이의 대화, 이 대화의 현장이 오늘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하늘을 향한 희망을 품고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다시 세상에 내려가서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영광을 전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변화산 상의 복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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