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작은 여우를 잡으라 2001-12-28 20:59:40 read : 12067
본문 : 아2:10-17
미국 학교의 학생 훈육지도의 대상을 보면 40년대와 90년대 완전히 달랐습니다. 1위는 순서를 지켜 말할 것(90년: 마약하지 말 것), 2위 껌을 씹지 말 것(술을 절제할 것), 3위 시끄럽게 떠들지 말 것(임신만은 피할 것), 4위 복도의 질서를 지킬 것(자살하지 말 것), 5위 새치기하지 말 것(강간을 조심할 것), 6위 복장위반하지 말 것(강도질하지 말 것), 7위 휴지를 버리지 말 것(폭행하지 말 것)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아이들뿐 만 아닙니다. 부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년 동안 세 쌍이 결혼한다면 한 쌍이 이혼하는 통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위기, 왜 그렇습니
까? 사실 매우 작은 요인들 때문에 가정들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사실 가정이 큰 문제로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반찬투정 한번 투정했다가 무너진 가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한 말 "오늘
반찬이 왜 이 모양이야?" 그랬는데 이혼 한 것입니다. 아내는 이 말이 자기의 자존심을 건
드리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두 마리의 사나운 개가 고양이 한 마리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그 고양이는 아주 자그마한
고양이었습니다. 그 가엾은 아기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었고, 두 마리의 개는 그
고양이를 쫓고 있었습니다. 보다 앞서 추격하는 개는 큰 개였고, 그 뒤에는 작은 개가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도망가던 아기 고양이는 광장 난간 사이의 공간을 발견하고는 그
곳으로 올라가 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난간을 뛰어 올랐습니다.
그때 그 큰 개가 바짝 쫓아 잡으려고 하였으나, 난간의 공간이 너무 좁아서 더 이상 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큰 개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자 아기 고양이는 안도의 숨을 돌리고 있었
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작은 개가 난간을 뛰어 올라 그 난간 사이로 고양이를 추격하였
습니다. 작은 개는 큰 개가 따라갈 수 없는 곳을 통과해서 그 고양이를 추격하였던 것입니
다. 아기 고양이에게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한 정원사가 이 사실을 알았고, 그
추격하는 작은 개를 몰아내었고, 그 아기 고양이를 감싸 안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때에 따라서 아주 작은 죄가 큰 죄보다도 얼마나 더 큰 위험을 가져다 주는
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 죄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는 들어올 수 없지만 작은 죄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서 들어와 큰 위험으로 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아가서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작은 여우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표현이 등장했습니까? 아가서는 잘 아시는 대로 솔로몬 왕과 촌녀 술람미 여인간
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위기를 넘어서서 부부로서 사랑을 성숙시켜나가
는 경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15절 말씀이 사랑의 위기를 겪을 때 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
음이니라" 여우라는 말이 본래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작은 여우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황야에는 많은 여우들이 기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포도농사를 망치는 원흉
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땅을 파고 구멍을 만들고 심지어 포도줄기를 갉아먹었기 때문입니
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 여우의 역할이 마치 마귀의 역할과 같습니다. 마귀는 희랍어 말로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무엇인가 던져서 사이를 가른다, 참소자, 이간자를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도 연하고 여린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어 자라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큰
여우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여우는 기어 들어와서 이제 막 영글어 가는 신선
한 포도송이를 다 따먹어 버릴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포도나무를 망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은 여우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순간에 가만히 들어오는 작은 죄를 의미합니다.
이 작은 죄는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다 큰 죄악으로 차츰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문을 꼭꼭 닫아 두었기 때문에 어떠한 거짓도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
고 장담하지만 조그만 틈 사이로 작은 거짓이 들어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큰 거짓으
로 자라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를 이간시키고 부모와 자녀 사이를 이간시키고 모든 아름다운 관계들을 파괴하
는 것, 이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그의 역할입니다. 틈새를 벌리는 일을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작은 여우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대에서의 일입니다. 순찰을 돌던 부대장 짚 수렁에 엑셀러레이터 수렁 운전병
군인들 사망자 시체 바퀴밑에 집어 넣어라-시체들이 살아났다는 것
가정을 파괴하는 환경에 도전해야 한다. 더 이상 가정이 깨지는 것 방치해서는 안된다.
오늘 저희들은 이 작은 여우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잘 준비하시고 멋진 여우사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을 위협하고있는 여우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첫째는 열등감이라는 여우입니다.
