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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2002-02-18 15:57:50 read : 20422
사30:18-19,눅2:22-33 <2001. 12. 23.>
우리나라 부동의 대표적인 고전 가운데 춘향전이 있습니다. 절개를 지키며 인내하며 기다리는 성 춘향 앞에 장원 급제하여 나타난 이 도령이 그 기다림에 대해 당당히 보상해 준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사실인즉슨 이 세상에 이 도령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에 그 문제가 있습니다. 설사 많이 있다 하더라도 장원 급제하여 돌아오기는 그리 쉽지 않다고 하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켓의 작품 가운데에 「고도를 기다리며」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여행객이 어느 한적한 시골길 옆 나무곁에 서서 고도를 기다립니다. 고도가 나타나면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며 무의미한 행동들을 반복합니다. 서로 다투기도 하고 밧줄에 목을 매달아 보기도 하고 뜻없는 말과 노래를 해 보기도 하고 태아의 자세로 누워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설사 고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겁니다. 어느덧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그 앞에 뚜렷이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망과 소망 사이를 오가며 그래도 무한정 또 기다린다. 하는 얘기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인류의 소망이 나타날 것 같으면서도 아무런 빛도 떠오르고 있지 아니하고 있는 현대에 절망적인 모습을 여실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입니다.
성경에서 기다림 사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기다리다' 라고 하는 말은 야할이라고 하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시대에 온 세상을 뒤 덮은 홍수가 온 땅에 창일했던 홍수가 가라앉기를 점점 물이 줄어들기를 감해지기를 기다린다 했을 때에 처음으로 이 용어가 사용되어 집니다. 사울 임금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져 있을 때에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간절히 기다렸다 했을 때에 이 용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 할 때에 이 용어가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성향을 지닌 신약신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생명은 예수님을 향한 경건한 기다림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기다림 사상, 기다림 신앙이 기독교에 가장 소중한 진리인 예수를 기다리는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465회 정도 기록되어져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셨습니다. 제가 한 가지 예언을 하지요. 한 이틀 후면 틀림없이 예수님 오신 성탄절이 올 겁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내용이 30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하신 말씀 가운데 열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다섯 처녀와 준비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다섯 처녀가 영원한 승리와 멸망에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이 그 신앙이요 초대교회의 신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서신의 요약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성도들에게 갚아주시는 그 보상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고 분명한 것이고 황홀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잠시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능히 승리할 수 있으니 그 황홀한 승리를 기다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요한의 신학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영광이 너무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의 구원을 우리가 영접하고 오늘 묵묵히 기다리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이루어 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기다림 사상, 기다림 신앙의 출발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그랬습니다.
여호와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에 지쳐버린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 땅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여기에 의심하지 않지요. 하나님이 돌리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가서 진리는 승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승리한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지요. 그런데 문제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심판을 믿지요. 확실한 구원을 믿지요. 그러나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날을 기다려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이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은 분명히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바로 기다려 주심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가장 정확한 때에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도착되어질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이 순간에 역사가 멈추어 지고 모든 불의를 다 들어내신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이 순간에 우리의 호흡이 멎고 우리의 임종이 닥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끝났습니까? 바로 이 순간에 역사의 종말이 임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하면 여러분의 영성이나 인격이나 여러분의 삶의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갖추어져 있습니까?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양식은 준비해 놓으셨습니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참고 인내하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열매없는 한 그루 나무처럼 앙상하게 서 있을 때에 농부는 눈물을 지으며 주인에게 강청을 하는 겁니다. 한 해만 더 참아 주십시오. 내가 거름주고 가꾸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열매를 맺을 날이 있겠지요. 하나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이 진실한 신앙인들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양이 주님이 원하는 자리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 한국교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좀 더 진실해 보겠습니다. 교회를 좀 더 사랑해 보겠습니다. 이 교회가 주님의 신부인데 벌거벗은 모습으로 신부를 주님께 세울 수는 없습니다. 초라한 이 모습으로 주님 재림하셔서 이런 신부된 교회를 돌려드릴 수 없사오니 주여 참아주십시오.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실한 기도 아니겠습니까?
