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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에 먼저 온 사람들 2002-01-06 18:31:32 read : 12637
2001. 3. 11. 마태복음 19:30 - 20:16
어느 과학실험실에서 어떤 연구를 하다가 독성물질이 알사탕처럼 동굴동굴 굳어졌습니다. 그것을 좀더 연구를 해야 되겠다 싶어서 병에 가득히 담아두고 누가 만지거나 또 먹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병에 DANGER - 위험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 실험실에 민건동 목사가 잠깐 들러갔습니다. 병안에 알사탕이 들어있고 DANGER이라고 써 있지 않겠습니까? DANGER - 단거 - 단 것을 좋아하는 민목사 그 사탕 같은 걸 먹어 버렸습니다. 아마 이쯤되면 한 열 번쯤 죽었겠지요.
DANGER - 위험이란 말이지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어설프게 알면 코다칩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주의 일 하는 사람들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해야 합니다.
옛날 유대나 로마 사회에서는 직업을 구하는 품꾼과 일꾼을 구하는 고용주가 만나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무대는 여기 포도원 농장의 인력시장입니다. 이스라엘은 기후로 인해 과일이 자라기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등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포도나무는 참으로 풍성했습니다. 「시누헤의 이야기」라는 문헌에 보면 "이스라엘에는 포도나무가 무성하여 포도주가 물보다 많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무대위로 올려 보십시다.
무대의 막이 열려지면 인력 시장에 자신들을 써줄 농장 주인을 기다리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웅성 웅성 모여 있습니다. 고용주가 어쩌다 한사람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건장한 자신의 체구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아예 매달려서 나를 써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침 품위 있게 생긴 한 농장 주인이 나타납니다. 때는 이른 아침 6시 일꾼 몇을 골라 농장으로 갑니다. 품삯을 정하는데 한 데나리온 - 불경기에 그만하면 넉넉한 삯이었습니다.
무대가 바뀌어집니다. 포도원 농장에서 땀을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 다음에 일꾼들이 어디서 왔는지 아침 9시, 오전 12시, 심지어 오후 3시, 5시에 어그정 어그정 나타나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후 6시 하루 일과가 끝나고 품삯을 받는 시간입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입니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기다리는 자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녁식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제일 먼저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즉 하루 품삯을 다 줍니다. 일찍 온 사람들의 얼굴에 잔뜩 기대감이 흐릅니다. '이것 봐라 우리에겐 한 데나리온 준다고 했는데 훨씬 많은 삯을 주겠구나' 그런데 오전 일찍 온 사람들이나 오후 늦게 온 사람들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 삯을 줍니다. 이곳 저곳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건 불공평한 처사라고 항의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이때 농장 주인이 나타나 알듯 모를 듯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무대 막이 내려집니다.
"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많으니라 "
그래서 이 극의 제목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 입니다.
본문을 읽을 때 이런 의구심을 한번 가져봅니다.
주인 좀 지혜롭게 일찍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주고 돌려 보내고 그리고 낮에 온 사람들에게 또 한 데나리온 줘서 돌려 보내고 오후 느즈막이 온 사람들이 몇푼 받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 주었다고 하면 모두가 감사할 수 있을 터인데 왜 긁어 부스럼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을 부르더니 한 데나리온 줍니다. 잔뜩 기대감을 부풀려 놓고 그 다음사람에게도 여전히 한 데나리온 씩을 주니 불평이 터져나올 수 밖에요.
왜 이렇게 일을 처리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초점은 먼저 온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퇴색을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마태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나중될 자가 많다고 말합니다.
사건이 전개된 다음에 제일 마지막 본문입니다. 마태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나중 되리라. 반드시 나중 된다. 나중 될 무서운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온 사람들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메시지란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이 불평에 동정하며 본문을 억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먼저온 사람들은 새참타령이나 하고 빈둥빈둥 놀면서 일을 했고, 나중온 사람들은 죽을뚱 살뚱 일을 했기 때문에 일의 분량이 비슷해 졌을 것이라고.
