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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2001-12-14 10:59:01 read : 8459
본문말씀 : 눅 5:1-11
김선태목사
인생은 만남입니다.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완성이 되어갑니다. 우리의 많은 고민이 무엇입니까? 만나야 될 사람을 못 만나고, 안 만나야 돨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닙니까? 만남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모 여가수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했는데 저도 가만히 보면 제 삶의 순간순간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 서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저는 그 때 그분을,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삶은 너무나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만남을 섭리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만남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의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부모와 자식로서의 만남이 아닌가 합니다. 이 만남이 인생의 방향에 대해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많은 심리학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성도님들께서 들어오실 때 카네이션을 저희 중고등부의 학생임원들이 가슴에 달아드렸습니다만 주안에서 부모님들은 '칭찬받기에 마땅하신 분'들입니다. 특별히 예배에 참여한 부모님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 그 사랑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귀한 분들입니다.
오늘 부모님된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복하면서 부모님들께서는 주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시고, 자녀된 성도님들께서는 주의 마음으로 부모님들을 공경하고 섬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말씀의 모두에 우리의 인생에서 많은 만남이 있고 그 만남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러나 세상에서의 그 어떤 중요한 만남도 이 세상에서만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2001년 5월 13일 시 분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루 전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고 하루 뒤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장석교회 예배당이란 공간에 앉아있습니다. 상상이야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지만 몸으로는 지금 여기에 앉아서 한 걸음도 바깥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를 목숨걸고 사랑한다해도 100년을 넘지 못합니다. 아무리 책임지고 싶어도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한된 인간적인 만남이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원과의 만남이요, 생명에 관한 만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만남은 인간적인 어떤 만남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이고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들은 언제, 어느 때에, 어떤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의례적이고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만남이 아니라 간절하게 찾고 구하여 뜨겁게 뜨겁게 가슴으로, 눈물로 만난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 만남은 내 삶이 영광스러운 때였습니까? 아니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였습니까?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였습니까? 아니면 내 삶이 힘겨울 때였습니까? 내가 물 댄 동산과 같은 곳에 거할 때였습니까? 아니면 황야와 같은 곳을 지날 때였습니까?
베드로가 밤새껏 그물질을 하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와 그물을 씻는 장면을 묵상할 때 여러분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근본적으로 베드로의 삶과 우리의 삶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삶의 핵심을 처절하게 들여다보면 우리 역시 거둔 것보다 잃어버린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인생의 종국에 고백하는 것은 전도서 1장 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반응할 것인가를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락하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온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까이 있었지만 극명하게 대비되던 사람이 있었는데 베드로와 그물을 씻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밤새껏 그물질을 하였으나 아무 소득이 없이 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고 허탈했겠습니까? 그들의 상심은 아주 컸을 것입니다. 그물을 씻으면서 여우같은 부인과 토끼같은 자식의 얼굴이 떠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오늘 고기를 팔아야하는 집안 형편도 그들을 번민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많은 무리가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그곳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2절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3절에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실패를 안고, 아픔을 안고 주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보지 못할 때 주님은 베드로를 주목해 보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찾아오지 않았지만 주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끝이라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시작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는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애타게 찾습니다.
원래 유교를 신봉하고 유교에 조예가 깊은 중국인 유교학자가 있었는데 어쩌다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유교 학자가 예수를 믿고 개종을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묻기를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이 유학자가 또 한 학문을 하시는 분이어서 그런지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내가 비유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험한 세상을 다니면서 진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진리와 생명을 찾아 헤매다 어찌 실수를 해서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사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었더니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 '전생에 업보가 많았구먼 업보요 업보'하며 그냥 갔습니다. 또 한 사람이 오더니 '아니 이 사람아 그러게 실수하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오늘 실수를 거울 삼아 다시는 실수하지 말게'하고 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왔는데 사람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그저 아무 말 없이 사다리를 가지고 와서 자기의 바지를 걷고 내려와서 저를 업고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 사람을 비교해 놓고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요, 두 번째 사람은 공자요,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묻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일단 오셨습니다. 부족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사실은 우리가 찬양하며 고백하는 것처럼 주님은 사랑의 눈으로 어느 때나 우리를 바라보시고, 인자한 귀로서 귀기울이시고,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용납하시고 수용하는 수준이 어디까지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죽게 할 그 수준까지 사랑합니다. 그 능력이 어디까지입니까? 그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승천시키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만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롬8: 35-39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게넷사렛 호숫가에 베드로는 실패와 고통 뒤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아픔과 상실과 실패가 있습니까?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내 인생이 뭔가 더 좋은 상황과 여건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되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나의 성품과 기질에 관한 문제이던, 나의 가족에 관한 문제, 나의 직장의 문제이던, 나의 장래에 관한 문제이던 그 아픔과 실패와 연약함 그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의 심령의 무거운 짐들을 져주시기를 원하신는 주님 만을 앙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하락하신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헌신을 통해서도 우리를 완성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셔서 4절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5절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을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심한 자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가? 내가 만약 그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돼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 논리는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적입니다.
