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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밤
2002-05-03 17:29:05   read : 12928




사도행전 16:19-34



오늘은 사도행전 16장 19절에서 34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성도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똑 같이 밤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밤의 연속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낮의 연속이었으면 좋겠다고 할는지 모르나 밤과 낮이 교차되면서 똑 같이 믿는 사람도 밤을 맞이하고 믿지 않는 사람도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새 날도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도 똑 같이 맞이합니다.
성경에서는 밤이 항상 고난과 절망의 상징으로 등장을 합니다. 아침이나 혹은 낮은 희망과 평화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21장 11절에서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돔에 대한 경고를 하실 때 문답식으로 경고와 예언을 하십니다. 에돔 사람 하나가 등장을 하더니 "파숫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때 파숫꾼의 역할을 하는 이사야 선지자가 간단하게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문답을 할 때는 밤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침이 오는데 밤이 또 다시 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에돔 자손들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조공을 받치며 상당히 어렵고 지겨운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기에 이런 고통스러운 시대가 언제 끝이 나는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는 말씀은 평화가 오고 희망이 오리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요 또 다시 고난이 오리라는 뜻입니다. 바벨론 나라가 다시 흥하고 일어나서 들고치리라는 예언적인 선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밤과 낮은 자꾸 반복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기도 하고 절망 중에 희망이 새로워지기도 합니다. 그럴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밤이라고 하는 고난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또 믿는 사람들은 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것에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본문의 주인공 바울이 겪는 고난의 밤을 그는 어떻게 지냈는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은혜 받은 밤 (19-26)
본문으로 돌아가서 19절에서 26절을 보면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바울사도가 소아시아 지방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다시금 되돌아 서서 소아시아 북쪽을 전도하기 위해서 돌아 가려고 했습니다. 가던 중 드로아에 이르러 밤을 지내는데 마게도냐 사람이 등장하더니 빨리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을 본 다음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바다를 건너 유럽대륙으로 진출을 합니다. 마게도냐의 첫 성이 바로 빌립보입니다. 본문의 역사가 진행되는 성읍입니다. 바울사도가 그 곳에 가 보았더니 참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웬일인가하여 가 보았더니 젊은 여자가 점치는 귀신이 들어서 얼마나 점을 잘 치는지 줄줄이 서서 점을 치고 돈을 내고 갑니다. 굉장히 돈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돼놈이 먹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자가 돈을 많이 버는데 그 돈을 전부 뒤로 빼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돈을 몇 사람이 전부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보았더니 몇 사람이 돈을 투자해서 어울러 귀신 들린 여자 하나를 사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점 친 다음에 얻어지는 수입을 전부 이 사람들이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울사도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하여 어렵지 않게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 여자에게서 귀신이 나갔기 때문에 그 여자에게 돈을 보따리로 싸서 가져다주어도 점을 칠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여자에게는 귀신을 쫓아주어서 고마운 일이었지만 거금을 들여서 그 여자를 사왔던 동업자들은 이익의 줄이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동업자들이 바울을 붙잡아 두들겨 패고 관가로 끌고 가서 고소를 합니다. 상관들이 바울의 옷을 벗기라 하더니 얼마나 매로 많이 쳤는지 모릅니다. 좀 심하게 과장을 하면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간수에게 "깊은 옥게 가두고 단단히 지키라"하였습니다. 깊은 옥은 지하 감옥을 의미합니다. 간수가 지하 감옥에 바울과 실라를 가두고는 손과 발에는 착고 즉 쇠고랑으로 채워놓았습니다. 그리고 옥문을 겹겹이 잠그고 또 잠갔습니다. 단단히 지키라 했는데 그만 간수는 마음을 놓고 잠을 자게 됩니다. 이쯤 되어지자 바울은 난감합니다. 기가막힙니다.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까? 남의 것에 사기를 쳐서 망쳐 놓았습니까? 좋은 일 하고도 왜 이렇게 매 맞아야 하고 이런 깊은 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신세가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까? 더구나 빌립보라고 하는 곳에는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뒤에서 손을 써서 자기를 빼 내 줄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사방은 벽입니다. 뚫고 나갈 재간이 없습니다. 있다면 하늘을 향해서 열려 있는 것뿐입니다. 이때 바울은 '아! 이것이 기도하라는 뜻이로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바울은 그렇게 원망스럽고 난감한 일을 당했을 적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간절히 기도하자 '걱정하지 말라. 네가 이 고난에서 벗어나겠고 감옥에서 정정당당하게 나가 앞으로도 네가 해야할 일이 많으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물론 그 응답의 내용은 그 후에 전개된 사건을 미루어 추리해 본 것입니다. 여하간 그런 뜻의 응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를 때 옥터가 움직이고 지진이 일어나서 문이란 문은 다 열렸습니다. 손과 발에 채워놓았던 쇠고랑은 다 벗겨지고 완전히 자유스러운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19절에서 26절까지 있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문을 잠가도 하나님이 열어 주시니 문이란 문은 다 열리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쇠고랑을 채워놓아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니 거기에서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난감한 일 당할 때가 바로 하나님이 기도를 시키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기도를 시키실 때에는 반드시 응답을 준비 해 놓고 기도를 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날 밤 바울은 돈을 주고 사서 경험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했습니다. 