그러나 부질없는 해석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면 본문의 밑바닥에 흐르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그 시간부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자기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소중한 자리에 앉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분이 문득 나타나 가난한 자가 천국에 더 가깝다. 죄인들도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유대인들만 구원받는 것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더욱더 풍성한 구원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먼저온 너희들이 나중되고 나중온 이방인들이 먼저될 수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러면 여기 포도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혹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 하나님 나라, 교회에 들어가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한사람은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사람은 포도를 따서 담습니다. 한사람은 나뭇가지를 붙들고 한사람은 막대를 밑에 고여줍니다. 서로 협력하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돌봐주며 일하는 공동체 - 거기가 포도원 공동체입니다.
기독교 지난 2000년 역사만 돌이켜 보더라도 구약을 제외하고 우리민족은 막다른 골목에서 부름받은 민족입니다. 오후 5시 해질 녘에 불려온 사람들입니다. 아무래도 역사에 해가 지고 있는 종말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포도원 주인되신 주님께서 우리민족에 찾아오셨습니다. "어찌하여 종일 길거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만 있느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농장에 들어가 일을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5000년의 잘못된 삶을 묻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지난날 허송세월했던 흘러간 세월을 주님 묻지 않겠다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가 저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질녘 역사의 종착점에서 부름받아 구원받았다. 세상의 r적이 많지만 내가 구원받았다는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불러서 한 데나리온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나도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고 영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천국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울며 울며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는 죽을뚱 살뚱 일을 해도 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가 서산에 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천국 데나리온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포도원에서 일꾼들이 어떤 일을 했을까요?
1. 가지치기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전에 영양분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도록 한 곳으로 집중되어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잔가지를 쳐주는 일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 연한가지, 퍼진 가지를 짤라주어야 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공동체 삶이 무엇입니까? 중요한 일, 소중한 일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매없는 세상일에 기웃거리지 않는 일입니다. 이게 포도원 농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거리들입니다.
2. 받침대 세우기
가지가 하늘을 향해 제대로 뻗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거기 열매가 맺히면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맛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인이나 공동체도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3. 망대 만들기
도적이 와서 익은 포도열매를 따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동물들이 와서 포도원 농장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사단의 침투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서로 세워주고 서로 돌봐주고 서로 지켜주는 일입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함께 승리해 가는 행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4. 수확하기, 열매따기
포도를 수확할 때 농부와 일꾼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외칩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열매 따는 기쁨이 있느냐는 말이죠? 신앙생활이 조직이 아니고 의식이 아니고 율법이 아니고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 아름다운 축복, 행복의 열매, 감사와 기쁨의 열매를 맛보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일꾼들이 포도원에서 일을 했다고 하면 이 네가지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행복한 일을 하다가 먼저 온 사람들에게 불평이 생겼습니다. 원명이 터져나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경고의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곧 먼저 와서 나중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 간사하고 사악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온 사람들이 모두 불평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침 6시에 와서 왠종일 일하고 오후 5시 느지막에 와서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에 불평하는 것은 또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오후 3시 느지막에 온 사람이 "내가 오후 5시에 온 사람하고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넋두리를 합니다. 막차 탄 나보다도 더 연약한 성도들,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 그들 때문에 내 신앙이 불평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 때문에 내 행복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게 사악한 인간의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들의 일하는 태도, 신앙생활의 자세에 있어서 잘못된 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오해한 것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중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이걸 알아야 나중 왔다가도 먼저될 수 있고 먼저온 축복을 잃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강해 설교가로 잘 알려진 제임스 보이스라는 사람은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의 결정적인 잘못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무엇인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채권자 의식에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채무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빚을 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뭔가 갚아 주어야 할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빚진자들 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먼저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나는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로 의식, 채권자 의식 이것보다도 더 비신앙적인 비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없습니다.
