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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용서하십시오
2002-02-25 11:22:42   read : 18799

엡 4:25-32 <2002-02-17>


요즈음 우리는 교회적으로 목장교회로 전환하는 격변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장교회 유형가운데는 특성교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운동사에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가운데도 연예인교회, 체육인교회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하면 교도소 교회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만일 거짓말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거짓말쟁이 교회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화 잘내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분노교회가 존재한다면```도적질 잘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도둑교회```혹은 더러운 말을 잘하는 입이 더러운 사람들의 교회가 존재한다면```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에베소 교회는 이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거짓을 버려라, 분을 내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충고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것이 에베소 교회만의 실상일까요? 오늘 우리교회 내에는 정말 거짓말하는 교인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붙들고 화내는 교인들, 심지어 도둑질하는 교인들, 더러운 말을 하는 교인들이 없을까요? 있다면 우리교회나 에베소 교회가 다를바가 없어요.

문제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과연 이런 교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이들의 궁극적인 변화를 위해 교회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의 '궁극적인 변화'(교리적으로 '영화'라 일컫는다)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한순간에 변화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믿음으로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기독교 교리에서는 이 중간과정을 '성화'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변했지만 우리의 변화는 아직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수하고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에서 바울사도는 이런 모습의 성도들에 대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옛사람을 계속 벗어버리며 동시에 새사람을 계속 입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궁극적인 변화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변화의 도상에서 드러나는 변화되지 못한 서로의 모습에 대하여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서로를 향한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이 용서가 제일 요청될 곳이 저는 목장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고 살 때에는 사랑할 필요도, 용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삶을 열고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의 사소한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앞으로 목장교회에서 반드시 이 과정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상처 많이 받는 곳이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렇다고 가정 무용론을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가정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과 용서를 배우는 곳입니다. 영적인 가정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가정은 용서가 넉넉한 가정입니다. 가정이 서로를 향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가정은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는 용서가 넉넉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목장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32절이 그 대답입니다.

1.서로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32절의 말씀은 용서를 실천하기 위한 단계적인 삶의 태도를 명하시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첫째가 서로 친절히 대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용서하기 어려운 대상의 어떤 사람이 있다해도 우선 일차적으로 그를 친절히 대하는 것으로 시작하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친절이란 희랍어 단어는 매우 독특한 단어가 씌어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크레스토스"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닙니까? 비슷한 말 가운데 희랍어로 "크리스토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어느 초대교회의 생활양식을 증언하는 어느 문서에 보니까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행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일에 상관없이 그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스탠튼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늘 링컨에 대해 악의에 찬 평가를 하고 심지어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스탠튼을 장관의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런 자리에 임명할 수 있는냐고 항의했을 때 링컨은 웃으면서 단 한마디 "그 자리에는 그가 적임자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친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2.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둘째는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은 이 단어를 '부드러운 마음'(tender heart)을 가지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 번역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번역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Phillips번역은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가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그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가 내게 행한 분통터지는 말이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이나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십시오. 그를 둘러싼 삶의 역정에서 그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여 보십시오. 분하고 억울하지만 그가 나에게 그렇게 대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의 참모였던 아히히만의 재판과정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의 글을 의미있게 읽은적이 있습니다. 그가 처음 재판정에 나설 때 그는 이런 인간은 만천하가 주시하는 가운데 극형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재판정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고 그의 일생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하면서 이 기자는 놀라운 자기 내면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동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해는 용서의 열쇠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를 이해하게 해달라고 먼저 기도해 보십시오.

3.주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용서가 제일 힘들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주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제시하는 방법이 아닙니까.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5:1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윌리암 아더 워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같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아시고 보시면서도 그리스도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 하셨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아직도 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용서를 가능케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인간됨의 가치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실 만큼 고귀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자 한다면 내가보는 시각으로 그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그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이웃을 향한 험담을 조심할 이유를 말할 때 바로 그런 이유를 들고 있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야고보는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3:9에 보면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를 싫어한다든지 미워한다든지라는 나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내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유서 깊은 미국의 기독교 명문인 휘튼대학의 총장을 지낸 분가운데 허드슨 애머딩박사 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하는 후원 이사회로부터 심각한 사임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자유화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머리가 길어지고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물을 드린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점차 학교의 후원자들이 감소하고 학교는 재정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몇차례 학생들에게 호소했지만 학생들의 행동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총장의 마음속에도 학생들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회가 채플에서 열리게 되었고, 총장의 권면 시간이 되자 그는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머리가 긴 학생하나를 강단으로 불러내었습니다. "자네와 자네의 친구들은 우리학교의 후원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네. 그리고 이 긴 머리 때문에 나와 내 동료 교수들이 그동안 심적인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을 알리려 하네. 그러나 내가 자네를 이 앞으로 불러낸 이유는 자네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네. 나와 나의 동료 교수들은 우리가 받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후원자들이 자네를 바라보는 식으로 자네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네. 이 긴 머리와 상관없이 자네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진리를 향한 열정을 갖고 있음을 믿고 있다는 것--우리는 자네들의 머리의 길이와 상관없이 자네들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라네." 학생들은 일어나서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응했고,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깍고 기도하는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고 용서하고 용납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우리의 목장교회가 우리 지구촌교회가 참으로 용서를 배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의 비전과 사명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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