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4월 27일 (일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목사를 막아라, 텅빈본당 /목사 연금 1,600억으로 '돈 장사'한 집사 구속/ 캄보디아 박율 목사 체포 충격               최태민 구국선교단 참여 목사들 / 십일조 하지 말라는 목사 /한우갈비’외치는 기감목사들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서울광장서 개막 /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 무죄               선교사들 위한 안식관 두 곳/ '노트북이 뭐라고' 소송 총동원한 사랑의교회               언더우드 후손 28명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군종장교 범죄               박수홍,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목사님이 운영하는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예장통합 ‘제2의 세습방지법안’ 총회 통과/ 예수님처럼 교회도 하늘에서 내려와야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적극 반대 /목회자의 고백 7가지 실수               총회장 2명을 배출한 여인의 힘! /복음화율 10% 안 되는데 주일학교만 1천 명              

  홈     이삼규     강문호.     고신일     곽선희.     김광일.     김기석.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성광.     김성수     김은호     김정호.     김홍도.     류영모.     명설교     박봉수.     오주철.     옥한흠     유기성     이동원     이성희.     이양덕.     이영무     이윤재     이재철.박영선     이정익     조봉희.     조용기.     주준태     지용수     피영민     하용조     한경직.     홍정길.임영수     해외목사님     관     괄사치유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한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사건별설교(구약)     사건별설교(신약)  

Home > 기사메일보내기


제목
받는 사람 이름
받는 사람 Email
보내는 사람 이름

cancel


생명은 곧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2002-04-13 17:08:31   read : 21196

골 3:1-4 // 2002.4.7

아프리카에 어느 부족을 거느리고 있는 추장이 병으로 자신의 운명이 점점 다해 가는 것을 알고, 어느 날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과제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저 산이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그 산에 올라가 너희들에게 가장 소중히 생각되는 것 한가지씩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각기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산에 올랐습니다.

저녁 해가 거의 다 질 무렵 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 왔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네, 아버지! 저는 산에서 아주 신기한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 왔습니다." 아들은 돌을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래, 그것 참 신기하구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너는 무엇을 발견했느냐?" "네, 저는 이 평지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식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 왔습니다."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가져온 식물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에게 "너는 무엇을 발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셋째 아들은 매우 송구스러운 태도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산에서 형들처럼 아무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 보고 온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비로서 산 너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산 너머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비할 수 없는 광활하고 비옥한 초원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너무 좁습니다. 우리 부족이 그곳으로 옮겨 살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셋째 아들의 손을 꽉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네가 바르게 보았다. 나는 너에게 우리 부족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유한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유한성은 타고난 운명이지만 가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한성 그 자체로 끝날 수도 있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 영원한 지평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지평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그 유한의 장벽을 넘어 영원한 삶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의 가치는 너무나 다릅니다. '나'라는 한 인간의 존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 "나"라는 한 인간의 가치는 큰 차이를 갖게 됩니다. 그와 같이 '나'라는 유한한 한 인간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에 따라 큰 차이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본 생의 전망은 죽어 무덤에 들어가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본 생의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친교 가운데 있는 희망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미래가 열려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을 살아갈 때 무덤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과 무덤 저편 영원한 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백하는 부활의 삶은 그 누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에게서 듣고, 보고,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것으로 예수의 삶도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 손상되거나 폐기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차원 가운데 있는 그의 부활의 몸, 그의 부활의 삶을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모습은 형체가 없는 여기저기 떠다니는 유령과 같은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몸을 가진 한 분의 인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다른 몸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고, 손, 발에 못 자국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몸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부활의 몸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몸입니다. 그 때의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화해되고, 용서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몸입니다.

"기독교인은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수술을 하거나 화장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부활 시에 육체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손상 입은 육체는 그때에도 손상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이유입니다. 7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몸의 부활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던 사람이 부활 후에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당한 고통, 결핍, 아픔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때, 실현되지 못한 아픔, 결핍은 치유 받고 보상 받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을 때와는 다른 온전한 몸을 가진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에게는 한, 증오, 적대감, 슬픔, 후회, 두려움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에게는 충만, 기쁨,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믿음의 확신 가운데서 바라보는 희망의 미래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미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선취해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우리의 생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졌음이라." (3)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1∼2)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은 이 현실의 생으로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은 죽음을 끝으로 모두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또 다른 몸을 가진 인격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일생이 그 분 앞에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지나온 생은 실패, 결핍, 수치감, 상처 등 실현되지 못한 생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미 용서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생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예수의 부활의 몸에서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몸에 그대로 남아 있는 창 자국, 못 자국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몸의 상처는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어두운 현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수치감, 좌절, 후회를 더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모두 용납되고, 치유된 삶에서 그러한 지나온 삶을 보게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서는 찬송, 감사, 환희, 기쁨, 사랑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근심과 불안의 어둠에서 기쁨과 평안의 빛으로의 전환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어둠에서 감사와 사랑의 빛으로의 전환입니다. 절망과 죽음의 어둠에서 소망과 생명의 빛으로의 전환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의학적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생명(영혼)의 영원성과 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의 메시지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마치 죽은 삶이나 다름없이 어둠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시어 축복된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기쁨과 환희

