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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의 복음 2001-12-28 20:34:47 read : 12110
본문 : 요3:16-21
영국의 설교자였던 햄리 무어 하우스가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월요
일에서 토요일까지 그가 선택한 본문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한 주간도
그에게는 모자랐는지 모릅니다. 발원지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이 구절에 들어 있는 하나님
의 사랑은 아무리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습니다.
첫 성탄을 생각해 봅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예수께서 탄생하시는 바로 그 시간에 들판
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첫 번 성탄의 복음을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하
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성탄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성탄이 되면 하늘
에 영광, 땅에 평화를 생각합니다. 해마다 이 기원을 드려봅니다마는 남북 정상이 만나기도
했고, 세계 도처에 평화의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영광과 그 평화로부터 오히려 점점
멀어져 가는 요즈음입니다.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는 단순한 기구가 아니라 이것은 메시지
요 말씀으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는 어떤 통로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
게 됩니까? 이 땅에는 지금 평화대신에 많은 굴욕이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와 증오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자기를 증오하며 자포자기하고 자기 학대를 하다가
나아가서 이웃에게 포악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원인은 증오입니다. 내가 나
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
제의 해결은 사랑입니다. 동물은 음식만 먹고도 살 수 있지만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식었고 변질되었으며 타락하였기에 문제입
니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므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흘러 넘치지만 참사랑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교만에 빠져 있고, 이웃 사랑은 상업화하였
으며 사회 사랑이란 말은 정치적이고 처세적인 것으로 변질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니
참사랑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야 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
다.
사랑의 문제는 깊이 생각하면 이것은 곧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 없이 사
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 받지 못하고 살았다고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 말입
니다. 고아든 독신이든 빈부귀천 간에 사랑 없이 산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사랑을 믿을 수 없고 모르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이
웃과의 인간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도덕적으로도 이 사랑을 깨닫게 하
십니다. 우리는 이웃으로부터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도덕적으로 이
렇게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들에게 많은 관용과 사랑을 베푸셨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 잇는 것 아닙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우리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살아남을 자
가 누구이며, 죄짓는 현장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신다면 누가 살아 남겠습니까? 너그럽게 용
서하시고 사랑하셨으며, 덮어 주셨고 참아 주셨기에 우리 모두가 오늘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해서 용서받
을 수 잇습니까? 내가 얼마나 깨끗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많은
사랑과 긍휼과 인내가 있었기에 오늘도 우리가 성탄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몰랐고 사랑을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
하십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번
역을 조금 바꾸어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대로 사랑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
님은 여러분과 나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여건이 좀더 나으면 사랑하고 좀
더 깨끗해지면 사랑하고 더 의로워지면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
신다는 것입니다. 전부 사랑하면 진짜 사랑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부
다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하나
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높고 깊은,
넓고 긴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처럼의 사랑'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사
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할만하니 사랑하고 사랑 받을만한 존재가 되었으니 사랑한
다는 상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이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 방긋 방긋 웃고 잘 놀아 주면 아주 귀엽지만 계속 보채고 잠도 잘 자지 않으면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 아들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인내하며 사랑 받을 사람으로 교육하여 키워나가서 사람으로 제구실하기까지
그 희생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절대적이요 창조적이며 효과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이 세상의 가장 추악한 인간까지 다 사랑하시고 그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실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빠진 곤경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이길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
생하기로 작정하시고 이 아들을 보내셨읍니까?
1988년 겨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남쪽 바다에 살던 고래 두 마리가 알래스카로 올라갔
습니다. 알래스카에는 바다가 육지 안으로 깊이 들어간 만(灣)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래 두
마리는 먹이를 찾아 만으로 들어가서 고기를 배불리 먹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런데 유독 그 해에는 알래스카의 겨울이 빨리 찾아와서 얕은 곳에서부터 물이 얼기 시작하
더니 고래가 들어왔던 길목이 다 얼어 버렸습니다. 고래가 뒤늦게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입
구는 이미 얼어서 나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만 전체가 얼어서 고래가 동사
하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에스키모인 몇 사람이 큰 나무 기둥을
가지고 와서 고래가 나갈 수 있도록 얼음을 깨어 길을 뚫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TV 기자와 연결이 되어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본
격적으로 고래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1톤 트랙터를 이용해서 얼음을 깨는가 하면
헬리콥터로 5톤 짜리 시멘트 덩이를 위에서 떨어뜨려서 얼음을 깼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
서는 20톤 짜리 쇄빙선을 보내 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3주간 동안 어려움을 무릎 쓰고
100km나 되는 긴 얼음길을 뚫고서야 두 마리 고래를 바다로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고래들이 자기들을 살리려고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릎 쓰고 많은 돈을 들여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며칠만 늦으면 자기들이 얼음 속에 묻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만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자 약간의 위기감을 본능적으로 느끼기는 했겠
지만 사람들의 수고를 그들이 알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 없이 세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같지 않습니까? 죽음을 목전에 둔 고래들을 보면서 답답해하듯, 하나님께서는 멸망
을 앞에 둔 우리 인간들을 보시고 안타까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무
엇인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만에 갇힌 고래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때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곧 사랑을 안다는 말로서,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을 믿게 하고 알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분명히 있습니다. 벌써부터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믿게 하기 위하여, 즉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는 오셨습니다.
