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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의 행복
2001-12-18 16:02:42   read : 12341

마 9:13, 5:7





인종차별이 아주 심할 때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백인이 정원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아메리칸 인디안 한 사람이 마침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그의 곁으로 찾아와 "제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없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잔만 좀 주시지요" 하니까 "인디안 놈한테 못 줘!" 그래서 인디언은 맥없이 떠나갔습니다.




바로 몇 일 후에 그 백인이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사냥개를 잃어버렸고 길도 잃어버려 조난 당한 채 헤매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쓰러졌어요. 깊은 산중에 쓰러져 있는 그를 이 아메리칸 인디언이 발견하고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해주고 죽을 써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됐어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물을 거절했던 그 인디언 추장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깜짝 놀라니까 그 때 그 인디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것을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이란 당연히 보복을 해야하는데 하지 않는 역동적인 사랑의 마음입니다. 긍휼이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우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행복론을 말씀하십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오늘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긍휼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인데 히브리어로는 헤세드, 헬라어로는 엘레에몬으로 약 500번 이상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의 90% 이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긍휼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가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베소서 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긍휼이란 무엇인가




왓슨(Thomas Watson)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대해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이 세 가지는 하나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호의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왓슨은 이 세 가지를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라고 멋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긍휼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비, 인자,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상대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보다 높은 사람을 향한 것으로는 존경, 공경, 경외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우정, 애정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향한 사랑은 긍휼, 인자, 자비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긍휼이란 말의 의미가 분명해 질 것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어려운 사람들 곧 약자, 고통 당하는 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 심지어 원수까지도 불쌍히 여기며 사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긍휼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용서에는 아픔이 따르고 책임이 동반됩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긍휼은 편견 없는 넓은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나의 넓은 가슴에 꼭 껴안아주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긍휼의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적십자운동을 일으킨 나이팅게일(F. Nightingale)에게 빅토리아(Victoria)여왕이 준 기념훈장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있다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다.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으면 눈물로 할 수도 있다" 긍휼히 여기며 살고자 하는 우리들이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들


우리들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세 부류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불신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 거지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고 외쳤습니다. 사람에게 은과 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를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가슴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시고, 아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태복음 9:23)."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그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면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까? 목자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뿔뿔이 흩어져 헤매며 고생하는 양처럼 보이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떠난 육신을 앞에 놓고 통곡을 한다면, 하나님을 떠난 영혼을 놓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할 말입니다. 주님, 저의 마음속에 구원받지 못한 자를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심장과 같은 긍휼의 가슴을 주옵소서!




1.1.1 전도운동이란 한 사람이 일년에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자는 내용이고 119 전도운동은 "한 사람이 한 가정을 구원하자"는 운동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열을 가지고 전도하자는 것입니다. 마치 구조대원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자가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구원의 애착이 있을 때 참된 행복이 주어질 줄 믿습니다.




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약한 자를 말합니다. 죄인,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긍휼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태도입니다. 요셉을 팔아 넘긴 형제들은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팔려갔던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가 양식을 구하려고 내려 온 형제들을 만났을 때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날의 잘못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 떨고 있는 형제들을 안심시키면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약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고통 당하는 자를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누구나 다 공감하듯이 예수님의 본성은 긍휼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특별히 긍휼히 여기십니다.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받는 죄인들, 사고 당한 자,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주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지요!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민망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 안타깝게 여기셨다, 때로는 아픈 가슴으로 함께 우셨던 장면들을 자주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가슴에는 긍휼의 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프고 어려운 자를 보면 그 연민의 정 때문에 견디지 못하여 하셨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의 어원적 뜻은 그 사람의 피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생각, 그의 감정, 그의 처지와 형편 속에 동참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이것을 공감이라고 합니다.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T.H. Robinson은 헤세드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느끼며, 그들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동일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서 가슴아파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느껴보며, 그 사람과 똑같은 형편에 처해보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입니다. 아이가 아플 때 어머니는 같이 잠 못 이루며 밤을 지새우시는 긍휼의 애심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보시려고 연약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완벽한 표출입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불신자나 약한 자에게 베푸는 긍휼보다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 고통을 주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가 더욱 힘든 일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찾아왔으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삼상24:6, 26:11)고 하면서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아무런 죄도 없이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친구들이 와서 조롱하고 괴롭혔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니 친구가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시험이 끝나고 그에게 하나님의 갑절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때 욥은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욥42:10)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는 무리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대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불신자들과 약한 자들과 핍박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의 축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어떠한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적인 축복입니다.


잠언 11장 17절에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언제나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악하게 사는 사람은 우선 자기 영혼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으면 건강에도 해가 되고, 정신도 피곤하고, 영혼도 어두워집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풀며 사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평안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내적인 기쁨이 충만해지고 선교의 활로가 넓게 열리리라고 확실히 믿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잠언 14장 21절에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7장 12절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이웃으로부터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그것을 이웃에게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모든 것을 이웃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긍휼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긍휼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심판의 날에 주님과 얼굴을 대하는 순간에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2:13)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꼭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과 약한 자들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자들에게까지도 긍휼을 베풀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내적인 평안이 찾아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웃으로부터 긍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삶을 통해 이러한 귀한 축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긍휼이란 말은 사랑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특별히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모두 긍휼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제사를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긍휼이 여기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방편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지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만큼 긍휼히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하나의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오직 순서에 따라서 경건하게,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이만저만 헛수고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을 보시면 모두 긍휼 사역입니다. 긍휼이란 단순히 동정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그와 함께 동질성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긍휼은 "헤세드"라고 하는데 이 헤세드의 뜻은 긍휼이라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는 말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그의 주석에서 헤세드를 "그 사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그의 느낌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며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눅 10: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집을 방문한 일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그의 힘을 다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마리아를 더 좋게 여기셨습니다. 흔히들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떤 분은 "봉사도 좋지만 말씀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 어떤 분은 "봉사와 말씀이 다 중요하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 글귀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 때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면 왜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었는지 해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 집에 오신 때가 언제입니까? 요12장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몇 일 앞두고 그 마음은 몹시도 무거웠습니다. 그 갈등과 두려움, 긴장과 공포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 무슨 음식인들 식욕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단지 좀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심경을 좀 털어놓으며 기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의 고독한 마음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는 내내 예수님의 눈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두고 그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시종 무거움이 담긴 예수의 말씀을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바른 친절을 베풀었습니까? 마르다는 힘을 다해 봉사했지만 자기 방식으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긍휼은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과 동질감을 갖는 마음입니다.




