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도 제목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 2002-01-29 12:56:54 read : 13794
시편 119:33~40
33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34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35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36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38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39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지금 미국 서점가에서는 한가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서적이,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없는 '기도'를 주제로 쓰인 책이, 미국 2000개의 일반 서점에서조차 베스트셀러 1위를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아주 짧은 책인데, 판매된지 1년만에 약 600만 부가 팔렸습니다. 지금도 주문이 너무 쇄도해서 500만 부를 미국에서 더 인쇄 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지은 브루스 윌킨스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백악관에 초청되어 설교를 했고, 미국의 유명 방송국인 ABC 방송의 'Good Morning Tour ~ '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인터뷰도 하였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내용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성경의 두 구절인 역대상 4장 9절과 10절 말씀을 해석한 책입니다. 그것은 옛날 야베스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구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야베스가 하나님께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축복해 주시고, 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했더니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인생을 축복해 주셨다는 말씀을 강의한 내용입니다. 저자인 윌킨스는 이 약속이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우리도 이렇게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같은 기도를 과거 30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해 왔고, 그 결과 응답 받은 수많은 자기 인생의 달라진 모습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의 수제자로 자란 윌킨스는, 그 동안 많은 세미나를 개최해 왔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들으셨을 거예요. 우리 교회에서도 그분이 쓴 세미나 교재를 가지고 몇 번의 세미나를 했습니다. '구약의 파노라마' '신약의 파노라마'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난번 경주에서 들으신 '결혼의 청사진'이라고 하는 세미나, 거기에 쓰인 교재 모두를 브루스 윌킨스가 지은 것입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 기도는 그냥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을 구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하나님, 제 인생을 축복해주세요. 제가 가진 능력을 백 배, 만 배 이 땅에서 펼칠 수 있도록 저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무작정 복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복을 구하는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일반인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이 책의 목적을 도외시하고 단순히 개인적인 복을 구하는 기복적인 면만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솔직히 많이 듭니다. 어쨌든 미국과 한국에서 이 책은 번역되어 4만 부가 넘게 팔리고 있어요. 기도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인에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 생명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다 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생명줄이 끊어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영은 잠자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기도에 대한 관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내용입니다. 즉,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기도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왜요? 기도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도 기도가 있고, 이슬람교에도 기도가 있고, 이 세상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으며,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들도 미신적인 마음으로 누구에겐가 기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이요. 기도의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최근 당신의 기도 리스트를 점검해 본 적이 있나요? 지난 한달 동안 당신이 기도해 오셨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 오셨던가요? 지난 1년간 여러분들의 기도 리스트를 적어서 점검해보기 바랍니다. 왜요?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기도했느냐는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본문은 히브리 알파벳에 '헤[he]'라는 단어로 8절이 똑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8절을 통해서 시편기자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목에 꼭 포함되어야 할 몇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 제목들이 우리의 기도생활 가운데 늘 남아 있어서, 우리가 참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제자됨을 위한 기도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요청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제자됨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평생을 기도했다고 간증합니다. "주님, 저를 제자 삼아 주십시오. 주님 저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 주소서!" 이것이 시편기자의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33절부터 35절까지 세 절의 말씀을 할애해서, 자기의 이 기도 제목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33, 34, 35절에 각각 주동사(主動詞)를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33절-내게 가르치소서, 34절-나를 깨닫게 하소서, 35절-나를 행케 하소서'입니다.
그는 제자가 되기 위해 먼저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청합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사오니 저의 스승이 되어주소서. 제가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기 원합니다. 주님, 저를 가르쳐 주소서!"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도입니까? 여러분은 평생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나요? 간절하게 기도해 보셨나요? "하나님,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 나의 스승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를 가르쳐주세요!"