저 자신이 엎드려 우리교회를 주님 앞에 세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주님 주님이 그토록 원하는 교회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 영광스러운 신부된 교회를 우리가 이루어 보고 싶습니다. 이 마지막 종말의 때에 성령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복된 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벌거벗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철없기 짝이 없습니다. 하오니 좀더 진실하게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좀더 아버지의 은혜를 갈망하며 그 권능으로 교회를 세워가겠습니다. 우리교회를 위하여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이것이 이 교회를 사랑하는 우리모두의 기도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저 자신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거는 기대가 있음에 뻔히 알면서도 주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목회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게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에 기다려 주십시오. 좀더 기도해 보겠습니다. 좀더 교회를 사랑해 보겠습니다. 좀더 매달려 보겠습니다. 좀더 땀흘려 보겠습니다. 주여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실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기다려 주심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않은지요. 거기에 긍휼이 있고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이 몰라서 기다리시는게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 기다리시는게 아닙니다. 나를 향하여 좀 더 기다려 주시는 것이 내게 은혜가 되는 것이고 내게 더 유익한 길이 되는 것이고 나를 용서하는 길이 되는 것이며 나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신다고.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라고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다려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또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시편 37편 7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그랬습니다. 잠잠히 기다리라.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라. 원망하지 말고 기다리라. 초조해 하지 말고 기다리라. 인내하며 기다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이 올때 불평이나 낙심 대신에 "주여! 감사합니다. 이 시험이 끝난 다음에 어떤 복을 주시려구요. 이 캄캄한 터널이 끝나는 시점에서 어떤 길을 내게 보여 주시려구요." 우리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난의 보자기에 축복은 싸다 주신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참지 못하여 하나님의 복을 빼앗겨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불평하다가 망했습니다. 원망하다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면 기다리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꾀를 내는 겁니다. '아하 젊은 여자 하갈이 있구나.'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기다리지 못한 아브라함의 얼마나 커다란 불행이 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도 중동에 쏘아 올려지고 있는 저 포화들 저 불길들 화염들 바로 아브라함의 기다리지 못한 불행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였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7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원망하지 아니하고 14년을 기다렸습니다. 과부 안나는 84년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다리다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현대인들은 조급하고 기다리기를 싫어합니다. 뭐든지 빨리 빨리 병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에 영화관에 가가지곤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데 마지막 마쳐질 때까지 서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우수수 앉아 버립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물어보면 "한국말 할줄 압니까?” 한국말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러면 "빨리 빨리” 빨리 병입니다. 좀 더 빠른 인터넷을 원합니다. 식사도 뜸들은 식사가 어렵습니다. 패스트푸드를 즐깁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기다리는 데에 있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 살아가다 보면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여러분 결과는 별것 아닙니다. 행복은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마지막에 종착역에 도착하는 학위 하나 그것 별 것 아니예요. 공부하는 과정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키우는 과정이 재미있는 것이지 키워놓은 결과가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식장에 가서 결혼해 보면 그 결혼식을 향하여 달려가는 연애시절 과정이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과정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기다린 결과가 복이라기 보다는 기다리는 과정 자체가 영성이요 신앙이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잠히 기다리는데에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관한 얘기를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빅터 프랭크라는 사람의 얘기에 보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절망하고 낙망하는 사람들은 빨리 죽더라.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여 끝까지 살아남더라”고 얘기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겁니다. 구약에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재림하실 예수, 예수님이 오시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 끌려가고 로마침략을 당하면서도 2천년동안 나라가 없는 세월속에서도 그들은 기다림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거기에 참된 신앙의 맛이 있습니다.