예를 들어 '열국의 아비'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늘 빠지기 쉬운 오류는 창세기 22장에 자기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헌신의 절정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데 그의 출발은 어떠했는지? 그의 믿음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나와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감동만 받고 그 사람처럼 되려고 훈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지만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하신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서 오랫동안 지체하고, 가안안 땅에 들어가서도 가뭄이 들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속입니다. 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줄 것을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체되자 여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서자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능력데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완성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 의와 내 정결함과 내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분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져라"라고 합니다. 우리의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실 때 (카라사테 타 딕튀아)라고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의 가진 그물의 모든 것을 내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베드로는 (카라소 토 딕튀온)이라고 단수형으로 대답을 합니다. 너희가 가진 그물의 모두를 내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 베드로는 자신들이 가진 그물의 하나를 내리겠다고 합니다.
5절의 말씀을 베드로의 심정으로 해석해 본다면 "당신의 말씀에 뭔가 모를 권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립니다. 그러나 노련한 어부인 저도 밤새껏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또 다시 헛수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그물을 다 던지지는 못하고 그 중에 하나만 던지겠습니다"라고 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한 것 같지만 정말 온전하고, 순전한 순종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이요,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때로 우리는 열심을 내어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고 결단하지만 그러나 많은 경우 요나처럼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고 땅의 빗장으로 막혔다고' 고백할 만큼 회피하고 도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도망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으로 판단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완성하십니다. 하나님은 빌 1:6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헌신도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시고 결국에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하고 헌신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면 우리 안에 거룩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반신반의하였지만 말씀을 의지해서 그물을 내려 많은 물고기로 그물이 찣어지는 경험한 베드로는 어떻게 됩니까?
먼저,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당신의 말씀에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지 못한 자신의 인간적인 계산과 숨어있는 반항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당신의 능력이 놀랍습니다'의 수준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자신의 존재를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존재의 흔들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실존을 깨닫습니다. 자신에 대해 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비젼 속에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고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입술이 둔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부딪치자 상대적으로 불의한 자신을 깨닫고 엎드립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교양인입니까? 도덕자입니까?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주안에서 오히려 세상 것은 자랑할 것이 없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부득불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 안에 있는 두 번째 변화는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이들은 구체적인 결단을 하고 삶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예수님을 만나 따라가는 사람들은 회계 후에 두 가지를 그들 안에서 경험합니다. 그것은 포기와 선택입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반응의 한가지는 포기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고 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반응은 포기에서 더 나아가 삶을 바쳐 예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를 쫓으니라"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가족도, 자기들의 분신과 같은 배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영생을 위해 담대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버리지 못한 옛사람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내려놓아야 할 구습은 무엇입니까?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려놓아야 합니다.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선택해야 합니다. 따라가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보살님이 교회를 나왔다고 합니다. 원래 이 분이 절을 다닐 때도 새벽예불부터 철야 용맹정진을 하던 분이어서 그런지 교회를 나와서도 그렇게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께서 집사님으로 임명을 하고 수요일 예배 때 기도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자 목욕제계를 하고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하게 하고 왔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어 정말 청산 유수와 같이 기도하시더랍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구절절 말씀을 들어 기도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하지 않고 '나무아미 타불관세음 보살'이라고 하시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우스개 소리에 우리의 실존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꽤 오래 믿었고, 열심히 믿었다고 하면서 여전히 축복이다, 행복이다, 성공이다 하는 것이 안 믿는 사람과 똑 같으면 우리는 버리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큰 영광이나 부귀, 욕망, 지위, 지식, 명예 등 가만히 생각해보면 잡히지도 않을 것에 매여 죽는다, 산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준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 가운데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포기할 것은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를 따라가는 선택의 결단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바로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중거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만일 이것이 납득이 안가시거든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구하시려고 사람이 되었고, 죄인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새롭게 볼 수 있고, 풀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기쁨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고 믿는 것과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오셔서 말씀으로 나를 설득시키면서 이해시키면서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때때로 반항도 하고, 길도 벗어나려고 하였지만 결국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고 고행을 하고 적선을 하고 의롭게 진실하게 살아서 우리가 거룩해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로 오시는 하나님, 오시는 그리스도, 오시는 사랑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의지로 사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감사로써 믿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말씀 가운데 바라보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고, 바른 선택을 하여 오직 예수만 따라가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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