여기 나온 세 가지 동사 '가르치다' '깨닫다' '행하다'라는 단어는 특별한 형태의 동사로 기록되어 있어요. 히브리어에서는 이것을 '히필동사'라 하는데, 한국문법으로 굳이 바꾼다면, 아마도 가장 가까운 것이 사역동사가 될 것입니다. 즉, 누구누구에게 무엇을 시키는 동사입니다. 그 동작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남에게 요청하는 거예요.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말 성경은 잘 번역되었어요. 그냥 '가르친다' 고 얘기하지 않고 요청합니다. "내게 가르치소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로 행케 하소서" 왜요? 이 가르침과 깨달음과 나의 행함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시편기자는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특별히 이 세 가지를 간단 간단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33절에 '가르치다'라는 동사는 원래 활을 쏘는 궁도에서 유래된 동사입니다. 활쏘기를 가르칠 때에 화살을 목표에 정확히 쏘는 개념, 그것이 가르치는 거예요. 화살을 다른데 쏘면 안 되고, 목표물의 가운데에 정확하게 맞춘다는 개념, 그 단어가 바로 '가르치다'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심어주어 빗나가도록 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정말 올바르게 가르쳤으면, 그 사람이 빗나가지 않고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행해야 됩니다. 그것이 가르침이에요. 나는 가르치기만 하고, 상대의 반응이나 변화는 책임 안 지겠다는 것,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에요.
성경에 쓰여진 개념은,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기 쉽게 지도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한 말은, "하나님, 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제가 가정에서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해야 되며, 어머니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교회에서 교사노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사회에서 사업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대인관계는 어떻게 가져야 합니까? 아버지 하나님, 제 삶 속에서 직접적으로 제가 빗나가지 않도록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뜻이에요.
그러나 보통교육은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에서의 가르침이란 어떤 것인가? 지식을 던져줄 뿐이에요. 그 지식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어요. 교사는 칠판에 써버리고, 학생은 학생 스스로가 책임져야 해요. 그러니까 학교를 몇 십 년 다녀도 생활의 변화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육의 문제점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 가르침의 책임이 제사장에게 있었어요. 제사장이 안식일에 대중을 모아놓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그 부모들이 가르침을 받아서, 집에 가서 자녀를 가르치는 거예요. 여러분은 오늘 여기에,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앉아있고, 또한 가르치기 위해 앉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여러분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제사장 제도가 다 무너져 버렸어요. 제사장 제도가 포로 귀환 이후에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누가 제사장 합니까? 그래서 이 시편기자는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를 가르칠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가르침 받기를 원하오니, 주여! 저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저를 직접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제 스승이 되어 주시옵소서!" 저와 여러분께 이러한 기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자되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좋은 스승이 중요하지만 제자되는 사람의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어서 기도하는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 나를 깨닫게 해 주소서!"
제가 목회를 해보면 교회에서 똑같은 설교를 매주 이렇게 앉아서 듣고, 똑같은 성경공부를 하는데, 어떤 사람의 신앙은 일취월장(日就月將) 자라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신앙이 전혀 자라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10년, 20년 동안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요. 그것도 기적이긴 해요. 그런데 신앙은 안 자라요. 그래도 저는 십자가 복음을 많이 설교하는 목사잖아요. 이렇게 목이 터져라 구원에 대해 설교했는데, 어느 날 만나서 확인해보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요. 오늘 죽는다고 해도 천국 갈 자신 있느냐고 질문하면 자신 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신기한 건 교회는 안 빠지고 잘 나와요. 교회에 와서 비록 졸더라도 앉아있어요. 이게 어찌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차이일까요? 똑같은 설교를 듣고 똑같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다만 한가지의 차이 때문이에요. 깨달음의 차이에요. 시편기자는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눈을 들어 기도하기를 "아버지 하나님!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사옵나이까? 당신이 저를 가르쳐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깨달아야 되겠나이다. 저에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아무리 능력의 말씀이라고 해도 내가 깨닫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불같은 말씀, 방망이 같은 말씀, 좌우에 날이 선 예리한 검보다 더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어떤 밭에서는 그 말씀이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예수님은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 설명하셨어요. 여러분, 이 무서운 사실을 아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마음 밭에 가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해요. 길가와 돌밭, 가시밭에 가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소멸되어 버린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어요. 우리의 깨달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제가 요즘 본 TV프로 중, 재미있는 프로가 '꼴찌 탈출'이라는 프로입니다.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꼴찌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과외비를 받지 않고 좋은 과외 선생님까지 붙여주고 합숙훈련을 몇 달시켜서, 그 아이들로 하여금 꼴찌를 탈출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꼴찌 탈출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전국의 꼴찌들 가운데 인터뷰를 해서 방송사에서 뽑혀야 돼요. 그 날도 마침 꼴찌들과 인터뷰를 하더라구요. 두 명씩 세워 놓고, 꼴찌들에게 아나운서가 물어요. "자네는 몇 등인가?" 했더니 "48등 합니다" 그 옆의 학생이 "36등 합니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너는 공부를 잘하는데 왜 여기 왔니?" 그랬더니, 뒷머리를 긁으며 "우리 반은 모두 36명인데요"