대자연속 생명의 신비는 그야말로 황홀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파란하늘, 붉게 떠오르는 태양, 싱싱한 초록의 나뭇잎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 화려한 색깔의 날개를 달고 숲 속을 날아다니는 새들 어느 것 하나 생명의 연속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끊임없이 태어나고 끊임없이 사라지는 생명의 고리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부활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기쁨과 환희를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과 불행은 빛과 그림자처럼 항상 같이 붙어 다닙니다. 진정한 부활이란 이 모든 것을 행복과 축복으로 받아드릴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

옛날에 어느 임금이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인데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병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이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벗겨다가 입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모두 행복의 기쁨이 안 보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병만 더 커졌습니다. 나중에 왕자가 직접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오두막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에서 기쁨에 넘치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가만히 안을 드려다 보니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기쁨에 넘쳐 성가(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순간 왕자는 이 집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집이라 여겨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속옷을 벗어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통하지 않자 칼로 위협하고 겉옷을 벗겨보니 그들은 모두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속옷을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왕자는 거기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행복은 돈으로도 못 사고 권력이나 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행복은 오로지 믿음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듯 생명도 행복도 돈이나 권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행복을 찾지 못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가며 신앙을 지키는 사람도 사업에 실패하고, 사고가 나고,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자칫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통이 축복으로 바뀝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도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가난하여 속옷을 못 입는다고 서럽게 생각하고 불평만 한다면 그는 진짜로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가난도 축복으로 받아 드리고 감사 드릴 때 그는 그 나라 왕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가난을 풍요로움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실패를 성공의 기회로 마음을 바꿀 때 진정 부활의 빛은 비추이는 것입니다.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폐기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삶을 그 어떤 피조물도 와해시킬 수 없습니다. 영원 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은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생명 공동체

교회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결과로 생겨났고, 예수의 영과 생명으로 존속합니다. 교회는 예수의 생명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된 후 교회는 지상의 예수의 삶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삶에서 멀어진 교회는 부와 권력을 얻고, 웅장한 교회당을 세웠으나 복음의 힘을 잃고 영적 생명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충만하고 이 시대의 삶의 중심을 붙잡고 이 시대의 삶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교회의 본질이고, 교회는 시대의 삶에 감응하는 산 공동체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삶에 대한 느낌과 이해와 울림을 통해 교회를 느끼고 보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상의 것, 즉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빵과 생선, 그리고 우리가 감히 바랄 수 있는 그 이상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관대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다하여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볼 수 있고 향유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말이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부자(rich)는 다다름(reach)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루어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잘 누리는 사람입니다. 부자는 풍성함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10억을 가진 가난한 사람이 있는 반면, 백 만원을 가진 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자로 살 것인지, 가난한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합니다. 정말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사는 동안 그 무엇을 사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사용하는 그것을 그만큼 잘 누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부자로 사는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자유합니다. 그것에 의해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은혜, 그것이 증식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 구원의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그 생명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생명의 힘을 발휘하고 개발하여 남아있는 시간동안 여러분의 삶이 그 증식의 기적을 이루는 삶, 풍요의 의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는데 조그마한 씨를 집어들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 씨앗 하나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그 성분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질소, 수소, 탄소로 합성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성분대로 씨앗을 말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은 땅에 심으면 죽어 버립니다. 그러나 여기 내 손에 있는 이 조그마한 씨앗은 땅에 심으면 싹이 납니다. 그리고 똑 같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의 손에 있는 씨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씨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적 존재입니다. 그러한 생명의 신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이 오묘한 신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 오실 때에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로운 생명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마치 광부가 노다지를 찾아낸 그 기쁨과 수고의 보람, 그 이상의 것입니다. 씨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은 설명으로 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 도안에 감추어진 생명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생명은 곧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admin



프린트하기 독자한마디


이전으로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개인정보취급방침 |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