똑 같은 밤인데 왜 바울에게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밤이었습니까?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그 날 밤이 바울에게는 두고 두고 간증을 해도 듣는 사람 모두에게 은혜가 될 수 있는 은혜 받은 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살아가다 보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고난의 밤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똑 같이 밤이 있듯이 고난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고난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뜻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분명코 평안할 때 전혀 받지 못하던 은혜 체험의 밤이 되게 해 주십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기도하여 은혜를 체험하는 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퀴쉬너라는 젊은 목사는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어린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자신이 행복하기 까닭에 교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그저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하면 직업상 찾아가서 건성으로 위로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낳은 아들이 석달만에 조로증이라고 하는 못 고치는 병에 걸렸습니다. 조로증은 자꾸 늙어가는 병입니다. 그러다 10년만에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동안에 얼마나 지긋 지긋한 고난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왜 우리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하고 기도하던 중에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전에는 고난 당하는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줄 알았던 그가 아들이 죽은 후 얼마나 고난을 당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한 이웃을 진정으로 위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 노릇을 제대로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 주시는데 어느 집이든지 100% 축복해 주는 집이 없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쪽에 축복해 주시면 저 쪽에는 빈 구석이 있고, 또 저 쪽을 축복해 주시면 이 쪽이 어딘가에 빈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거기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습니다. 이런 고난의 밤이 없었더라면 퀴쉬너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고 난감한 고난에는 반드시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하고 안하고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납니다. 응답을 준비하신 그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어디에 가서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은혜를 체험하는 고난의 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증거하는 밤 (27-31)
오늘 광성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그 광성지를 보면 구역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구역을 소개하는 중에 이야기 한토막이 나옵니다. 그 분이 지금은 권사가 되셨지만 그 때는 권사가 되기 전의 일입니다. 제 아들 녀석이 더벅머리를 하고 유치원을 다니고 있을 때, 이 집사님이 골목 골목을 다니면서 노방 전도와 축호 전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하고 다니다 어느 집 대문 안을 들여다보니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사람이 있겠구나 싶어서 초인종을 누르니 대문이 열렸습니다. 대문 안에 들어섰을 때, 더벅머리 어린아이가 뛰어나왔습니다. 그래서 "야, 너 예수 믿고 교회 열심히 나와라. 그러면 참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된단다"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집사님을 쳐다보더니 "우리 예수 믿는데요?"하더랍니다. "그래 어느 교회에 나가니?" "우리 아버지가 목사인데요" "어느 교회 목사인데?" "광성교회 김창인 목사입니다" 광성교회 여집사가 당회장의 집에 전도를 하러 가서 아들에게 당회장 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슬며시 돌아 섰노라는 내용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냈으면 당회장의 집에까지 전도를 하러 갔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제가 사는 집을 거의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이렇게 좋더라 너도 그 예수 믿어봐라 그러면 나와 같이 된다" 이것이 바로 증거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27절에서 31절을 보면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사도가 기도하고 찬송을 하자 문이란 문은 다 열리고 채워진 고랑이라는 고랑은 다 풀리지 않았습니까?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해' 바울 사도가 그 때 무슨 찬송을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이 찬송이 있었다면 이 찬송은 바울의 찬송일 것입니다. 그러다 지진이 나고 옥문이 다 열리는 소리에 잠자던 간수가 깜짝 놀라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뽑아서 자결해 죽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갇혔던 죄수들이 도망갔을 경우 전부 그 책임은 간수가 뒤집어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년 징역형을 받은 사람이 도망을 가면 대신 10년 징역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도망을 가면 대신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당시 로마의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럴바에는 차라리 내가 내 손으로 죽으리라'하고 칼을 빼서 자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때 칼을 빼서 자결하려고 하는 것은 상황을 제대로 안 것입니까? 몰랐습니까?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상황을 제대로 모르게 되면 '내 인생 끝났구나'하고 자살해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이 도망 안가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바울의 경우야 도망을 갔으면 그만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정정당당히 나가리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응답을 받고 있는데 왜 비겁하게 도망을 가겠습니까? 그 때 간수를 향해 바울이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합니다. 간수는 그만 너무 놀라운 사실인지라 달려들어갔습니다. "선생들이여!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선생들아'라는 말은 '주여'라는 말을 우리 말로 '선생들아'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 때바울 사도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단 한번 짧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핵심적인 진리를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좀더 살을 붙여 말씀드리면 간수와 바울의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나처럼 됩니다"라는 뜻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 때 그 말이 그대로 그 사람의 심령 속에 부딪혀 들어가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 예수를 나도 믿겠습니다.