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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가 '도리어'를 낳는다 2002-01-06 18:33:46 read : 13782
2001. 04. 01. 요한16:20-24
I. 말씀을 향하여
구 소련 우주 비행사 가운데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가 달나라까지 여행하고 돌아온 역사적인 사실을 축하하기 위한 환영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모든 간부들이 참석했고 그가 러시아 정교회 교인인 것을 감안하여 교회 지도자들도 일부 초청이 되었습니다. 한참 파티가 무르익어 가는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가가린에게 다가왔습니다. 귓속말로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이보게, 우주에 가보니 그 예수쟁이들이 말하던 하나님이 계시든가?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든가 말일세" "예. 제가 분명히 그분을 보았습니다." "쉿, 자네 이 시간 이후 절대로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되네. 그 때는 우리 공산당도 자네도 망하게 될걸세." 글쎄 나도 늘 그분이 계실거라고 생각했어 조금 더 파티가 무르익어 가는데 교회 감독이 슬그머니 다가왔습니다. "이보시오. 가가린 선생. 우주에서 그분 하나님을 만나 보았소. 그분이 과연 계시든가 말이오" "아니오. 그 분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쉿. 절대로 이 시간 이후 그 말을 해서는 안되오. 그때는 우리 교회도 우리 성도들도 모두 망하게 될 것이요." 글쎄 나도 늘 그분이 안계실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들려졌겠소.
우스게 소리입니다만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분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우리가 과연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 않는가?
그런데 구태여 힘들게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물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이에 대해 "이엠 바운즈"라는 기도 신학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① 뻐꾸기가 뻐국 뻐국 울도록 지음 받았듯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기도하고 대화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② 인간의 존재 목적이 기도라면 우리는 기도에 관한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도하기 싫어도, 기도할 줄 몰라도 기도해야 한다.
③ 하나님은 기도로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가 많을수록 사탄은 힘을 잃고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된다. 언제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와 순종을 통해 일하신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기도가 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까? 기도가 여러분의 어려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까?
오늘 「'무엇이든지' 가 '도리어'를 낳는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이는 무한한 기도의 폭과 능력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도리어! 이는 커다란 기도의 응답과 기쁨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여기 '도리어' 라는 말은 '상황이 좋은 쪽으로 바뀌어' '역전되어'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말씀은 「당신의 어렵고 힘든 상황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도할 수만 있으면 상황은 역전되어 커다란 기쁨과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II. 이 날이나 그 날이나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본문 23절은 '그 날에는'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그 날이 언제인가 알기 전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 상황 "이 날"이 언제인가를 추적하기 위해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펴 본문의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목전에 두시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제자들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수심이 가득찬 제자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① 이것이 주님의 모습을 대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자들을 못내 슬픔으로 몰아갑니다.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② 사랑하는 스승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 주면서도 막을 길이 없는 자신들의 나약함과 무능함이 한스럽기까지 했습니다. ③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걸고 그를 믿고 따라다녔는데 모든 기대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허탈감이 엄습해 옵니다. ④ 주님이 떠나고 난 다음 어떤 핍박의 세력이 몰려올지 모르는 커다란 공포감이 저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얼굴이 눈에 그려지십니까?
그러므로 이 날은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이었고, 그 날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날입니다.
이날은 슬픔의 날이요, 그 날은 기쁨의 날입니다.
이날은 고난의 날이요, 그 날은 영광의 날입니다.
이날은 주님이 잡혀 죽으시는 날이요, 그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비록 내가 너희들 곁을 떠나 없을 지라도 어떤 당황된 일이나 힘든 일이 있어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즉시 시행하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슬픔의 날에도 기도할 수 있고 기쁨의 날에도 기도할 수 있느리라. 고난의 순간에도 기도할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서도 기도해야 하느니라."