이 공로 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공로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교회생활 중 낙심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채권자 의식입니다. 자기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하는 자기 업적을 마음 속에 기록해 놓고서 "이런 업적을 세운 나를 무시하다니" - 자신의 공로만큼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괴롭고 자신이 비참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하는 공로 의식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봉사의 기록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록만이 가장 정확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무리 높이 높이 올려놓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 주여~ 주여~ 하고 신앙생활하던 사람들 가운데 버림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습니다. 귀신을 좇아 냈습니다 하는 사람들 가운데 버림받는 장면이 마지막 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호주 멜보른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에 종이 쪽지가 한 장 올라 왔습니다. "박사님, 저는 이것은 참 옳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기도제목이 하나 있어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지 않는 겁니다. 저는 3대째 장로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25년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직했습니다. 20년동안 교회 장로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런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토레이 박사가 한마디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뭔가를 해 주어야 된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로를 내세워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채권자 의식, 공로 의식을 말살하기 전까지는 당신의 기도가 절대로 응답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이 말 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 찾아나올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 한마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존재가 우리 모두 아니었습니까.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의 이 채권자 의식은 금방 하나님과 뭔가를 흥정하려고 하는 흥정 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우리가 포도원 생활에서 버려야 할 태도, 자세 - 먼저온 자들의 잘못은 바로 "흥정 의식" 입니다.
오늘 본문의 또 다른 배경이 오늘 본문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을 버렸습니다. 가족과 친지들을 버렸습니다. 주님 그런데 우리들에게 뭘 보상해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보상이 있다.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가 많으니라"고 주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보상을 안 주겠다는 것 아닙니다.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단순히 어떤 보상만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을 섬겼다면 이건 분명히 일하는 동기가 변질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선후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일하는 동기가 맑고 깨끗하냐를 묻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에 진정한 감사가 있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할 때에 너희들 가슴속에 기쁨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일의 분량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질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품꾼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당시 아주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품꾼이란 글자 그대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들은 로마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적인 악조건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고용해 주지 않는다고 하면, 누군가 내게 품삯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굶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내 처자식도 굶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름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할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나를 불러준 주인 앞에 감사할 수 밖에요. 불평이라니요. 자기존재의 자리를 위치를 망각한 처사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더란 말입니다. 오늘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끝장내도 어쩔 수 없는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면 버림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 여기에 감사외에 또 다른 무슨 흥정이 필요했습니까?
주인의 얼굴만 봐도 감사하고 써주신 그분의 은혜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처음부터 불평하고 일터에 간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감사했을 겝니다. 주인의 손을 붙들고 고맙다고 인사도 했을 겝니다. 그러나 일을 진행하는 가운데에 후배들이 생긴 겁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선배 의식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으신 분들은 이 흥정의식, 동기의 변질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과 첫 사랑을 맺었을 때에는 무엇을 해도 감사하고 작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은혜가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갈 수록 동기는 변질되었습니다. 올바른 동기가 결핍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쁨이 불평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감사가 원망으로 끝나버리는 실패하는 인생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생활에서 옳지 못한 태도 즉,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의 오해는 이웃과의 비교 의식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을 낙담케 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침 일찍 일꾼들을 함께 불러서 하루종일 똑같은 일을 시키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뒤늦게 온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대접을 받고 있다는데 대한 시기심, 비교 의식이 생겨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다가 불행에 빠지곤 합니다.
한 학교 교실에 아주 잘 생겼는데 얼굴이 까맣게 생긴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자리에 아주 예쁘고 하얀 얼굴을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얀 아이는 까만 얼굴이 예쁘다고 얘기하고, 까만 아이는 하얀 얼굴이 부럽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까만 아이가 자꾸 하얀 아이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얼굴이 하얘질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래서 나도 잘 모르겠는데 표백제로 한번 씻어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잘 때마다 표백제로 얼굴을 닦고 잠을 잤는데 더 얼굴이 새까매지는 겁니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표백제 광고를 보니 '흰옷은 더 희게 색깔 옷은 더 선명하게!'
왜 비교하다가 불행해 하십니까? 비교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처럼 하나님 앞에 살고 너는 너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은혜가 있고 너는 네가 받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60억 인구를 줄이고 또 줄여서 똑같은 비율로 줄여서 100명을 만들었다면 어떤 사람들이 지구에 살까? 스텐포드 의대에 "필립 하츠 박사"가 재미있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60억 인구를 100명으로 줄여서 다른 인종들, 또 다른 문화적인 배경들, 또 다른 교육수준이 있는 사람들을 한 마을에 불러모아 보았습니다.