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그래서 자기 집으로 바울 사도를 모시고 갖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억울한 밤, 그렇게 난감한 밤, 좌절 속에 빠졌던 그 밤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간수입니다. 바울은 기회가 주어지니까 '너도 예수 믿으라. 예수가 이렇게 좋다. 예수 믿으면 나처럼 된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즉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와 그 집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을 통해서 주어지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를 높이고 자랑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정말 생각밖에 고난, 억울한 고난, 헤쳐 나갈 수 없는 난감한 고난에 직면했다 싶을 때 '예수님! 이 고난을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에게 사람을 붙여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한번 증거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구원을 얻고 나중에 가서는 교회에서 크게 일하는 큰 일꾼이 될 것입니다. 전혀 생각 밖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빌립보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지면 '내가 만난 예수, 그 예수를 믿고 나 된 나, 바로 나를 보고 예수를 믿어라.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 이렇게 증거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에게 그 날 밤 그런 사연이 없었더라면 그 간수는 영원히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간수가 예수를 믿자 그 집안이 전부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집에서부터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이런 엄청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기까닭에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의 고난은 예수를 높이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밤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엄청난 축복의 밤이 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새 역사의 밤 (32-34)
본문으로 돌아가서 32절에서 부터 34절을 보면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엉뚱한 사람을 바울에게 붙여 주셨고 그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그 사람으로 인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그 예수를 내가 믿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당신들처럼 됩니까? 그러면 나도 그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간수가 감옥 문을 지켜야 되는 입장인데 자기가 지켜야 되는 그 자리를 떠나서 집으로 가버렸다면 무슨 죄에 해당이 됩니까? 근무이탈죄입니다. 군인이면 당장에 총살감입니다. 예수를 몰랐을 때는 별수 없었지만 예수를 안 이상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자세입니다. 간수는 자기 집에 가서 자고 있는 모든 식구들을 깨우고 일으켜 세워 앉힌 다음에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온 집 식구들이 자다 말고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아내도 아들도 딸도 전부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들은 간수는 '물을 떠오라'하더니 온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빨리 밤참을 차리라'하고 밤참을 차리는 사이에 맞은 상처를 다 씻겨 주었습니다. 밤참이 들어오자 실컷 먹었습니다. 그 쯤 되면 바울은 잘 있으라 하고 가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절대로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이후를 보면 바울이 저녁을 먹고는 다시 감옥으로 가자고 하여 다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바울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간수는 바울이 떠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항상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당당히 걸어나가게 되어 있는데 왜 도망가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감옥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쇠고랑을 다시 채우라 하고 문을 겹겹이 다시 잠그게 하고 천연스럽게 앉아 있습니다. 아침이 되자 상부에서 '바울을 빨리 내 보내주라'는 지시가 내려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상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바울이 "무슨 소리요? 로마사람인 나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매로 많이 치고 감옥에 가두더니 이제 와서 도둑놈 도망가듯이 가라고 하느냐? 어림없는 소리하지 말라. 정정당당히 와서 나를 데리고 가야 하느니라"고 하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로마사람이라는 말에 상관들이 달려와서 "어서 나가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노자돈을 받아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아마 간수가 노자돈을 두둑히 주어서 보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그 간수가 예수를 믿고 자기의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그 간수는 마지막에 간수직을 다 내 버리고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평생을 주의 일을 하는 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이 지금까지는 하나님은 '내 몰라라'하고 살았는데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 가정에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또 교회가 없던 빌립보라고 하는 그 도시에 그 사건으로 인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빌립보 역사를 새롭게 써야하는 새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는 여러분 가정에 새 역사가 쓰여지는 사건인줄로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성도의 밤은 첫째 은혜 받은 밤입니다. 평안할 때에 받지 못하던 은혜를 고난의 밤에만 체험 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둘째 증거하는 밤입니다. 그런 고난 속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도했더니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되고 그 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셋째 새 역사를 창조하는 밤입니다. 개인에게도 그 가정에게도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에도 새 역사를 써나갈 만큼 새 역사를 창조한 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이런 새 역사가 쓰여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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