주님의 고별 설교 가운데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씀이 일곱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 말씀에서는 그 때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이루겠다는데 왜 불안해 하느냐? 기도는 능력과 기적을 가져다 줄 터인데 왜 낙심하며 허탈해 하느냐?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룰 것이요 너희에겐 근심이 변하여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기까지가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III. 구하라 - 아이테오
신구약 성경에는 '구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적어도 열 일곱가지 이상이 나오는데 신약성경에서만도 열 한가지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어휘 부족으로 이 모든 동사를 '기도하다. 구하다'라는 한가지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단어 몇을 찾아봅니다.
1. 데오마이 (δεομαι)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자라는 부분을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성령의 기름이 떨어졌나이다. 기름을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했다면 데오마이입니다.
2. 디오코 (διωκω)는 "이루어질 일을 재촉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이 백성을 회복하실 그 날이 언제 입니까? 속히 내 백성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기도했다면 디오코입니다.
3. 재태오 (ζητεω)라는 말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주여, 첫 사랑을 잃어버렸나이다. 찾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면, '주여 직장을 잃었습니다. 더 좋은 직장을 찾게 해 주십시오' 기도했다면 재태오입니다.
4. 유코마이 (ευχομαι)는 "묻다, 문안하다"라는 뜻이고.
5. 에로타오 (ερωταω)는 "의논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어디로 갈까요, 무엇을 할까요.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물었다면 에로타오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한다고 했을 때 바로 이 "에로타오"라는 말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는 하나님과 의논하는 기도였습니다.
6. 마지막으로 아이테오 (αιτεω)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에서 일곱 번 등장하는 구하라는 말은 아이테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강요하다, 탄원하다, 떼를 쓰다"라는 말입니다. 어린 자녀가 아버지께 떼를 쓰듯 간청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애원하는 차원을 말합니다.
이 말은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히 찾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광적으로 허덕이면서 소리를 지르며 찾는 것을 말합니다. 목마른 한 마리 사슴이 물을 찾아 부르짖는 외침을 말합니다. 사슴은 원래 그 자태부터 신사처럼 생겨 평상시에는 점잖고 조용해서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을 때는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어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데에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 무엇이든지 구하라 - 아이테오 - 떼를 쓰는 기도를 하라고 요청!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할 수 없나이다.' 부러진 환도뼈를 질질 끌면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애원하는 야곱의 기도가 '무엇이든지'의 기도입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여호수아의 담대한 기도가 바로 '무엇이든지'의 기도입니다.
IV. 우리의 상황 :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인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여러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기도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기도가 없이도 이 험악한 세상에서 과연 당당하게 승리하며 살수 있더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도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진흙 밭을 뒹구는 한 마리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지요. 구원받은 성도라도 날마다 웃고만 살 수는 없는 상처투성이의 인생임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낙심과 상심, 허탈과 공포, 불안과 착잡함. 이 제자들의 모습은 곧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질병과 사고, 배신과 기만, 참을 수 없는 울분과 억울함, 바로 살아보리라 다짐했던 결심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가는 영적인 실패와 타락, 큰 일에 당황하고 작은 일에 번민하는 인생의 허약함. 이 어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인생의 살벌한 경쟁대열에서 낙오자가 되어 이리저리 밀리고 있다고 느낄 때 겪어야하는 수치감과 패배감은 또 어떻게 치유될 수가 있었습니까? 한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저들이 어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얼굴이 바로 주님 앞에 근심된 얼굴로 앉아 있는 당시 그 제자들의 얼굴이 아닙니까?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권면하십니다. 아이테오 - 차라리 떼를 쓰라는 겁니다. "낙심 중에 있는 제자들이여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어 주겠다. 즉시 시행하겠다. 그 때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승리하게 되리라. "할렐루야!