복음 성가에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실까? 왜 날 사랑하실까? 가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물
밀 듯이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면서 낮고 천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입니다. 하나님은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
해 태초부터 세상 끝 날까지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
이요 깊이입니다. 이 사랑을 증거 하려고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어 그 사랑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
이 복음의 핵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찬동하고
시인합니다. 내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단 말입니다. 그런
데 미숙한 인격의 사람은, 즉 고집스럽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좁은 채널 안에서
사랑을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나의 소원, 나의 욕망, 나의 이상대로 되어야만 하나님
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손바닥만한 것을 딱 내
어놓고 이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고 채널을 좁게 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2천 년 전 그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현장으로 말입니다. 그 당시 유대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지로서 속박 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저들의 하수인들이 마음대로 재물을
갈취하고 세금을 걷어내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차가 격심하여 굶어 죽
는 자도 많았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사람을 마음대로 사고 파는 노예제도가 있어 혼란이
극심했고 도처에 강도들이 우글거려 뺏고 빼앗기는 무서운 사회였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그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화 있을진저 바리새 교인들이여라고 책망하
셨으며, 또한 더러워진 성전을 뒤엎으시며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드느냐고
소리치신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위선, 교만, 외식은 목에까지 차 있었습니다. 제사장
가야바가 바로 예수를 잡아죽이는 사건의 원고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종교가 얼마나 부
패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
님께서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예
수님이 왕이 되어 주시기를 바랐고, 솔직히 말해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니
까 로마 사람들을 일시에 다 몰아내고 독립되기를 바랐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 위선적이고
거짓된 사람들이 벼락을 맞아 죽는,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그 날을 원했습니다. 경제적으
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말 메시야의 나라가 그대로 오기를 간절히 소원했었습니다. 얼
마나 끈질기게 원했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실망했다가, 부활하시니까 다시 찾
아가서 "나라에 임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라고 물었겠습니까? 그때까지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바랐습니다. 자 그러면 이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없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았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똑하고 성급한 가룟 유다가 능력도 있고 권능이 있으신 예수께서 자기들이 뜻대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시니 코너로 몰아서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느라고 주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예수께서 극적인 능력을 발휘하실 것으로 유다는 믿고 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그대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니 그도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입니다. 어느 면으로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정말 혁명적인 어떤 사건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고 어이없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복음은 여전히 복음대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죽은 사람 몇 명을 살려냈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니면 오천 명에게 빵 좀 먹였다고 경제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사랑입니까?
복음은 아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성과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것을 여지없이 다 드러
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멀리하지 말고 더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사랑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단지, 연약하여 죄에 빠질 때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
기 때문에 변명하거나 감추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할 때 주님이 또 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감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
가에 못박았습니다. 여기에 계속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속죄구령의 사랑이 있습니다.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근본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
님의 베들레헴 사건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
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십자가와 함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하고 고백했습니다. 독생자란 내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가문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생명은 곧 가문의 생명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이런 독생자까지 주시
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접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나의 소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심이 분명합니다. 비록 나는 가난하고 병
들고 실패해도, 아니 오늘 죽는다 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저
베들레헴 사건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가슴에 찡한 것이 전해져야 합
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그 뜻을
아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형수가 형 집행장으로 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는데, 울고 있는 어머니
를 향해 저주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죽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히는데, 아들이 욕을 하니 어
머니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들의 원망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
다.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한답시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못된 일에도 그저 잘했다고 치
켜 주었으니 결국 사형장으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했을 때에 왜 책망하지 않
았으며 때리지 않았느냐는 원망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직도 자기가 여기서 덜 행복한 것이 그렇
게 불쾌하고 기분이 나쁩니까? 여러분, 지금 나의 현실, 이 실패, 이 고통, 이 질병, 이 경쟁,
이대로가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에 있는
사건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이해인 시인의 기도문을 읽어봅니다.
손님 아닌 주님으로 당신을 맞을 마음의 방에
어서 불을 켜게 하소서
돌처럼 딱딱한 마음대신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당신을 보게 하시고
욕심으로 번쩍이는 어른 옷 대신
티없이 천진한 아기 옷을 입고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주의 말은 찬미의 말로 바뀌고
불평의 말은 감사의 말로 바뀌게 하소서
절망은 희망으로 일어서고
분열은 일치와 평화의 옷을 입으며
하찮고 진부하게 느껴지던 일상사가
아름답고 새로운 노래로 피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버리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헛되지 않도록 이 진리의 빛
으로 나아갑시다. 이 현실 이대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성탄의
사건이 내 안에서 현실화 할 수 있습니다. 미래적이요 종말적이요 영적이며 현실적인 이 사
랑 안에서 새로운 성탄의 기적과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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