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에 있는 자를 도우라(사16:1-5) 2002-03-11 00:26:14 read : 17728
우리가 살다보면, 삶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축복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언제 그런 기분을 느끼는가? 모든 일이 내가 기대한 대로 잘 진행되고,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 그런 기분이 든다. 성도는 은혜 받았을 때,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을 때, 애굽의 바로는 기마병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적해왔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부르짖었다. 그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가게 하셨고, 뒤쫓아오는 애굽군대를 바다에 수장 시키셨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는, 찬양이 터져 나왔다(출15:1-21장).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과 찬양이 있으면, 감사와 찬양은 흘러나오게 된다.
기쁨이 있으면, 기쁨이 흘러 넘치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이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이런 행복감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인생이 참 행복하다고 느꼈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폭풍우 속에 휘말리게 되고, 하늘이 캄캄하게 변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역시 삶은 고통이다'라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싶을 때도 있다.
출애굽기 15장은, 환희와 고통이 교차되는 모습을 잘 표현해 준다.
그런데 환희와 고통이 교차되는 경험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도, 똑같은 경험할 수 있다.
혹시 우리 가운데, 행복에 겨워 기뻐 노래하는 자는, 슬퍼하며 눈물 흘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성도는, 항상 위치를 바꿔놓고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괴로워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이사야 15장과 16장은,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
이사야 15장의 내용은, 모압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하룻밤에 망한다는 것이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큰딸과 근친 상간하여 낳은 '모압'이 그 조상이다(창11:31).
고로 이스라엘과는, 아주 가까운 형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압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진로를 방해했고(민22:1-),
이스라엘이 바알부올에게 부속(헌신)하도록 만들었다. 죄짓도록 만들었다(민25:1-5).
또한 앗수르에게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적대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하셨다.
하나님의 상징인,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6장은 그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 모압에게 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은 '이스라엘과 화목 하라'는 것이다.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을 섬기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망할 수밖에 없는 모압이, 그렇게 행하면 살길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서로 도와주고 섬겨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기를 바란다.
고난 당하는 성도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1. 섬기는 종이 되라.
"너희는 이 땅 치리자에게, 어린양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1).
'너희'는 모압인들이며, '이 땅 치리자'는 남왕국 유대 왕을 말한다.
'어린양을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는 말은, 모압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기 위하여,
조공으로 암양 10만, 숫양 10의 털을 바쳤던 것처럼(왕하3:4), 화친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압의 여자들은,
아르논 나무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2).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 "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 "가 있다.
모압 전체가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는 이 시대에, 성도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며,
또한 성도간에, 종이 되어서 서로 복종하며 섬겨야 함을 말한다.
종은 가장 비천한 단어이기에,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 밑에서 비천하게 일하기 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한다(갈5:13).
제직들이 목사를 섬기고,
목사가 제직들을 섬기는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겨 피차에 복종한다면, 얼마나 멋있는 부부가 될까요?
아우가 형을 섬기고, 형이 아우를 섬기는 가정,
경영주가 노동자를 섬기고, 노동자가 경영인을 섬기는 직장은 얼마나 생산성이 높겠습니까?
인간 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잡아먹으려고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 서로 종노릇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서로 잡아먹으려고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 시기 질투하여 이용하려 하고, 착취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쟁 사회의 비극이다.
종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았기에, 참 비천한 단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종이 되셨기에, 가장 영광스러운 단어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우리에게서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까?
주님의 종노릇을 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는 내 남편, 주님이 사랑하는 내 아내, 주님이 사랑하는 내 자녀, 주님이 사랑하는 내 이웃들을 섬기는 종이 되자.
D.L 무디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 이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본받아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다. 이런 성도가 되자.
2. 좋은 이웃이 되라.
"…오정 때에 밤 같이 그늘을 짓고,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 하는 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3-4).
여호수아 장군이, 여리고 성의 정보를 얻기 위하여, 두 사람을 침투시켰다.
