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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다운 믿음 2002-05-03 17:56:30 read : 15901
요한계시록 1:8-20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 20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다운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남자들이 결혼하여 한창 돈을 벌어 기세가 등등할 때 여자들의 경우는 남자의 많은 학대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좀 나아졌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나가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여자에게 나가라고 하는 소리 이상 더 듣기 싫은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소리를 들으면 교회에 나와서 울면서 기도합니다. 때로는 당회장실로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희망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해줍니다. 처음에 남자가 한창 돈을 벌고 기승을 부릴 때는 여자가 뭐라고 해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역전이 되기 시작합니다. 남성이 남성 구실을 못하게 될 때 즉 남성 호르몬이 끊어질 때가 되면 그 때부터는 남성을 잃어버리고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여성화되어 집니다. 그런가하면 여자는 여성을 잃어버리고 여성 호르몬이 끊어지게 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져서 남성화되어 집니다. 그 때부터 뒤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못되게 굴던 남자일수록 나중에는 여자에게 꼭 쥐어서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면 남자는 그 때부터 집안에 들어앉아 있게 되고 여자는 내 세상 만났구나 하면서 밖으로 나돌기 시작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 2부 예배에 이런 설교를 했더니 미국에 가 계신 이신일 집사님이 당회장실로 찾아 들어오더니 그 말씀이 맞다고 하면서 자기의 경험이 꼭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남성이 남성을 잃어버리고 여성화되어지고, 여성이 여성을 잃어버리고 남성화되어지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언제 어디서나 믿음은 믿음다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믿음다운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정신적인 믿음 (8-)
여기에서 말하는 정신은 마음이라 정신이라 할 때 쓰는 정신이 아니고 바를 正자 즉 정직하다고 할 때 쓰는 正자와 믿을 信자를 씁니다. 바로 믿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정신의 반대말은 미신입니다. 미신은 길을 잃고 헤메는 믿음이요, 잘못된 믿음을 뜻합니다. 어떻게 하면 바로 되고 어떻게 하면 잘못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신관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믿음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10년을 나오고 20년을 나왔을지라도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많은 귀신들 중에 으뜸이라 하는 정도로 믿는 사람은 10년 20년을 믿었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미신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관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첫째는 회개가 없습니다. 귀신에게 제사 그리면서 '내가 시어머니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는데 귀신이여 귀신이여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다시는 범죄치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귀신 섬기는 사람은 절대로 회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 하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권사이면서도 회개 안하고 여전도회 회장 며느리도 회개를 안합니다. 둘째는 귀신 섬기는 사람은 귀신과 흥정을 합니다. 천하의 복은 다 가져다 달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잡수시는 것은 말라빠진 북어나 돼지 몸통은 내가 먹을테니 돼지 머리나 먹고 천하의 복은 다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10년 20년을 하나님을 믿고도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 하는 사람은 첫마디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 하다가 끝납니다. 셋째로 귀신 섬기는 사람은 귀신을 위해서 희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귀신 섬기는 사람이 귀신을 위해서 손해 보는 것을 보셨습니까? 귀신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조금 손해만 보면 '이 놈의 귀신 못쓰겠다'고 하면서 내 팽개쳐 버립니다.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 하는 사람은 내가 조금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맙니다. 그런 믿음을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오, 예수님이 어떤 분이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을 때 그 믿음은 정신적인 믿음 즉 바로 믿는 믿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첫째로 예수님을 주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먹어야 되고 자야 되고 입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신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질적으로 똑같은 신인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주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되신 예수님만 믿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둘째로 우리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즉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전부라는 말씀입니다. 헬라 말의 처음 글자가 알파요,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입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처음과 나중이요, 전부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을 때 예수는 나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를 위해 다 살아 버리고 예수를 위한 삶은 부분 밖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나의 전부라고 믿는 믿음이 바로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보면 셋째로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하시다라는 뜻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무한히 계실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믿을 때 그 믿음이 바로 믿는 믿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믿음이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이요, 그 믿음이 믿음 구실을 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가서 세상에서 빛 노릇을 하고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이 잘 못 믿는 사람 보다 낫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10년 20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잘 못 믿는 사람보다 차라리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이 낫다는 것입니다. 잘 못 믿는 믿음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도 다 믿는다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꼭 둘씩 짝지어서 교패가 붙은 집만 찾아다닙니다.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면 집 주인이 '누구십니까?'할 때 '여호와의 증인입니다'하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까 워치 타워에서 왔다고 합니다. 집주인이 아무 것도 모르고 문을 열어 주면 집으로 쑥 들어와서 그 때부터 자기 정체를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이 어떤지 아십니까? 사람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 적에 흙으로 빚은 다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아담은 펄펄 뛰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활동하는 활동력이라고 합니다. 죽으면 활동력을 잃어버리듯이 영혼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바로 성령이지 성령이 하나님의 어떤 독립적인 인격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까닭에 시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 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가입하여 14만 4천명의 축에 들어야만 이 다음에 부활할 때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에 빨리 가입해야 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설명하는 골자가 이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르면 답변을 못합니다. 그리고 14만 4천명은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것으로 유다 지파의 1만 2천이요, 베냐민 지파의 1만 2천이요 하면서 그 합계가 14만 4천입니다. 그러면 그 14만 4천이라고 하는 문자는 그대로의 숫자를 믿으면서 바로 전에 나오는 르우벤 지파 혹은 유다 지파라는 말은 왜 완전히 빼버립니까? 14만 4천명을 문자 그래도 믿는다고 하면서 르우벤 지파라고 하는 것도 그대로 믿어야 하지 않습니까? 르우벤 지파를 없애고 한국 사람으로 대체하면서 14만 4천명을 왜 그대로 믿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구원받는 숫자입니다. 우리는 르우벤 지파가 아니지 않습니까? 유대 지파, 베냐민 지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성경을 놓고 그렇게 잘 못 해석하기 까닭에 잘 못 믿어서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잘 못 믿는 믿음보다는 오히려 안 믿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와 반대로 잘 믿는 믿음 즉 바로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성령님이 어쩐 분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도 하나님이시요, 아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요, 아버지 하나님도 똑같은 인격체를 가지신 각각 다른 별개의 하나님입니다. 