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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2002-03-28 23:12:32 read : 17452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0:25-37 방송 듣기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질문이 다분히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관심이라면,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누가 내 이웃인가?" 라는 명목에만 그치지 말고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겸허한 반성을 가지고 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나 옷을 벗기우고 맞아서 거반 죽은 사람입니다. 반 죽은 사람이 우리들의 이웃이란 뜻이지요. 저는 이 강도 만난 이웃을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병원을 차리고 사회복지기관을 세우면 되겠지요. 교회는 2차적인 관심으로 사회봉사도 하고 사회운동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1차적 관심은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영혼은 육체의 옷을 벗고 난 다음에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가는 이웃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불신자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고 육체의 목숨만 살아 있으니 정말 거반 죽은, 절반은 죽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은 첫째로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옷이 벗기우고 가진 것을 다 뺏겼으니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상처받고 가난해진 사람입니다. 셋째로 강도에게 맞아서 상처가 난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영혼구원을 목적하는 기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영혼을 취급하는 기관은 사실상 하나님의 교회 밖에 없습니다. 지난 날 한의사와 약사의 분쟁이 났을 때, 의약분업의 사태로 인하여 병원 진료가 안되고 약국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시민들이 불평했지요. "싸움은 싸움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진료는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사람의 생명을 취급하는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영혼구원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입니다. "할까? 말까? 하고 싶다, 하기 싫다"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곧 복음전도요 교회 곧 영혼구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함께 있는 교회의 존재 이유요, 사명이요, 본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먼저 교회가 복음전도의 사명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 현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음에 교회가 복음전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까지를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웃을 제사장이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보여 주십니다. 제사장은 예배를 집전하는 사람이고 또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직분입니다. 이를테면 벧전 2:4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우리들은 예배의 참여자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국가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합니다. 어떤 일에 집중하다 보면 그만 그 일에 푹 빠져 버립니다. 꼭 그 일에만 익숙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배요, 기도입니다만 문제는 그것이 규격품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하는 일에만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었지만 못본 채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 마음 중심에는 "나는 너와는 다르다"는 외침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너와 너무 다른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너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영적 안일이요, 영적 교만이 아니겠습니까? 제사장 노릇은 잘하고 있지만 이런 점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두 번째로 예수님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웃을 레위 사람이 어떻게 취급했는 가를 보여 주십니다. 레위 사람들은 예배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모범적인 성도들이지요. 찬양대도 열심히 하고 주일학교 봉사도 열심히 하고 심방도 봉사도 모범적으로 하는 좋은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제사장처럼 이 사람들도 자기 하는 일의 보람에 만족하고 그 일에만 익숙해집니다. 집사님, 권사님, 교사, 찬양대원들이 서로 격려하며 봉사하는 일에 만족하다 보니까 다른 일에는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길가에 죽어가는 영혼을 보았지만 아무 감흥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너의 이웃이 될 수 없다"는 내부의 소리에 순응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이웃으로 인하여 손해볼 필요가 있을까? 그는 더 이상 다른 영혼들 때문에 고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 때문에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손해볼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영적 이기주의요, 영적 분리주의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 인구의 70%가 주님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교의 이유입니다. 부산 인구의 80%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교회는 철저하게 자기 만족에 빠져 있습니다. 모범적인 교인들의 일부는 오직 예배와 기도에 일편단심 민들레이고 또다른 일부는 봉사와 친교에 이골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상황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편의에 익숙해진 신자 가운데서 교회의 주인공이신 성령님은 당신의 전도를 수종들 사람을 찾지 못하고 계십니다. 10명중 8-9명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따뜻한 남쪽나라 살기 좋은 부산에서 성령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런 가운데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들은 이 거리에서 저 거리에서 계속 죽어갑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는 모두 자기 교회당에서 자기 집안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땅끝까지에는 관심이 미치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영혼에 대해서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는 중에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여행하는 사람이니 그 동네 사람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리겐처럼 풍유적으로 해석할 순 없지만 저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하십니다. 전도를 교회가 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직접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옛날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분입니다. 롯을 천사와 함께 불 가운데서 꺼집어 내신 분입니다. 그분은 드로아에서 어떤 마게도냐 사람으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분입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냐? 아니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든, 아니면 예수님이 어떤 엉뚱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셨던, 그것은 예수님의 현현과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무명의 성도를 통하여 천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줄 믿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어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계셔서 교회 본연의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불쌍한 영혼을 먼저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해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악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 32편 1절의 말씀보다 은혜로운 말씀은 없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 강도 만나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은 분명히 죄인이었습니다. 죄지은 영혼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영원히 지옥으로 버림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죄가 있습니다. 그 죄때문에 그는 멸망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죄를 가리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은 우리가 거저 받고 믿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죄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음 안에서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함받았다고 해서 전에 죄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강도 만나 거의 죽었던 사람이었고, 에스골 골짜기에 말라빠진 뼈다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요 복입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이 만나 주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당신을 우리의 영혼에 나타내실 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거듭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왕같은 제사장의 모습을 보고 참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나 죽게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룻밤을 돌보아 주고는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저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의 몸된 교회여! 내가 돌보아 주었던 이 불쌍한 영혼을 돌보아 다오! 내가 밤새 치료해 주었던 이 죽어가는 영혼을 너의 주막에 데려 가다오! 며칠, 몇 달이 지나면 큰 병원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주리라." 우리 교회 전도사랑방은 주님께서 부탁하신 영적인 주막입니다. 상처가 많고, 믿음이 작기 때문에 아직도 제 발로 교회에 들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거저 돌보아 주는 곳입니다. 그들의 신음소리와 욕설, 원망과 오해를 들어 주는 곳입니다. 그들이 연약해서 의심하는 것들을 옆에서 조금씩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예수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고 그들의 증상을 옆에서 지켜봐 주는 곳이 전도사랑방입니다. 전도사랑방은 불신의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가기 위하여 밟는 징검다리요, overbrige요, 사닥다리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셨습니다. 전도사랑방을 열 수 있는 최소한의 은사를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직분을 숨기거나 변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충실한 제사장이요 부지런한 백성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 더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실하기는 한데 답답하구나! 참 부지런은 한데 융통성이 없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자꾸만 머뭇거리며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회개와 신앙과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히 6:1-2). 전도사랑방을 힘들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도사랑방은 다 배우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 약한 우리를 보시고 탄식하시는 주님은 얼마나 친절하신 분이십니까? "영혼을 돌보는 것은 원래 나의 일인데 너에게 부탁한다. 부비가 더 들면 내가 갚으리라. 내 양떼를 섬긴 너에게 열두 광주리 가득한 복을 안겨 주리라. 내가 구원하고자 하는 이 영혼을 좀 돌봐 다오. 네가 이웃을 조금이라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너의 구역에 너의 사랑방에 잠시 내 사랑하는 영혼을 머물게 해다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사장, 레위인, 어떤 사마리아인,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나아 온 율법사가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은 오늘 아침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너의 사랑방을 빌리자꾸나. 금년에 400명의 새가족을 보내리니 200명의 입교인을 맞이할 사랑방들을 준비해다오. 모든 비용은 내가 갚아 주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전도사랑방에서 이 사람을 돌보아 다오. 이 사람이 제 발로 설 때까지 송도제일교회 전도사랑방에서 좀 돌봐 주려무나! 제발 내가 부탁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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