아가서1장5절-6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 지
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
구나"
여인의 열등감이 묻어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자
기 피부 색깔에 대한 열등감", 아마 포도원에서 일하는 가운데 이 여인의 얼굴이 검어졌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나를 흘겨보지 말라"
이것이 타인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에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했다" 그이유가 무엇입니까? 피
부가 검어졌기 때문입니다. 5절에도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
의 장막 같을지라도" 계달의 장막은 검은 염소가죽입니다. 내가 검은 염소가죽처럼 되었지
만 나는 아직도 아름답다고 항변하고 있는 깊은 열등감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가 열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열등감에서 자유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때로 긍정적인 열등감 때문에 열심히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병적 열등감입니다.
병적 열등감에 붙잡히게 되면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공격적이 됩니다. 또 사람들을 의심하
고 믿지 못합니다. 피부, 외모, 환경, 사회적 지위, 돈 등 숫한 열등감들 속에 붙잡혀서 인생
을 삽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부부 관계도 대체로 원만하지 못합니다.
사실 부부관계를 위협하는 공격1호가 열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치료
의 장소로 가정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열등감의 옷을 벗어버릴 수 있는 곳이기 때
문입니다. 성경에도 옷을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옷을 벗어야 열등감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부는 지나치게 존댓말을 하고 사십니다. 생리적인 현상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베란다에 가서 잠깐 해결하고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싸움을 할 때는 엄청난 전쟁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열등감의 치유장소가 가정이라는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교회도 아닙니
다. 직장도 아닙니다. 그래도 내 아내, 남편이요, 부모님이요, 자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
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부끼리 더욱 강한 열등감을 보입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미안하다는 말 한번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봅니다.
본문의 스토리도 이 여인의 열등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도 왕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
을 압니다. 그리고 회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고 심히 좋은 존재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자꾸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파괴시키고 기도 생활을
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열등감이라는 여우를 잡지 못하면 포도원이 쑥밭이 됩니다. 가
정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열등감이라는 여우를 잡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 잡아야 할 여우는 고독이라는 여우입니다.
아가서 3장1절에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
하였구나" 2절에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
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무슨 이야기입니까? 잠을 잤더니 남자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고독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결국 여인의 외로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잖아요?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독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해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가족을 주셨을까요?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부 되게 하시고 가정을 주신 가장 중요한 실제적 이유중의 하나
가 성경에 보면 고독에 대한 처방으로서 가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말씀에 보시면 '하
나님이 고독한 자로 가족 중에 처하게 하시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합창을 할 때 지휘자가 싫어하는 것은 튀어나오는 소리입니다. 모든 사람 소리에 섞여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소리, 이것은 안됩니다.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에 서로 튀
는 일은 금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상대방에게 어울려야 합니다. 힘도 어울
려야 하고 성격도 어우러져야 합니다. 혼자 큰 소리를 내면 하모니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너무 빠르거나 느려도 안됩니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함도 온갖 악기가 서로 어우러지
는 소리가 날 때입니다. 부부의 조화는 어울리는 소리를 낼 때입니다. 적당한 역할을 감당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힘있는 자만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힘에는 유연
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의 혈액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이라는 성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백
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병균)가 들어오면 얼른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백혈구가 그 침입자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큰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백혈구는 아주 강력한 어떤 방법을 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백
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력을 쓰지 않습니다. 대포도 기관총도 쏘지 않습니다. 그렇다
고 심한 욕설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백혈구는 그저 그 침입자를 품에 꼭 껴안아 버립니다. 아주 깊은 사랑으로 그를 감싸줍니
다. 침입자는 백혈구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냥 녹아버립니다. 참으로 백혈구의 사랑은 놀랍습
니다.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껴안아 줍니다.
적혈구도 백혈구처럼 사랑이 넘치는 친구입니다. 폐에 가서 산소를 받아들여 자기 몸에
가집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산소를 얻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적혈구는 언제
나 이런 생명의 산소를 풍성하게 얻어서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적혈구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산소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다 주고 나옵니
다. 자기 것도 조금 챙겨두면 좋을 텐데 100% 다 줘버립니다. 그리고는 4일쯤 살다가 비장
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백혈구의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는 사랑입니다.
적혈구의 사랑은 모든 걸 나누어주는 사랑입니다.
이토록 사랑이 넘치는 멋쟁이 친구들 때문에 우리 몸이 지금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
다.
제가 이렇게 강대상에 올라와서 보면, 부부가 나란히 와서 예배 드리시는 분들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성친구와 앉아서 예배 드리는 모습도 좋습니다. 손잡고 드려야 합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그 관계를 깨어 놓으려고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고후 7장에 보시면 부부의 관계의 중요한 삶의 원리를 성경은 강조합니다.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
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사탄에게 찬스를 주면 안됩니다. 부부가 떨어져있다 보면 얼마든지 시험에 들 가
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부부생활의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악착같이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악착같이 붙어 다닙시다."
우리의 가정의 포도원을 헐 수 있는 첫 번째 여우, 뭐라고 그랬어요? 열등감입니다.
