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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의 주체- 예수 그리스도 2002-01-29 13:09:28 read : 15257
사도행전 2:23~37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게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요즘 의사소통에 대한 주제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대화, 자녀간의 대화 등. 그런데 우리 모두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왜 의사소통에 대한 주제가 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을까요? 그것은 의사소통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표현들을 많이 합니다. "저 사람은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말에 귀가 있습니까?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한다." "말이 통해야 무슨 얘기를 하지." 등등. 대화를 하면서도 말이 안 통한다고 합니다. 사실 의사소통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지난 주간에 전도학교가 개강했는데, 한 강사님이 오셔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고 합니다. 보통 '스님'이라고 존경해서 부르지만 스님 자신들은 자기를 낮추어서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이라고 부르면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30세쯤 되는 젊은 스님이 하루는 목욕탕에 갔습니다. 등을 밀어줄 사람을 찾다보니 저쪽에 중학생 한명 있었습니다. 옛날 중학생은 머리를 빡빡 밀었어요. 그런데 그 스님이 중학생에게 "얘야, 이리 와서 내 등 좀 밀어라!" 라고 하면서 돌아 앉았어요. 그래서 중학생이 그 스님 등을 밀다가 가만히 보니, 머리도 빡빡 밀고 자기랑 비슷한 것 같은데, 등을 밀라고 반말을 했으니 궁금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물어 보았어요. "올해 어떻게 되십니까?" 스님이 점잖게 "아, 나는 중이다" 라고 했어요. 그 얘길 들으며 등을 밀던 소년이, 갑자기 젊은 스님의 뒤통수를 딱 때리면서 "이놈아! 나는 중3이다!" 라고 했어요.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니 같이 싸울 수도 없고 다시 얘기를 합니다. "이놈아, 나는 중이다! 주웅~이란 말이다!" 소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때리면서 "그래 이놈아, 나는 주웅~ 3이다! 주웅~ 3이란 말이다!" 라고 했다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의사소통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이런 예화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알지만, 자신은 이런 뜻으로 말했는데, 상대방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은 것은 없는데, 아주 고맙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시간당 급료가 가장 많은 사람이 정신과 의사입니다. 자녀를 의사로 만들려면 정신과를 전공하도록 하면 됩니다. 앞으로 정신병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주로 하는 일은, 80% 이상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긴 듣는데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으면서도, 적당하게 맞장구를 쳐가며 듣습니다. 그리고 처방은 몇 마디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신과 의사를 찾은 환자는 병실 문을 나오면서 "아! 후련하다!" 하며 나옵니다. 그 이유는 정신과 의사들이 잘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준 것도 없이 괜히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말을 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괜히 밉습니다. 목회하는 저는 특히 그렇습니다. 제가 밥 먹는 것 좋아한다고 우스개 소리로 하지만 밥 먹는 것 그렇게 좋아하는 것 아닙니다. 목회 하면서 제일 예쁜 사람이 식사 대접 안 해도 말씀 시간에 그 말을 잘 알아듣고 순종하고 변화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정말 미인(美人)으로 보입니다. 60세 된 할머니도 처녀로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수십 년 다녔지만,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을 보면, 겉으로는 목사니까 웃지만, 제 마음속은 불편합니다.
하나님도 동일한 마음이셨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의사소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것은 의사소통이었어요. 무엇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애가 타서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우리에게 커뮤니케이션 하기를 원하셨다는 겁니다. 기적도 베풀어 보시고, 회초리도 들어보시고, 선지자도 보내 보시고, 별별 방법을 다 썼는데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셨어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사 소통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늘 하신 말씀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어요. 왜 이 말씀을 했을까요? 설교를 하기 직전에 이 말씀을 하신 적이 많습니다. 왜냐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이 부분에서 돌아볼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는 합니다. 예배 자주 드리고, 설교 많이 듣고 성경공부를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답답해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심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이미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저 이상하고 신비적인 체험, 병 낫는 것, 어떤 뜨거운 현상, 방언, 은사들을 생각합니다. 과연 이런 것들이 성령 충만일까요?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한 부분을 다룬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한 부분을 다루었고, 오늘과 다음 주에 한번 더 베드로의 설교를 다룰 것입니다.