비행기안에서 5살 정도의 한 소녀가 재롱을 피우며 승객들 사이를 오고 갔습니다. 워낙 귀엽게 생긴 아이가 재롱을 피워서 초콜렛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또 긴 여행이라 뒷자리에서 모여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춤을 추기도 하고 엄마 아빠가 어디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승객들 가운에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한참 지났을까요. 기류가 이상해지고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던 엄마를 부르며 달려갑니다. 엄마....! 엄마 품에 왈칵 안겼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삶의 이상한 기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정공동체에 민족공동체에 역사전체에 기체가 흔들리는 충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달려들어가야 할 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만날 때마다 달려갈 품이 있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품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철없는 어린아이에겐 때를 쓸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달려갈 때마다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품어주시는 자비로우신 그 분의 품, 역사의 운행자가 되시며 만왕의 왕되신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박대했지만 언제나 박대하시지 않는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싼 삶의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에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입니까? 집안이 기울어져 갈 때에, 사업이 어려워 질 때에,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에, 내 앞 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기도! 기도가 길이었습니다. 기도가 방법이었습니다. 기도가 최선의 해답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하고 나면 기도보다 더 귀한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V. 기도는 사역이다
때문에 기도는 어떤 일을 이루는 한 가지 방법만은 아닙니다. 사역의 준비가 아닙니다. 기도는 사역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교회학교 교사에게 가장 위대한 사역은 가르치는 순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어린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될 때에 이미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들의 경우에도 맡겨주신 귀한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그곳에 가장 위대한 사역이 지금 베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의 시작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기도로 내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내가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사역은 기도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무서운 적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면 성공 때문에 망합니다. 실패가운데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실패에 내가 빠져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 눈에 내가 실패자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할 수 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실패가운데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면 분명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많은 장을 할애하며 "시온의 회복"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백성들이 지금은 신음하고 있지만 저들의 신음소리를 내가 들었다. 저들의 시온성을 내가 회복시켜 줄 것이다." 지금은 저들이 끌려가 피흘리며 신음하며 고통 가운데 빠져있지만 내 백성들이 시온성을 향하여 돌아오게 될 것이다. 시온을 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36절에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시온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황폐하고 황무한 그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다.
그 다음절에 이어지는 37절을 경청해 보십시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주시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내가 시온을 회복한다!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참으로 묘한 대목이 아닐는지요. 하나님께서 시온을 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면 회복시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면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내려 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 기적을 맛보게 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도" "내 백성이 내게 나아와 기도해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시온의 회복을 이루는 방법은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회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왜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왜 우리가 기도하기까지 시온의 회복을 늦추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이미 시온의 회복의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왜 우리가 기도하게 하십니까? 왜 야곱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시고 하나님을 붙들 때에 그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시고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약하셔서 우리의 기도의 힘이 필요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시온을 회복했음을 절실히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진 삶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한 한 정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약속해 놓은 것을 이루는 성취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로 얻은 모든 삶의 성취 앞에 겸손해 집니다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VI. 무엇이든지의 특권
기도! 라고 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묻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오늘 본문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 무엇이든지 구하라!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을 때 사실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기도의 본질을 깨뜨리는 말입니다. 언제나 기도에는 기도하는 바른 정신이 있고 바른 자세가 있는 것이지요. 기도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과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정욕을 위해 구하는 기도는 구해도 얻지 못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진실한 고백 없이 어찌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구하는 태도는 성경 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든지 구하는 이 기도는 기도의 원칙과 정신을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기도는 분명 좋은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무엇이든지"라는 이 한마디 단어 속에 지금 상심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커다란 위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생의 큰 문제에 부딪쳐 본 사람은 기도의 논리나 질서보다 더 큰 무엇이 있음을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떼를 쓰는 아이는 논리나 예의를 갖출 겨를이 업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동안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 은총을 더듬어 보며 감사하며 주님의 향기로운 이름을 부르며 그 분과 대화하는 아름다운 기도의 그 멋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찢겨진 가슴을 안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에는 그저 흐느껴 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깊은 상처를 받아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잃을 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죽은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리 주님은 미사여구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만물이 약동하는 새봄입니다. 저기 한 그루 나무도 움을 키우고 있건만 사랑하는 나의 친구 나사로는 죽음에 옷을 입고 여기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지여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흐느껴 울며 주님께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나사로야 일어나라!" 절규하듯 외치셨습니다.