영국의 처어칠 경이 노년에 자기 모교인 고등학교를 방문하게 됩니다. 전쟁의 영웅이 모교를 방문한다고 하니까 교장선생님부터 모든 학생들이 그 영웅의 연설을 듣기 위하여 강단에 모였습니다. 그는 또 명 연설가 아닙니까? 저마다 손에는 연필을 들고 노트를 들고는 그 연설을 경청하려고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단에 선 처어칠, 자기가 앉았던 그 자리, 때로는 앞자리에 앉아서 낙서하던 그 낙서까지 그대로 선명하게 있습니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소년시절의 그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학생들을 빙 둘러보더니 한 마디를 남깁니다. “Don't give up hold on!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꿈을 꼭 붙드십시오. 붙들었으면 결단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단코 결단코.”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절한 고통에서 "메시야는 반드시 오십니다"를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조금 늦게 오실 뿐입니다. 이게 그들의 주제곡이었습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마라나타! 예수님 오십니다. 얘기했습니다. 타락한 시대는 종말의 환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성이 맑은 시대는 언제나 종말의 환상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이 모든 것입니다. 썩을 것들을 붙들고 함께 썩어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성이 맑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혼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초점과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어리석은 사람들, 정상일보 직전에 돌아선 발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응답되기 일보직전에 덮어버린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꿈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꿈을 가지고 언덕을 올라갑니다. 그러나 목표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여서 돌아섭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갔더라면 거기가 정상인 것을...
기도해 봅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한번 더 매달렸더라면 응답될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하늘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을 것이다."라고 어떤 목사님은 얘기했습니다.
하늘나라 가서 보면 내가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것 같아서 포기해 버렸는데 하늘나라에 가 봤더니 내가 기도를 시작해서 하늘나라에서 소포를 보냈어요. 천사가 지금 싣고 날아오고 있는데 응답이 안되는 구만 덮어버렸더니 천사가 그 소포를 들고 천국으로 돌아왔어. 그래서 돌아온 소포만 쌓아둔 창고가 너무 많더라는 거지요.
아프리카의 어떤 마을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드리는데 아 신통하게도 이 마을에서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는 겁니다. 열흘이고 한달이고 1년이고 2년이고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오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에 인생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도착할 때까지 달려가는 겁니다. 한번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꿈을 꾸었으면 주께서 응답해 주실 때까지 밀고 나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500여명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다린 사람은 120명문도밖에 없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렸던 120문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각 사람 머리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권능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바람같은 역사를 보았습니다. 다른 방언을 모두하게 된 것입니다. 세기를 바꾸는 위대한 영향력있는 인물들로 그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다락방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방문을 걷어차고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세상으로 흩어져서 땅을 정복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된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파티장에서 값비싼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배인에게 급하게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이런 색의 빛나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잃어버렸는데 그것 좀 찾아봐 주시겠습니까?” “네. 그러시지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가서 찾는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의자 밑을 뒤져보고 쓰레기통을 뒤져보는 사이에 20분 30분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찾았습니다. 너무너무 기뻐서 달려와서 전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제가 그것을 찾았습니다.”아무리 외쳐도 전화기속에서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 겁니다. 이 부인은 없는가 보다. 전화를 끊고 그 이후에는 다시는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훌륭한 세실이라는 글 가운데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번은 세실이라는 사람이 자기 딸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습니다. 많은 물건을 샀는데 아이가 다리 아파 하니까 공원에 데리고 나와서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아빠가 인형 사고, 물건 사고, 맛있는 것 사 가지고 올테니까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야 된다.”이것 저것 물건을 다 사 가지고 차를 몰고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얘기 엄마가 “메리는?” 깜짝놀란 세실이 아버지는 사왔던 모든 물건들은 방에 던져놓고 차를 몰아서 공원에 달려갔더니 해는 서산에 지고 어둑어둑 해지는데 아이가 오돌오돌 떨고 있어요. 왈칵 끌어안으며 “아가야, 왜 여기 앉아있니. 집에 돌아오지 않고.”“아빠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아빠는 오셨잖아요.”
여러분 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어질지 모르지만 이제는 나혼자 추위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한번 약속하신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반드시 만나주실 것입니다. 약속하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보면 기다리다가 예수를 만난 한 노인의 얘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성탄절기에 신앙의 본질을 가르쳐 주는 소중한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난지 8일이 되면 사내아이는 할례를 행하고 40일만에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그 산모는 거행하게 됩니다. 대게는 양을 잡아서 정결예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가난한 집 사람은 비둘기 한쌍을 들고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행하지요. 예수님과 마리아도 비둘기 한쌍을 들고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행하는데 한 노인이 오더니 아이를 덥석 품에 안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오 주재여 권능의 소유주여 종에게 약속했던 그 꿈을 이제야 이루어 주시는 군요. 제가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주의 구원이란 예수란 말을 풀이해서 쓴 말입니다. 예수란 이름의 뜻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예수를 제게 보여주셨으니 메시야를 제게 보여주셨으니 구세주를 제게 보여주셨으니 제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겠나이다. 오늘 죽어도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시므온이라고 하는 노인입니다.