그래서 그 꼴찌 10명을 모아놓고 시험을 칩니다. 어떤 애를 뽑을지 시험을 치는데, "고사성어" 하니까 비명을 질러요. 고사성어를 모른다고요. 아나운서가 "쉬운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한자도 아니고 한글로 쓰는 거다"라고 말했어요. 문제가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면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하는 것. 동쪽을 물으면 다른 쪽을 대답하는 것" 이렇게 질문하며 힌트까지 줬어요. 답은 '동문서답' 아닙니까? 이것을 한글로 쓰라고 했는데, 10명 대부분이 뭐라고 썼는가? '사오정'이라고 썼어요. 그 대답을 듣고, 저는 충격 받았어요. 그 다음 문제는 더 쉬운 문제를 냅니다. 우리 나라 속담을 쓰는 거예요. '어물전 망신은 ( )가 시킨다' 이 문제를 내니까 '어물전'이 뭐냐고 물어서 설명을 해 주었어요. 이 문제의 답은 '꼴뚜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학생들의 대부분은 답을 '오징어'라고 썼어요. 저는 또 충격 받았어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많이 시킵니까? 고3이 되면 새벽6시에 학교 가서, 겨우 새벽1시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 수많은 시간을 교실에 앉아있어요.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를, 오징어가 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게 선생 책임이겠습니까? 아무리 선생이 잘못 가르쳐도, 그 학생이 조금만 마음 문을 열고 공부를 배웠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10문제 모두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문제였는데, 가장 많이 맞춘 사람이 2문제 맞추었어요. 제가 그것을 보면서 가르침이 중요하긴 하지만, 깨달음이 얼마나 더 중요한지 저는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안타깝게도 계속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왜 잡혀갔는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잘못 때문에 잡혀갔다고 말씀하시는데,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왜 고통받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아프다고만 소리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너무나도 안타까워 하셨어요. 하나님은 교훈을 주시려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셨는데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뿐일까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를 보세요. 때로 사고가 일어납니다. 내 몸에 병이 듭니다. 내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아픕니다! 괴롭습니다!"라고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술을 부려서 고통을 주실까요?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고통이 찾아올 때 깨닫지 못해요. 하나님이 내 삶에서 어떤 부분을 수술하시기 위해서 이 고통을 주셨는지 깨달으려고 하기보다는 고함치고 좌절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하나님을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 있다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시편기자는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고, 자신이 이러한 죄를 지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로 깨닫게 하소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저의 스승이 되길 원합니다. 저로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나서 그는 제자되기 위해 또 한가지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되기 위해서는 가르침과 깨달음, 이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35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주님, 저를 가르치시고, 제가 깨닫게 하시고 저를 감독하시고 지도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저는 때때로 주님의 가르치심을 깨달았다고 해도, 그 깨달은 사실을 제 생활에 행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깨달아도, 설교시간에는 감동을 받아도, 가정에 가서 행하려고 하면 제 의지가 부족합니다. 하나님 그러하오니 저를 감독해 주세요. 지도해주세요. 제가 이 깨달은 말씀을 행하도록 제 코치가 되어 주소서!" 이것이 시편기자의 기도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저는 사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사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나님,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것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저와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한다고요. "주님, 제발 나를 당신의 제자 삼아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제목 가운데 최고 우선 순위로 남아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보호를 위한 기도
"주여! 나를 제자 삼으소서!" 그것이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시편기자가 드린 기도가 36절에서 40절까지 나오는데, 그것은 "주여 나를 보호해 주소서!" Protection에 관한 기도입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솔직히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자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사탄이다, 마귀다, 세상이다, 나의 환경이다. 다 맞는 말일 수 있어요. 그러나 시편기자는 "아버지 하나님,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을 깨달아보니 그것은 사탄도 아니요, 마귀도 아니요, 세상도 아니요, 제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시편기자의 고백이에요.