무너져 가는 사업을 붙들고 몸부림해 보신 경험이 있었습니까? 무서운 공포와 불안에 휘말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이 얼마나 기도의 자유를 주는 말씀입니까? '무엇이든지!'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마음껏 주님 앞에 부르짖어 아뢸 수 있는 '무엇이든지'의 권세, '무엇이든지'의 특권을 여러분 알고 살아가십니까?
'무엇이든지' 그것은 우리 기도에 무한한 날개를 주는 말씀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기도에 신비를 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신비가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산을 옮긴다.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먹었다. 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기도는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리하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도리어 행복이 되리라. 」
우리는 지금 새벽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부터라도 결단하고 일어나십시오. 무슨 문제든지 가지고 나오십시요. 누구든지 나오십시요. 모두 다 오십시오. 함께 기도하십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바로 앞에 한 가지 ?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러분의 '무엇이든지'가 바뀌어 분명 '도리어'가 될 것입니다.
VII. 도리어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호세아서 2장 15절에는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험한 골짜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나그네가 강도를 만났던 현장이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 "아골"이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어로 "고통"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다윗은 아골 골짜기를 말할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라고
시편 84편에서는 "눈물의 골짜기" 라고
여호수아서 7장에서는 "패망의 골짜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살이 가운데 수많은 아골 골짜기가 있습니다. 재난의 골짜기, 실패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 이별의 골짜기, 병고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 수많은 아골 골짜기가 우리 앞길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서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루살렘까지 가려면 중간 아골 골짜기 옆에 아이 성이라는 조그마한 성을 지나야 했습니다. 여리고 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성입니다. 군대도 별로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점령한 우리가 아이 성 쯤이야"라고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고 군대 3천명을 보내서 아이 성을 점령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 군대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왜요? "여리고 성을 점령하되 거기 있는 모든 양이나 소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라" 누구도 개인이 가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간이라는 사람은 욕심이 생겨서 옷 한벌과 은 2백 세겔과 금 50세겔을 몰래 훔쳐 숨겨 두었습니다. 이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대패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체포해서 아골 골짜기에서 처형을 합니다. 그리고 장물들을 다 불태웠습니다. 아간의 범죄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속죄의 제물을 올렸습니다. 그제서야 아골 골짜기가 희망의 문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두고 호세아는 말합니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기도하면 아골 골짜기가 도리어 소망의 문이 되리라"
우리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처참하게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골 골짜기를 통과할 때 범죄한 아간을 처형한 것처럼 오늘 우리의 죄악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때 아골 골짜기가 도리어 희망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126편 첫 서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물리칠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여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 나라의 새 임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고향 땅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무려 2,000km가 넘습니다. 꿈과 희망, 기대를 가지고 고향 땅에 와 보았지만 너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이 다 황폐화되었습니다. 밭들은 70여 년 동안 개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돌작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메마른 사막과 같은 황막한 땅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이런 땅을 개간해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서 이주해 올 때에 가지고 온 양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2,000km 넘게 오는 동안에 모든 양식은 소비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종자 씨앗들 조금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비록 종자 씨앗이라도 죽을 끓여서 먹어야 될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이 종자 씨앗을 먹지 아니하고 땅에 뿌립니다. 그러면서 노래한 시가 시편 126편 5절과 6절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라.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 당시 시대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밀, 보리 씨앗을 삶아 주지 않고 그 종자 씨앗을 가지고 밭에 나가서 어머니인 자기 자신도 울면서 씨를 뿌립니다. 배고파하는 어린 자식의 입에 넣어야 할 그 씨, 그러나 지금이 문제가 아니고 내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울면서 그 씨앗을 땅에 뿌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성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내일을 바라보면서 씨를 뿌리는 정신입니다. 배고파 밥달라 우는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아버지는 피를 토하고 피를 뿌리는 마음으로 씨를 뿌립니다. "아가야, 사랑하는 아가야 이 곡식 자라 열매 맺으면 배부르게 빵을 주마. 그때까지 참자 기다리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배가 고프십니까? 아프십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내일 새벽부터 눈물의 기도의 씨를 뿌리십시오.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요. 반드시 당신의 삶은 멋지게 역전될 것입니다.