두 정찰병은 생명을 걸고, 여리고 성에 잠입하여,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수2장).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보낸 정찰병인데, 우리를 좀 숨겨주시오"
그런데 돈만 아는 기생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인 정찰병의 말을 듣고,
"제가 듣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당신들을 위해서 우리 땅을 기업으로 준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니, 당신을 보호하겠어요"
이것은 대단히 위태로운 모험이다. 발각되면 두 사람은 물론, 라합의 전 가족은 몰살당해야 한다.
그러나 라합은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여리고 백성은 하나님께 멸망 받을 죄인들이니,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겠다'고,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후일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그 모든 가족들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구원받고,
영혼은 천국가며, 또한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런 사람이 되었다.
모압 백성들이 사는 길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해고, 그 짐을 져주는 것이다.
인도의 '썬다 씽'의 전기를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온다.
썬다 씽이 어느 추운 겨울날, 전도 여행을 하는 도중,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게 되었다.
혼자서 산을 넘는데, 저 앞에 한 사람이 서서 머뭇거리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썬다 씽이 앞사람이 머뭇거리던 곳에 도착해 보니, 어떤 사람이 추위에 지쳐 쓰러져 있었다.
앞에 가던 사람은, 못 본 체해야 할지, 구해 주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냥 간 것이다.
썬다 씽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들쳐업고 힘들게 산을 넘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가니, 추운 히말라야산맥을 넘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의 몸에서는 땀이 흘러, 그도 살고 자신이 업고 있던 사람도 살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앞에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산을 넘기 전에 썬다 씽보다 앞서, 쓰러진 사람을 버려 두고 혼자 갔던 사람이다.
그는 혼자 힘들게 산을 넘다가, 추위에 얼어죽은 것이었다.
썬다 씽은 이웃을 구하려고 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간 것인데,
결국 그 모진 추위에도 그는 살았으니, 오히려 도움을 받은 셈이 되고 말았다.
이웃을 사랑해서 살리려고 하면, 나도 산다.
나 혼자만 예수 잘 믿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전도하고 말씀을 전할 때,
이웃의 영혼도 복을 받고, 우리 영혼도 더욱 성숙해 진다.
우리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 힘으로는 그 궁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곁에 있는 이웃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과 멀어진 삶의 자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궁지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된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때,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땅에 고난 당하는 자들을 보호해 주기보다는,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여기서 '바로 잡고'라는 말은, 회복시킨다(restore)이다.
"뼈가 골절되었을 때, 바르게 맞추거나, 터진 그물을 기워서 그 기능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정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정죄의 전문가는 사단이다.
사단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를 찾아와 항상 정죄한다.
"네가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어? 네가 ○○야!
그 따위로 하느니, 차라리 교회에 안 나가는 게 낫겠다. 때려 쳐라…"
사단의 정죄에 빠지게 되면, 우리 마음의 열심히 급속하게 식어버리고 주님에게서 멀어진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정죄하는 자의 자리에서 서는 것이 아니라, 회복자의 자리에 설 것을 기대하신다.
요8:3-11절을 보면,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보고, 서슬이 시퍼런 정죄자가 되어,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고 하시면서, 땅을 무엇을 쓰셨다.
왜? 주님의 뜻은 낙심과 절망의 자리에서 끌어내어, 회복시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네 명의 친구들에게 실려온 중풍병자는, 좋은 이웃이 있었기에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마9:2).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갈6장은 어떤 특정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향해 명령하고 있다.
낙심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역부족이다. 교회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
'저 사람은 우리 구역 식구가 아니니까'하는 식으로, 이웃 돌보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알 때, 우리 모두에게 이웃을 돌볼 책임이 있음을 알 때, 더욱 적극적으로 이웃의 회복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먼저 이 일에, 앞장서기 바란다.
5절을 보면,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비록 지금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다.
모압인들에게 "나의 쫓겨난 자들을 선대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 음성에 담겨진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고, 고난 받는 자를 섬기는 자가 되고, 좋은 이웃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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