왜 하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는가?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라,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 아닙니까?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왜 한탄하고 있는 겁니까? 자기 마음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한편에는 하나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방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이 두 마음이 싸우니까 너무너무 괴로워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시편기자는 눈을 들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다섯 절에서 다섯 가지를 얘기 하지만, 저는 시간관계상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그는 무엇에서부터 보호되기를 기도했는가? 36절에 "욕심에서부터 나를 보호해 주소서!"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나의 욕심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그는 자신의 천성이 욕심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백하는 겁니다. 즉, 자기 안에 세상적인 욕심이 영적인 소원보다 더 큼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아뢰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아무리 신앙생활해도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어버리는 건 쉽지 않아요. 저는 밥만 먹고 목회 하잖아요. 그런데 저도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어버리기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얘기합니까? 마음에 잘못된 욕심이 존재하는 한 결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간증의 삶을, 결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라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
라 (눅 9:23)" 무엇을 부인합니까? "자신의 욕심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나보다 부모, 친척, 형제를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어버리지 않고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에요. 솔직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영적인 소원과 세상적인 소원, 어느 것이 더 큰가요? 제가 목회하면서 생긴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들을 차라리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사람의 양파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그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세상의 욕심이 들어있어요. 몇 년 목회하고 나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저는 좌절 속에 빠져요. 이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20, 30년 60평 아파트에서 사느냐 13평 아파트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다고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쳤고, 목이 터져라 설교했건만 그 마음 안에 세상의 욕심이 자리잡고 있어요.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처럼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내 사업을 확장시켜 주십시오, 내 몸을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해주세요" 그런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 사업을 축복해 달라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보다는 개인의 욕심이 많이 자리잡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랜드 회사 박성수 사장의 간증을 여러분은 들어보셨나요? 그분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어느 날, 사업을 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사업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큰 사업을 일으켜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일에 많이 쓰겠다고 생각하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웬 일입니까? 병이 들었어요. 그런데 병명을 몰라요. 그냥 무기력증이라고 하는데, 그분의 표현에 의하면 볼펜 한 자루 들 기운이 없어서 5년을 누워 있었대요. 처음에는 원망을 하다가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요..." 그런데 5년 동안 병상에서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줄 아세요? 한 가지 깨달음은,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을 한 건 맞았는데, 그것만 목적이 아니라 떡고물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거예요.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큰 사업채를 일으키면 그래도 고물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마음에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5년 동안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사업을 일으켜 주셨어요. 단돈 500만원 가지고 사업을 했는데, 몇 년 안에 한국 굴지의 이랜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사업할 때 부정한 방법 쓰지 않고, 세금 낼 것 다 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누가,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왜 기도합니까? 왜 새벽기도 합니까? 왜 교회에서 봉사합니까? 혹시나 당신의 욕심 때문은 아닌가요? 이 땅에서 좀더 나은 당신의 욕심을 아름답게 채우기 위해서는 아닙니까? 이 성경을 지은 시편기자는 그렇게 신앙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욕심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주님, 제 마음속의 욕심을 없애 주세요. 욕심으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세요!" 이 기도가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기도제목은, 잘못된 안목에서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겁니다. 37절을 보세요.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허탄한 것을 자꾸 바라보는 겁니다. 마음에 왜 욕심이 생기는 줄 아세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허탄한 안목, 잘못된 안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어떻게 따먹게 되었습니까? 3장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6절)" 하와는 선악과를 잘못된 안목으로 바라봤어요. 그래서 죄를 지었어요.