이 설교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베드로가 어떤 사람들 가운데서 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까? 오순절에 기적이 임했습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처음 임하시는 날, 성령 하나님이 이 땅에 내재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 날에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바람과 같은 것이 120 문도(門徒)의 머리 위에 모였고, 불의 혀 같은 것이 보였고, 각 사람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지도 않은 언어로 유창하게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너무 놀라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조롱했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그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놀랍게도 "얘들아, 이 성령 하나님은 너희들이 보는 바와 같이 이상한 게 아니고, 놀랄 것도 아니라,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예비하신 것이다!" 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오순절은 누가 강림하신 날입니까?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 중 90% 이상이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 하나님 따로, 예수님 따로, 하나님 따로 생각합니다. 제가 교역자들과 성경공부 하면서 너무 답답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 믿는 무리들이 있고, 예수님 믿는 무리들이 있고, 성령 하나님 믿는 무리들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어떤 곳은 "주여~!"라고 부르짖는데,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복음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뜨겁게 "할렐루야!" 하면서 병 고치는 것을 제일로 여깁니다. 이런 모든 태도가 오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오해가 풀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씀드린다면,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 머리와 가슴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에 대해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내 마음속에 예수가 충만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그의 설교 중 90% 이상을 할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인가? 어떻게 성령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실 것인가? 어떻게 살아 계신 주님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인가? 예수 충만, 성령 충만의 방법에 대해 세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삶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알기 위해서 예수님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삶을 연구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삶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삶의 모델링(Modeling)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의 삶의 흔적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꼭 한번 보세요. 너무나 놀라운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책의 저자는 목사이며, 신학자였지만, 그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삶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침'이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그 놀라운 윤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능력이라고 합니다. 병 고침, 은사 받는 것, 귀신 쫓는 것 등등입니다.
제 친구 가운데 얼마 전 이단으로 낙인찍힌 베뢰아의 수석 부목사 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저와 동기동창입니다. 그 파에는 감기도 귀신 들려서 생기는 것으로 해석하니까 감기에 걸리면 목사님이 쫓아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무좀도 귀신 때문에 생긴다고 믿습니다. 저의 무좀은 아직도 안 나았습니다. 저의 무좀 얘길 하면, 믿음이 없어서 안 낫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지, 사도 베드로가 소개하는 내용을 봅시다. 2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혀 이 땅에 보내셨고, 그가 33년 동안 하신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셨습니까? 병자를 고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병자를 고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그 당시 살아있던 지구상의 모든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예수님은,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 가운데 꼭 필요한 소수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기적만을 행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는 기적을 행치 않으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한 것은 증거 할 것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병 고침과 기적,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한 가지를 증거하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33년동안 사셨으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사람 중에 예수님과 소꿉 친구도 있었을 겁니다. "야! 예수, 나가 놀래? 한판 붙을까?" 하면서 함께 놀았던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증거 하시고자 했던 한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얘들아, 너희가 내 말귀를 알아듣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내가 예수를 통해 한 가지를 증거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 진리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새가족 성경공부할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개미를 굉장히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개미가 불에 떨어져 죽는 겁니다. 그래서 담을 쌓아 막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개미가 담을 못 넘어 가서 떨어져 죽습니다. 만약 개미를 정말 사랑한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개미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외쳐서 알려 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보고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이 증거를 받으셔야 합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할 얘기가 있다. 너희와 커뮤니케이션 할 것이 있다. 내 심정을 너희에게 전달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인간의 몸을 입고 그 땅에 간다" 그래서 독생하신 하나님, 제 1위 하나님, 예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동안 거하신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그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 사랑하시고, 당신에게 할 얘기가 너무 많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신 하나님이, 급기야 그 피조물 된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예수님, 좋지요! 그분의 가르침도 놀랍죠. 산상수훈을 보세요.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돌려대라고 하셨잖아요. 얼마나 놀라워요?" 하고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여전히 못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받지 못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찬양 드리신 여러분, 2000년 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 33년 동안 험한 인생을 사신 그 예수님,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2.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23절을 보세요.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도 예수님의 죽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합니다. 한 부류는 동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안됐다. 착하신 분인데 어쩌다 그렇게 돌아가셨나!"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의 죽음을 실패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데모를 주동하는 사람들이 목사들이고, 신학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와 생각이 완전히 다른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실패자라는 겁니다. 정치적인 개혁과 사회의 부조리를 뜯어고치려고 매우 노력하신 분인데, 그만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철을 되밟지 말고 실패하지 않아야 하며, 데모라도 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 번째 메시아로 이 땅에 와서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실패하지 않는 제2의 메시아를 보냈다고 주장하는 문선명 같은 이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종대왕은 몰라도 문선명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합니까? '너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것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누가 예수님을 죽였느냐고 했을 때, 그들은 로마 군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옆구리에 창을 찌르고, 나아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들을 고소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로마 군병,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설교 가운데 폭탄과 같은 선언을 합니다. "로마 군병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의 손을 빌린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바로 너희 "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는가? 하나님의 정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연히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재수가 없어서, 실패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셔서, 하나님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작정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누가 죽였는가? '너희'가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인가, 성령을 내 안에 모실 것인가 아닌가는 바로 이 문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여러분이 '저희'가 죽였다고 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들으신 겁니다. 바로 내가 죽인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내가 박은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는가? 성경은 얘기합니다. 바로 네가 찔렀다고요.