시므온이 자기 백성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타락하고 어두워져 가는 역사를 가슴에 끌어안고 몸부림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메시야를 속히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내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어두워져 가는 이 땅에 빛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썩어 문들어져 가는 이 세상 속에 주여 찾아오셔서 이 백성을 살려내십시오." 그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니가 눈을 감기전에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다.' 얼마나 감격하는 순간이었을까요?
그러나 시간은 흘러흘러 머리는 백발이 되어져 갔습니다. 이제는 오늘 눈을 감을지 하나님이 내일 부를지 모르는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막 시작했는데 성령의 음성이 막 들려옵니다. '종아 눈을 뜨거라 저 아이가 메시야이니라.'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얼마나 펑펑 울었을까요? 아이를 품에 안고 울면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하시더니 메시야를 제게 보내주시는군요. 예수를 제게 보여주시는군요. 구세주를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군요.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오늘 죽어도 소원이 없습니다.
이 노인이 예수님을 품에 안았다고 그래서 회춘하여 이제 출세길이 열리겠습니까? 아니면 이 노인이 예수님을 품에 안았다고 그래서 세상의 부귀영화권세를 누리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만난 행복으로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여기 행복의 절정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여 주셔서 나를 만나고 계신다. 하나님의 권능이 내게 임했다. 이게 예수 믿는 행복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 만난 행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가져오기 때문에 선물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아닌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이 성탄절기를 통하여 예수 만나기를 그렇게도 우리는 갈망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한분 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예수 한분 만으로 우리는 벗어도 좋고, 예수 때문에 울 수 있고, 예수 때문에 웃을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행복, 예수안에 있는 그 행복을 아십니까? 여러분 이 세상 다 가져도 예수 없으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게 인생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 권세를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없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요 망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어떤 친구가 죽었다고 그래서 찾아갔더니 제가 목사라는 걸 알고 좋은데 갈 수 있게 간절히 기도 좀 해달라고 그래요. 평생을 예수님을 모르고 허무하게 살았던 인생을 내가 아는데 여러분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예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알기 때문에, 예수 안에 부가 있고 예수 안에 행복이 있고, 예수 안에 기쁨이 있고 예수 안에 참된 가치가 있고 인생의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늘 고독하기 짝이 없습니다.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도입니다. 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 크리스챤인들은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되어지게 될 것입니다.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 가운데는 낡고 커다란 그림 하나가 평생동안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었고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젖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무척이나 절망스럽고 처절하기까지 보이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는 온다!”
소년시절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이집 저집 방문하며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 낡은 집에 들어갔을 때에 그림이 한폭 걸려있는데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요구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 그림 저 주시면 안되나요.” “안된다.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그림이란다.” “할아버지 저한테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사면 이 그림 파실래요.” “안된다. 내가 아끼는 그림이기 때문에 안된다.”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죽거들랑 네가 가지려무나.” “그럼 약속하세요.” 오랜시간을 기다렸다가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약속처럼 그 그림을 얻어 옵니다. 그리고 자기 사무실에 둔 것입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는 찾아 온다!” 이것이 카네기의 생활신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소망교회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믿음 생활이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사업이 여러분의 삶이 지금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는 나룻배 한척처럼 버려져 있는 노처럼 처절한 삶으로 이 시간에 와 계신 분 계십니까? 여러분 믿으십시오. 반드시 밀물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밀물이 여러분의 삶을 뒤덮게 되었을 때에 은혜의 강물이 여러분에게 밀려오게 될 때에 약속의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때에 여러분의 그 나룻배는 다시 바다 위에 떠올라 저 푸른 창공을 헤엄치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밀물의 때는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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