여러분의 눈은 어떤가요? 건전하신가요?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봅니까? TV를 보세요. 사탄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무엇을 심어 줍니까? 잘못된 눈을 심어줍니다. TV 광고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얘기합니다. "TV 광고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를 강조하면 된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세 가지는 성경에서 금한 겁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만 강조하면 광고는 히트 칩니다. 가만히 광고를 보세요. 이 셋 중의 하나입니다. 멋있는 그랜저를 선전합니다. 그랜저만 선전하면 되지, 아름다운 여자가 왜 나옵니까? 써니텐을 강조하지 왜 "흔들어주세요!" 라고 합니까? 왜 꼭 무엇을 연상하게 합니까? 그 광고가 히트 쳐서 써니텐이 얼마나 많이 팔렸습니까? 사탄은 계속해서 무엇을 속삭이는 줄 아세요? "이 땅에서 많이 모아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많이 가져라. 그리고 너의 아내만으로는 부족해. 너는 돈도 벌고 그 정도 지위도 가졌으니 아름다운 여자 하나는 폼으로라도 곁에 두어야 해. 남자도 좋아" 사탄은 계속해서 TV를 통해서 우리를 세뇌하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TV 제단 앞에 바치는 시간이 하루에 3시간 40분입니다. 일주일 한번 설교 듣고, 일주일에 20시간 이상을 TV 보는 것과 경쟁해 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우리의 안목은 삐뚤어져 있는 거예요. 13평 아파트에 살면 창피한 거예요. 60평 살아야 대접받을 것 같아요. 그랜저 타고 벤츠 타야 대접받을 것 같아요. 통장에 십 억, 이십 억이 있어야 내 인생이 안전할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아요.
여러분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은 아닙니까? 정말 열심히 여러분이 뛰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교하기 위해서, 복음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하시나요? 성경은 무엇을 얘기합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가면, 하나님과 상관없게 되고, 그 인생은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사탄이 그 유혹거리들을 남겨놓았어요. 시편기자는 이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눈을 올바르게 바라보게 하시고, 허탄한 것을 바라보지 말게 마소서! 제 눈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첩경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라보고 살게 하소서!" 시편기자는 제자됨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한가지 이 시편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시편기자는 기도를 할 때 솔직하게 했다는 겁니다.
3. 솔직한 기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감추지 않았어요. 자신의 부끄러움을 다 드러내고 기도했어요. 사실, 여러분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다 아십니다. 박 목사는 여러분의 겉모습만 보고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동기를 아세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숨길게 뭐가 있겠어요.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다 열어놓고 솔직한 기도를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래서 40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를 소생시켜 주세요! 제자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자신에게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자녀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녀문제로 가장 크게 꼽는 것은 TV, 인터넷, 그 다음 학교교육, 교육부 장관, 정치, 환경 등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합니다. 제가 10년 미국에서 살다 왔지만 이런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국에서 새는 바가지 미국 가서 샙니다. 교육 위해서 미국 가서 자식 성공시킨 사람 별로 못 봤어요. 왜요? 자녀를 하나님의 제자로 만드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뭔지 아세요? TV가 아니고, 인터넷이 아니고, 세상이 아니에요. 교육문제가 아니에요. 누군지 아세요? 부모 자신이에요. 왜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식은 부모의 속내를 알거든요. 겉으로 하나님을 아무리 섬기는 것 같아도 부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뭔지 자녀들은 정확히 아니까요. 그것을 좇아 사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속에 세상적인 욕심이 있기 때문에 자녀가 세상으로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세요. 시편기자는 이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영안 성도 여러분! 우리 평생에 이 기도 제목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와 나의 자녀를 당신의 제자 삼아 주세요! 나의 가정을 이 세상 허탄한 욕심으로부터 보호해 주세요!" 이 기도제목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내 영을 내어놓는 기도, 내 마음을 다 열어버린 기도, 솔직한 기도를 주님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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