저는 이 사실을 깨닫고 몇 날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했을 때는 제 마음이 편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 로마 군병이 못박았구나!' 라고 생각했을 때는 마음이 편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성령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찔러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냐? 바로 너다!" 그 말씀에 비수처럼 찔리고 나서 며칠 밤을 잠을 자지 못했어요. 제가 예수를 죽였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왜 죽은 줄 아니? 바로 너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네가 지은 죄 때문이란다. 너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지만 나는 거룩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죄를 그냥 용서할 수 없다. 너는 죄를 지어서 멸망 길로 가야 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그래서 네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에 내가 대신 달린 것이야!"
♪♪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리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주의 십자가 붙들겠네 ♪♪
이 찬송의 가사처럼,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3년 동안이나 가르쳤는데, 그들은 실망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 동안 가르쳐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구약에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될, 바로 너희들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심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때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 이런 뜨거움이 우리 영안 교회에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 '십자가'라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져 내려야 됩니다. 그런 감동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는 분은 기도하십시오. "주여,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와 감격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옵소서!" 성령이 충만할 때, 나타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십자가의 의미가 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24절에서 36절까지 길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리고 시편 16편을 인용했습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게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이미 죽어 썩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자가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이 말씀을 해석하기 전까지 이 구절은 아주 난해한 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서 설교 가운데 이 말씀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29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이 죽어 썩었는데, 왜 자기가 죽지 않을 거라고 얘기합니까? 그것은 다윗이 선지자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몸에 대해 얘기를 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손 중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자를 미리 보았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예언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은 32절에 나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서 다윗과 베드로가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다윗이 먼저 보았습니다. 천년 전에 다윗이 본 그 사실을 지금 베드로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얘들아, 우리가 다 그 일의 증인이 아니냐!" 왜?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이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베드로와 오백 명의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모든 예수님의 부활을 본 자들에게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 아니냐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33절에 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님을 누가 주었다는 겁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 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3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부활의 강조점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그의 신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겁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신성을 모두 제한 시켰어요.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얘기합니다. 이 말씀은 곧 만유의 주, 이 세상의 주, 이 세상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을 누가 주관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누가 줄 수 있는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 받을 수 있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 1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순간, 성령님은 내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 받을 수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깊은 진리를 깨닫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그 순간, 그것이 성령 충만인줄 믿습니다. 내가 방언을 못하고, 마음이 뜨겁지 않아도, 어떤 신비스런 경험을 하지 않고, 내 병이 낫지 않아도,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교제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찾아오신 그 예수님과 날마다 깊은 교제를 합니다. 주의 말씀 들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위대한 설교를 하면서 한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장 18절에서 21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요엘서가 매주 어렵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논문만 해도 100편 이상이 나왔으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어려운 것 하나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그것이 오순절에 이루어졌느냐, 다 이루어졌느냐, 아니면 아직 남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후자의 의견을 따릅니다. 아직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앞일을 예언할 때, 종종 먼 산을 보듯이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희미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멀리서 보면 쌍둥이처럼 나란히 산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산과 산 사이는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요엘은 희미한 것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았습니다. 성령님이 언제 강림하실 것인가? 바람처럼, 불과 같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은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달이 피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앞으로 이 예언이 성취될 날이 남아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만방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죄악에 따라 일일이 심판하실 심판의 주로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 이 교회 시대는 끝나고 이 땅에 환난이 닥칠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예언이 이루어졌기에 뒤의 예언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요엘은 결론을 맺습니다. "이 환난 날이 다가오니 교회의 시대에 사는 너희들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루는 예수님이 길을 지나가시는데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이놈아, 시끄럽다. 성한 사람도 못 만나겠는데 예수님이 너를 만나겠니?" 하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이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뛰어 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그의 눈만 뜨게 해 주신 것이 아니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남은 생애를 성령 충만해서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깨끗한 삶, 능력 있는 삶,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그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의미를 깨달으십시오. 그분이 당신 때문에 돌아가셨음을 느끼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부활하셔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자 그릇을 준비하심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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