분명히 세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본질은 꼭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삼위일체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알고 믿을 때 믿음은 믿음다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상을 분명히 알고 믿어서 바로 믿는 믿음, 믿음다운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참여하는 믿음 (9상-)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외국에 나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전 재산을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주인의 일에 끝까지 참여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계산해 보니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겨 온갖 칭찬과 상급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인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러나 그 더위와 추위에 온갖 고생이 있다는 것도 감안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려면 고생도 손해도 어려움도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여하는 날 우리에게는 영광과 축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달란트는 맡아 놓고도 주인의 일을 손톱 끝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온 다음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나고 평생동안, 아니 영원토록 이를 갈았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실패요, 멸망하는 것 밖에 없지 않습니까? 수지 맞았다고 주인의 것 가지고 먹고 누리면서 놀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주인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 재미만 누리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됩니다. 주인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복된 줄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 상반절을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앙공동체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의 형제요'라고 합니다. 둘째는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때가 언제입니까? 다른 사도들은 전부 순교를 당했으나 열두 제자 중에 사도요한만은 순교 당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 집 안방에서 와석종신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쓸 때는 로마 정부가 얼마나 핍박을 가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지중해 한 가운데 있는 밧모 섬에 정배를 보냅니다. 정배를 보낸 그 자리에서 요한계시록을 씁니다. "내가 왜 이렇게 환란을 당하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환란,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당하는 환란은 예수님의 환란이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제라도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곧 평안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나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예수의 환란에 끝까지 동참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나라에 동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또는 천국의 일에는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자기가 목숨 받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버티어 낸다, 견디어 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온갖 박해를 가해도 자기는 끝까지 버티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주님의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든지, 즐겁든지, 고난을 당하든지, 평안하든지를 막론하고 주님의 일은 매사에 참여하는 자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참여하는 자가 복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자녀 중에 자폐증을 가진 자녀가 있습니까? 어른이 된 사람 중에서 혹은 이웃에서 그런 사람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늘빛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즉 특수 유치학교입니다. 특수 유치학교에는 정신발달이 지체되고 있는 정신지체아 그리고 정서 장애 아동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폐증 어린이들까지는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폐증에 걸리면 증상이 어떤지 아십니까?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은 표정이 없습니다. 일년 4계절, 365일 동안 표정이 한결 같습니다. 웃음에 대한 표정, 슬픔에 대한 표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나 자기가 하는 행동 하나만 반복합니다. 그것도 무제한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반복합니다. 판에 박힌 듯이 그 동작만 합니다. 다른 사람과는 전혀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에 참여를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닷가에 모래알 같습니다. 그 부모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이웃이 볼 때 얼마나 따분하겠습니까? 자폐증 환자는 공통적으로 열명이 모이면 열명의 증상이 모두 다 다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공통적인 것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한 사람을 일대 일로 가르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자폐증 환자가 있습니다. 나는 나요, 너는 너라고 하면서 전혀 어울리거나 동참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봉사를 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합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하고,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하고, 전도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하면서 모래알처럼 절대로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자폐증에 걸린 신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자가 복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감동받는 믿음 (9하-20)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 하반절에서 20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에도 사도요한이 혼자 살아 남아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면서 전 세계 교회를 이끌어 나아갈 때 로마 정부가 그를 박해하여 밧모라고 하는 섬으로 정배를 보냈는데 주일날을 당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주일을 당해서 모였을 텐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 때 사도요한은 돌 바위틈에 엎드리어 기도를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세계를 보고 쓴 것이 바로 오늘의 요한계시록입니다.
첫째로 밧모라고 하는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배 생활처럼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요한은 고통이 막심할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참 평안이 옵니다.
둘째로 주의 날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의 날에 모여서 예배할 적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주의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아니하면 절대로 말씀이 내 가슴에 뜨겁게 부딪혀 오지 않습니다. 넷째로 금촛대 즉 교회 사이를 다니면서 잘 보살피고 돕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말씀 속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이 믿음 생활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신약신학을 가르치신 분이 킨슬러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은 평양신학교 때부터 교수생활을 하셨습니다. 제가 광나루 신학교에 다닐 적에 요한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에 대한 문제가 나올 적에 그 분이 "서양 사람들에게 제일 크고 무서운 욕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제일 무서운 욕이 무엇입니까? "성령 받지 말고 즉 성령 없이 목사 노릇하라"는 것이 그렇게 큰 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성령의 능력, 성령의 감동 없이 어떻게 목사 노릇을 합니까? 무당이 무당 귀신이 안 내리고 어떻게 무당 노릇을 합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성령의 감동 없이 목사 노릇을 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의 믿음생활도 성령의 감동 없이는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할 때 주님의 말씀이 부딪혀와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말씀 속에서 주님을 발견학도 하고, 환란과 고난이 닥쳐와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을 내 놓고라도 끝까지 믿고 순교하는 이유가 성령의 감동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천하가 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승리는 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항상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다운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다운 믿음은 첫째 정신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고 믿는 정신적인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둘째 주님의 일이라면 끝까지 참여하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주님의 일에 참여할 적에 고생이요, 손해도 많지만 참여하고 나면 영광과 승리와 축복이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감동 받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믿을 재간도 없고, 일할 재간도 없고, 목을 내 놓고 충성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천하가 못 당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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