57명은 아시아인, 21명은 유럽인, 14명은 미주인, 8명은 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였습니다. 70명은 비기독교인 30명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20명만 자기 집에서 살았고 80명은 적정수준이 미치지 못한 주거환경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100명 가운데 70명은 글을 알지 못하는 문맹, 절반에 미치는 50명은 영양부족을 겪고 있었습니다. 1명은 앓고 있거나 죽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100명 가운데 1명만이 대학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식으로 생각해 나가다 보면 내 집에 살고, 먹을 게 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기아의 괴로움 등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세계인구 상륙 500만명 중에 1사람이 되는 겁니다. 만약 고통, 체포, 고문, 심지어 죽음의 공포없이 매주 교회를 다닌 사람이 있다고 하면 특별한 행운아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에 입을 옷이 있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는데 잠 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의 사람들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은행에 약간의 돈이 있어서 내 아이가 아플 때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고 내 지갑속에 약간의 돈이 있어서 그걸 끄집어내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구상에선 상위 8%의 부자에 속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만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너는 행복자로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교하다 불행해 지는 대신 감사하며 행복해 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일찍온 노동자들은 남들과 비교하다가 행복과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슴속에 경쟁 의식, 비교 의식이 있습니까? 아니면 동업자 정신, 동력 의식이 여러분 가슴속에 있습니까? 오늘 교회 교인들의 가장 가슴 아픈 치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곧 "함께 일하는 정신" "서로 인정하는 정신" 말입니다.
내가 나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여하에 따라서, 내가 이웃을 어떻게 보느냐 여하에 따라서, 나는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불행한 삶을 살아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유리창을 "쨍그렁"하고 깼습니다. 서무과장이 달려나오더니 "이 놈아! 이 큰 유리 한 장에 값이 얼마인 줄 아느냐?"라고 말합니다. 훈육주임이 달려오더니 "교실에서 누가 장난 치라구 그랬어?"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질타이지요. 담임 선생님이 달려나오더니 아이의 손등에 흐르는 피를 움켜쥐고서 "많이 다치지 않았니? 놀라지 않았니?" 똑같은 사건인데 관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서 비교하다가 불행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은혜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 나중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나를 불러준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격보다는 내 이웃을 바라보면서 내 이웃이 나와 같이 잘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주인의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나보다 더 연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께 사랑받는 것을 마음으로 기뻐해 주지 못하는 옹졸함, 왜소함이 우리의 가슴이더란 말이지요.
일찍온 사람들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내가 만약에 아침 일찍 부름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살아갈 때에 어떤 신앙과 어떤 관점을 가질 때에 내가 승리하는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저 사람은 한 데나리온 받는데에 나는 두 데나리온 받는데에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다. 늦게 온 사람도 같이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을 보고 할렐루야 찬송하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 받는 그 사람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오히려 불평하고 넋두리하는 사람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게 우리의 마음입니다. 포도원 공동체 속에서 가족 의식을 잃어버렸을 때 이런 악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후 늦게 부름받은 그 사람이 내 자녀라고 생각해 보세요. 내 남편, 내 아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은 간단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구원받을 수 없고 은혜 받을 수 없고 은혜받을 수 없는 자식이 하나 있는데 5시에 포도원에 불려왔습니다. 그 자식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 어머니는 눈물 흘리며 감사했을 겝니다. 그 아버지는 할렐루야! 춤을 추며 감사했을 겝니다. 내가 덜 받는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목장 목원들이 누리는 은혜 때문에 내가 기뻐할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지금 천국에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내가 행복할 수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이미 천국의 행복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고안하신 교회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땅에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조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기업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학교, 기업, 조직속에서는 경쟁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는 비교 의식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는 특권 의식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요. 교회는 조직이 아니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천국가족의 아름다운 관계를 얼마만큼 회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비교해도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경쟁의식을 가져도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양반 의식을 가져도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포도원 공동체는 아름다운 천국 공동체입니다.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에 천국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때에 너의 슬픔이 나의 눈물이 되어 흐를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불평도 원망도 시기도 질투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뒤늦게 불려온 내 가족이, 뒤늦게 불려온 우리 목원들이, 나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 - 구원받고 용서받고 천국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 포도원 공동체는 천국을 이루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포도원으로 들어오너라. 종말을 준비하라. 구원을 준비하라. 말씀하십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 한소망교회의 문을 열었을 때에 여기에 아름다운 포도원 공동체, 가족 공동체, 생명 공동체, 천국 공동체를 이루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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