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쉴 수 없는 복음전도 2001-12-24 20:54:05 read : 13005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0-42)
들어가는 말
성령강림 사건이 사도행전 2장에서 주어진 다음에 계속 복음이 열심히 전파되다가 교회에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헌금을 떼어먹으면 이런 징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에 관한 것입니다. 부흥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에는 이처럼 심판의 역사도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성령이 인정해주시고, 기뻐해 주시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 곳에 그 성령이 동일하게 죄를 책망하시는 역사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사도들도 이 사건을 심각하게 다루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고 나니까, 교회가 다시 거룩함과 순결을 회복하고 그 다음에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게 오늘 본문의 맥락입니다. 결국 복음전파라고 하는 것도 교회의 영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순결하고, 그 교회가 거룩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할 때 그 교회는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니까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그 옥에다가 가뒀습니다.
복음전파와 성령
복음전파의 역사는 항상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고 나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음 전하는 사람들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는 성령주심은 성경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지마는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자 하나님이 내게 느껴지고 관계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앙의 놀라운 감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누리며 사는 것에 놀라운 신앙의 행복을 느끼게 되니까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행복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이런 행복 안으로 들어오기를 사모하는 그런 열망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거예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설교를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간증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전도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고래고래 길거리에서 소리를 치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방법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말로 하든지 글로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찌하든지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야 되겠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한 나라의 복음의 문을 열고 복음의 불을 붙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정된 목표
이 사도들이 오늘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채찍질해서 놓아주었더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매 맞고, 욕을 먹고, 능욕을 당하게끔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듣게끔 말하는 것이 자기가 평탄한 가운데, 능욕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도 틀렸습니다. 성격도 틀렸습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도 같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체험과 다양한 사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다양한 면을 체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체험이 어떠했든지 교회에서의 위치가 어떠했든지 또 어떠한 교훈을 들으면서 이제껏 살아왔든지, 그들은 인생 자체가 전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말하는 일에 매었습니다. 붙잡혔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시던 똑같이 연속적으로 이 사도들을 통해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두려워 할 정도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가지에 그들의 모든 삶의 목표가 꽂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그 모든 것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자로 세우셔서 설교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다니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학교를 다니게 하시며,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두신 것은 어떤 방법으로 살아가든지 궁극적으로 그 살아가는 방법을 통해서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알리셔서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의 증인이라
사도행전 구석구석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본 사람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 사람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사람도 전도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만져 보지도 못하고, 그 아래 서 보지도 못한 그 십자가의 증인들이 되게 만들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까?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은 철저하게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에게 매이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천박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뭔가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실 때 피상적으로 알던 신앙이 확실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알았던 신앙이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형체가 불분명하던 신앙이 분명한 형체를 갖게 되는 거지요. 이런 모든 놀라운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와 성령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 전도할 수는 있어도 그러나 전도에 있어서 성과는 성령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 엄청나게 많은 차이를 가져옵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든 못 받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명령입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복음 전도의 명령에 순종할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상황에서 전도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번 그 상황에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종족이 로마라고 하는 한 울타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동지방의 민족들이 종교가 없는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철저하게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그 당시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세주라고 하는 이 말도 되지 않은 미개한 이야기를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겠습니까? 자신을 거의 불가능한 일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이세상 사람들 눈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미련한 일 하나에 인생을 걸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에다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지어다" 거기서 '너희'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약속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약속을 하겠어요? "내가 너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불모의 지대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던지고 살아가는 자, 오늘 내가 직장에 다니지만 월급 받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신앙에 불타고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가 있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며, 모험적인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간증할 만한 것을 남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고 자기 개인의 유익을 포기하며 오직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놀라운 체험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옥문을 흔들고 싶으시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서 투옥되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말씀하고 싶지만, 그렇게 자신을 던지며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그 일 하나에 생명을 건 사람들을 찾기 힘드니까 하나님의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어서 성경은 말합니다. "날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 그 중심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보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서 지상 생애에서의 이름이라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기다려온 그 전 인류를 구속의 소망이신 그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그가 모든 인류의 죄를 구속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대망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어요. 그들은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그 때의 시대에도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언제나 사람들이 나뉘어 집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뉘어지는 것이죠.
이들이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이 교회 한가운데 있었고 거기에는 필요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구약의 약속 그리고 못 박혀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다시 오실 것, 심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얘기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들을 얘기하면 신구약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전하던 바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복음의 도에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좋을 때나, 혹은 전혀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든지, 어느 상황에서든지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이 허황된 교리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오늘은 전해도 소용없을 때 내일 다시 전하고 오늘 가르쳐도 이해되지 않을 때 그 다음날 다시 가르치고 금주에 이해되지 않고 ,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도해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시 찾아가고 쉴 새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바쳤습니다.
쉬지 않는 교회
교회가 쉬지 않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유사이래 없는 위대한 성령의 능력의 부음을 받았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부여잡고 도저히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에 예수의 복음을 실어 나르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그들은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태만하고 헤이하게 느껴집니까? 그 때는 영적 전쟁의 현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인지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전하는 것을 통해서 그런 영적인 전쟁에 자신을 드려야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을 섬기고 진정 당신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예수 믿고 여기서 기다리다가 천당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우리를 쓰시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들고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지날 때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요.'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약은 복음전도를 위해서 자신을 드려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절박한 영적인 싸움의 전쟁터이고,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쓰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하기를 그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주께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 어두움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구원의 길을 보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
|
 |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  | Contact Webmast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