마리아에게 이러한 긍휼의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눅 7: 37절 말씀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죄인인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들어와서 예수님의 뒤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면서 그 발에 입을 맞춘 뒤 그 향유를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다 이 여인의 행동을 보고는 아니 저 더러운 여자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저런 흉측한 짓을 한단 말인가? 하고 격해 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도 그렇지, 자기가 정말 선지자라면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실까? 이 여자가 얼마나 불결한 여자인지 알고 계실 거 아니야? 수군 수군거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것이 얼마나 값이 나가는 향유인데 이렇게 허비하다니....., 하고 아까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의인의 눈으로 그 여자를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과 똑같은 죄인의 마음으로 그 여인을 깊숙이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울 때 그 여인과 같이 울고 계셨고 그 여인이 가장 아끼는 옥합을 깨뜨릴 때 바로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부서지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입을 것이라. 예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지금 마리아의 마음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에 빚진 자입니다. 그 풍성한 긍휼로 나 같은 죄인을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가슴으로 긍휼을 베푸는 인생을 살아야 참된 행복을 맛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아픔과 고통에 직접 동참하고 계십니다. 아픈 자의 상처를 사랑의 손으로 싸매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애절한 심정으로 민망히 여겨주시며 측은히 여겨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런 긍휼의 가슴을 품어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첫째는 나보다 높은 분에게 대하는 사랑으로, 위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경을 겸한 사랑으로 부모를 존경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나와 같은 위치에서 동등하게 대하는 사랑으로 필리아라고도 말합니다. 우정적 사랑입니다. 셋째는 나 보다 못한 사람, 즉 나보다 어리고 어려운 사람에게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 Thomas Watson은 이렇게 정의해주기도 합니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다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애정 때문에 행동하고, 긍휼은 상대방의 필요 때문에 행동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9: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우리 주변에는 뜻밖의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다정한 손으로 붙잡아주는 것이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높이를 조금 만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면 긍휼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합시다. 쌀쌀한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지 맙시다. 예수님은 심판의 눈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자를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의 본질은『용서』입니다. 이 말씀은 가해자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행복론입니다. 내 편에서는 피해를 입었어도 상대편한테는 선행과 사랑을 베풀라는 적극적인 행복론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긍휼이란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우하지 않는 애심을 뜻합니다. 용서는 정말 필요한 일인데, 그 용서가 잘 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만큼만 이웃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나는 긍휼의 대인이 되고도 남습니다. 바울은 용서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답게 이렇게 말합니다(골로새서 2: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용서는 내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되어지는 은혜체험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John Stott의 말에 귀기울여 들어보십시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죄를 회개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만큼 우리에게 남을 용서할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가 잘 안 된다면 혹시 내가 죄를 깊이 회개하는 체험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용서는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가슴아픈 상처와 고통이 있으신가요? 혹시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기에 당신은 이중적인 고통을 겪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너무 억울하잖아요? 상처받아서 괴롭고, 또 용서가 안되니까 더 괴롭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과 같이, 너는 그를 용서하라』




쟌 니이더와 토마스 톰슨이 공저한 「손상된 관계의 회복」이라는 책에서 용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용서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어 죄수를 자유롭게 걸어나가게 하는 것이다. 용서는 큰 글씨로 "아무 빚도 없다"라고 쓰는 것이다. 용서는 법정에서 망치를 두드리며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용서는 너무나 높게, 멀리 활을 쏘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끌어 모아 밖에 버려 집을 깨끗하게 하고 청결하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배의 계류 장치를 풀어 바다로 항해해 나가도록 놓아주는 것이다. 용서는 정죄 받는 죄인에게 완전 사면을 부여하는 것이다. 용서는 씨름하고 있는 적수에 대한 목조르기를 풀어주는 것이다. 용서는 낙서가 적힌 벽을 지워 새 벽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렇게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용서해주십니다. 완전히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하셨던 것이 용서하는 일이셨습니다(눅 23:34).『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이 말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미래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헤세드의 애심이 있는 사람의 행복론을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어떤 행복을 보장하고 계실까요?


①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행복합니다. 버클리라고 하는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고, 긍휼이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다" 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그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흐뭇한 행복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잠언 11:17).




②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해주십니다(마태복음 6:14).『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셰익스피어도 그의 명작「베니스의 상인」에서 긍휼을 이렇게 아름답게 정의합니다. "긍휼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를 다같이 축복한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나 무정해졌습니다. 잔혹하고 무자비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영혼을 사랑하는 가슴이 필요합니다. 내 곁에서 힘겹게 고통 당하는 분들을 향해 민망히 여길 수 있는 건강한 가슴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 그 사람 이름을 부르며 가슴에 품어 보십시다. 오히려 주님의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해보세요. 여러분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임할 것입니다.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녹아진 은혜 받은 마음으로 찾아가 그들에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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