주님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다, 이 여인은 왕이 자신을 받아주셨다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외롭게 갈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외롭지 않게 주님의 은혜
를 경험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잡아야 할 여우가 있어요. 그것은 대화의 결핍이라는 여우입니다.
5장2절 이하에 또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이렇게 시
작합니다. 3절에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무슨 얘기입니까? 신랑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잠들어있는 신부의 모습입니다. 잠을 자다가 억지로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일어나 보니 신랑이 보이질 않습니다. 6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러니까 일어나서 문을 열었을 때는 신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모습, 만나도 만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무엇을 말합니까? 같이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너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지으리
라' 그런데 돕는 배필, 여기서 돕는다는 단어를 "통할 수 있는 배필" 통할 수 있는 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부부는 통할 수 있는 짝이어야 합니다.
마음이 통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한 것, 그것을 위해서 부부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만약 부부사이에 마음이 통하지 않거나 대화가 안됩니다. 이것처럼 비극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대화는 자동적으로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됩니다. 노력해야 됩니
다. 시간도 함께 하고 또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보려는 노력이 대화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에 보시면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남편들에게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 남편보고 아내를 좀 연구하라는 말이에요. 남편은 아내에 대한 지식을 가져라, 요
즘 아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세요 남편들은? 아내가 왜 외로워하는지, 왜 마음 아파하는지,
우리가 부부 생활에도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좀 지식을 가지고 아내를 관찰해 보십
시요. 여러분의 아내를 아십니까?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요즘 왜 스트레스를 느끼고 왜 어려워하고 왜 고통스러워
하는지, 직장문제로 사업문제로 얼마나 그가 곤고해 하고 아파하는지 좀 아세요? 아세요?
서로를 알아보려고 하는 진지한 대화가 있습니까?
부부가 이런 진지한 대화를 잃어버리면 결국 가정은 여우가 판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남보다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부부에게 있어서 이 대화의 상실이라는 것은 매우 중
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정말 힘듭니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마치 메마른 사막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가정은 무엇입니까?
오아시스이고요, 부부의 대화는 바로 먹을 물입니다.
대화의 첫 번째 조건은 서로의 적대감과 장벽을 허물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입
니다.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서로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공통된 욕구들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사
랑이요, 둘째는 자기 존경이요, 셋째는 삶의 의미를 깨닫는 조화요, 넷째는 안정감이요, 다섯
째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욕구들을 얼마나 충족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질은 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욕구들은 혼자서는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서가 아니라 서로간에 이러한 것들을 충족받고 또 충족
시켜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원리를 알 때에 우리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며 살아갑
니다. 진실한 대화를 위해서는 서로간에 거짓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동시
에 서로간에 상대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숨기
려 한다면 대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반대로 상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만 받아들이려고 할 때에도 대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아담이 자신의 범죄를 끝까지 감추려
고 했다면 하나님과의 대화는 끊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두려워하면서도
"주여, 내가 범죄하여 숨었나이다!" 하면서 솔직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나타내었기에 하나님
께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대화가 없다는 것은 가장도 사막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아가서2장 1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명령사로 되어있어요. 영어 성
경을 보면 Let us catch, Let us catch, 우리가 함께 잡자!
이 여우들은 함께 잡아야 돼요. 남편만의 노력으로 안돼요. 아내만의 노력으로 안돼요. 부부
가 함께 노력해야 되요. 우리가 함께 이런 우리의 가정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헤치는 여우들
을 잡자! 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진실한 대화는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줍니까? 진실한 대화는 서로간에 삶의 의미와 진
리를 깨닫게 해주고 또 그것을 나누게 해 줍니다. 서로의 필요성을 충족시켜 줍니다.
3년 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11상을 수상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
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곡을 부른 셀리 디온이라는 가수가 갑자기 은퇴를 하였습니다. 그 은
퇴 이유가 감동적이었습니다. 디온은 무명시절 남편을 만나게되었습니다. 남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는 은퇴를 발표하던 날 회견장에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희 남편은 지금 후두암으로 투병중입니다. 남편은 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
금까지 많은 빚을 진 사랑하는 남편 곁에서 그에게 따뜻한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남편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날 기자회견은 감동의 드라마였던 것입니다.
대화- 말을 나누는 것에는 힘이 있습니다. 진실한 대화는 놀라운 깨달음을 줍니다. 서로
의 필요를 충족시켜 줍니다. 기쁨을 창조해 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깊은 마음과 영
혼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면서 부부가 함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
사냥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열등감의 여우를 잡으십시오, 외로움 고독의 여우를 잡으십시오, 대화의 결핍 여우를 잡으
십시오, 그래서 가정을 살리고 여러분의 영혼을 살리는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
 |
|
 |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  | Contact Webmast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