구 소련이 거대한 미주화 불결에 밀려 자유 민주 국가로 달려 가던 때에 위기를 느낀 공산당과 군부 지도자들이 수많은 탱크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광장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뻥뻥 대포소리, 요란한 따발총 소리는 가히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가가에 충분했습니다. 시민들은 허탈해 합니다. 그동안 피흘린 댓가가 이렇게 무참히 짓밟히고 만단 말인가? 두려움에 떨던 젊은들이 집으로 산으로 하나 둘씩 숨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였습니다. 모든 희망이 끝날 그 시점이었습니다. 한 젊은 신앙인 한 사람이 탱크 부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그 뒤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또 한사람 또 한사람... 탱크 부대는 이 기도하는 젊은이들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짓밟지 못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 장면을 사진으로 싣고 타이틀 제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소련 공산당의 탱크는 기도하는 한 젊은이를 넘지 못했다」 - 기도는 절망의 광장에 희망을 가져왔다. 기도는 포기했던 시민들의 감슴에 새 나라를 선물했다. 기도는 도리어 승리를 안겨주었다. -
"눈물의 씨가 도리어 기쁨의 단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6장 20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0절과 22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 그것은 예수님 자신도 고통스럽고 제자들에게도 근심과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해서 인류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체 인류사회를 바라보면 그 이상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함으로 인해서 그 당시의 사람은 근심거리였지만 그 다음 인류에 대해서는 기쁨이 된 것입니다.
사순절! 이 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경건한 성도들, 참된 성도들은 모두 이 때를 기도하는 때로 보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십자가가 도리어 부활이 됩니다.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됩니다.
문제가 도리어 축복이 됩니다.
불행이 도리어 행복이 됩니다.
실패가 도리어 성공이 됩니다.
패배가 도리어 승리가 됩니다.
VIII. 맺으며
오래전 미국의 한 제재소 직원이 아침에 출근했더니 책상이 없어졌고 한 장의 편지가 놓여있는데 해고 통보였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습니다. 젊음을 바쳤던 직장인데 복수심이 이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경리과에서 받은 봉투 한 장을 들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몸을 맡겨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자기는 자살할 수밖에 없다고 몸부림 해 보지만,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다고 친구를 만나보고 발버둥 쳐 보았지만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 때 아내가 남편의 손을 꼭 붙들고는 "당신은 친구도 만나 보았고 당신의 재주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몸부림 해 보았지요. 그리고 방황도 했고 길도 찾아 보았어요. 그러나 당신은 한가지 안해 본 게 있어요.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 보지 않았지요. 여보!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지 않으실래요?"
'그렇다. 친구를 만나보았지만 나는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다. 세상의 길을 찾아 보았지만 하늘 길을 두드려 보지 못했다. 앞이 막혀있고 뒤가 막혀있고 좌도 우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막혀있지만 하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내가 깨닫지 못했구나. 기도하지 못했구나.'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복수심은 사라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를 향한 원망은 사라지고 새로운 지혜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조그마한 빌딩 하나를 짓기를 작정했습니다. 5년후에 작은 자영사업가가 되었고, 이도시 저도시를 사업차 뛰어다녀 보니까 미국내에 좋은 호텔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호텔은 너무 비쌌고 작은 호텔은 너무 추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값이 싸면서도 친절하고 깨끗한 호텔을 내가 지어야 되겠다. 그가 바로 "케몬스 윌슨" 세계적인 호텔 체인 홀리데이인 업체의 사장 회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포기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절망하십니까? 이제 접어두었던 기도의 제목을 다시 펼치기로 하십시다. 덮어 두었던 성경책을 다시 펼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기로 하십시다. 길이 막혔다고 절망하지 말고 하늘 문을 두둘겨 보기로 하십시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당신의 '무엇이든지' 기도는 삶을 역전시켜 '도리어'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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