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4월 27일 (일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목사를 막아라, 텅빈본당 /목사 연금 1,600억으로 '돈 장사'한 집사 구속/ 캄보디아 박율 목사 체포 충격               최태민 구국선교단 참여 목사들 / 십일조 하지 말라는 목사 /한우갈비’외치는 기감목사들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서울광장서 개막 /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 무죄               선교사들 위한 안식관 두 곳/ '노트북이 뭐라고' 소송 총동원한 사랑의교회               언더우드 후손 28명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군종장교 범죄               박수홍,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목사님이 운영하는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예장통합 ‘제2의 세습방지법안’ 총회 통과/ 예수님처럼 교회도 하늘에서 내려와야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적극 반대 /목회자의 고백 7가지 실수               총회장 2명을 배출한 여인의 힘! /복음화율 10% 안 되는데 주일학교만 1천 명              

  홈     이삼규     강문호.     고신일     곽선희.     김광일.     김기석.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성광.     김성수     김은호     김정호.     김홍도.     류영모.     명설교     박봉수.     오주철.     옥한흠     유기성     이동원     이성희.     이양덕.     이영무     이윤재     이재철.박영선     이정익     조봉희.     조용기.     주준태     지용수     피영민     하용조     한경직.     홍정길.임영수     해외목사님     관     괄사치유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한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사건별설교(구약)     사건별설교(신약)  

Home > 기사메일보내기


제목
받는 사람 이름
받는 사람 Email
보내는 사람 이름

cancel


우리가 약해질 때
2001-12-13 20:49:28   read : 10779

2001년 6월 17일
고후 12:7-10







신앙의 역설적인 것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이 약해질 때가 많습니다. 언제 사람이 약해지느냐? 하면, 갑자기 생활 형편이 어려워져 경제적으로 약해질 때입니다. 사람이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든든하지 내 수중에 한 푼도 없으면 그 어떤 사람도 정신적으로 위축이 되어 약해지기 쉽습니다. 하고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연히 눈치를 보게 되고, 심지어 집에 자식들 앞에서도 위축이 됩니다.




참으로 돈의 힘! 이것은 세상에서 하나님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어두움의 세력이 깊어진 이 시대에 돈의 위력은 가히 대단합니다. 정의가 힘이라고 하지만, 돈이 힘이라고 할 만큼 돈은 곧 강한 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돈 떨어지는 순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합니다.




또 언제 사람이 약해지는가? 하면 몸에 병이 들어 건강을 잃을 때입니다. 돈보다 건강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몸이 건강해야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병들어 누워버리면 그처럼 약해질 수가 없습니다. 병중에는 육체의 병만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실연(失戀)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 보면 자살 직전에까지 가게 되는 나약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보기 싫어지고, 모든 것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우울증도 정신적인 건강을 잃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지나친 허영이나 자만심이나 자아도취증세도 정신적인 건강을 상실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건강을 잃을 때 사람은 약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때 약해집니다. 그렇게 밤잠을 자지 못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꼭 이루어질 줄 믿었는데, 그만 중도에서 무너지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버립니다. 손 맥이 하나도 없어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즉 사람들은 실패할 때 약해집니다.




이렇게 돈 떨어지고, 병들고, 실패하면 사람들은 모두 약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강해지려고 노력들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디 자기의 마음 먹는 대로 됩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고민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물질, 명예, 건강, 권세, 자존심, 사랑, 믿음, 희망 등 모두가 상실감으로부터 인간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약할 때 강하게 역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해야 힘이 있다고 하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약함에서 강하게 역사(役事)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역설(逆說)입니다. 사람이 강해지려면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사업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고 그것이 정설(定說)일 것인데, 약함이 도리어 강하다는 것은 분명히 역설(逆說)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역설적인 것이 많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 하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은 자가 되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를 택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없는 자 같으나 남을 부요하게 하는 자로다",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축복을 받는 자로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진리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신비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약한 자 같으나 실상은 강한 자"라고 하는 역설적인 진리로 우리에게 신앙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모든 것이 신비입니다. 우리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고난은 고난일 뿐이요, 실패는 실패일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 안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달라집니다. 고난이 더 큰 축복이 되고, 실패가 더 큰 성공이 됩니다. 질병의 아픔이 우리에게는 더 큰 위로와 감사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한 모든 약한 것들까지도 더 강한 것들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로 운보 김기창 화백이 있습니다. 이분은 여덟 살 때 학교 운동회 날 장티부스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로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높은 열로 인해 청신경 마비를 가져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후천성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습니다.




"듣지 못하면 울부짖고 싶고 아무거나 때려부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터질 듯한 가슴의 응어리들을 그림에 쏟았어요. 지금은 내 자신이 귀먹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때가 있어요. 귀가 들렸다면 오늘의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고통도 없지 않았지만 폐쇄된 소리의 공간이 있었기에 한 작업에 몰입, 집중할 수가 있었어요..."




이분이 귀머거리 된 것은 개인적인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이 고통을 통과하는 중에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이 주신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했고 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라는 한 연약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분이 위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런 사람을 쓰셔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이 더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약한 사람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전공입니다. 고로 여러분이 약한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영광 받으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 답은 "우리가 약해졌을 때"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




오늘 본문에 보면 참으로 소중한 은혜의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인물 중에 대표적인 분이 은혜의 사람 사도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은혜를 신학적으로 정립했고 또 복음적으로 은혜의 의미를 해석해 준 대단히 소중한 성경에 나타난 은혜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는 율법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오직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긍휼로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로 얻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역설하였고 신학을 정립한 사람입니다.




은혜란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이라며 그 깊은 면에서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은혜 중심적 세계관을 말합니다. "은혜 받은 자, 구원받은 자, 은혜의 참 뜻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은혜로 볼 수 있고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것도 은혜요, 자기가 사는 것도 은혜요, 오늘까지 살아온 모든 생애가 은혜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나 됨은 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오직 은혜를 말하고 그래서 은혜로 해석하고 은혜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은혜로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무척 약해졌지만 그 약해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한 사람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7절을 보면 바울은 육체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을 볼 때 이것은 분명히 사단의 방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시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엄청난 고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로 보고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였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바울은 이것을 "사단의 사자"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을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방해물로서 육신의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일 때는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것만 없으면 정말 멋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텐데 그것이 족쇄요 올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원망입니까? 한탄입니까? 아니면 포기입니까? 사실 이런 일들은 나의 영적인 현주소를 보게 하는 거울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서 대사도가 세 번이나 하나님께 이 문제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질병을 가져가 주십시오". 처음 기도했을 때 응답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할 때에야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도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응답이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십시오" 했는데 없애주기는커녕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 가시 그대로 있는 게 좋겠다. 그것이 너를 약하게 만드는데 네가 약할 때 내 능력이 온전케 되므로 내게는 네가 고통스런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웬 말입니까? 나는 지금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하나님은 그 고통의 상태를 보면서 즐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위로의 말도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힘들지, 보는 나도 힘들단다. 그러나 좀 참아보아라" 이것이 아닙니다. 또한 동정도 아니었습니다. "네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그러나 나는 네 옆에 늘 같이 있단다." 이런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격려도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인정 사정없는 말씀 같습니다. 나는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고통 당하며 있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얘기도 설명도 없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우를 당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고통스럽고 이 문제로 죽을 지경인데 기도하면 하나님은 침묵하시거나 그냥 그대로 지내라고 하십니다. 하루도 못 살 것 같은데 계속 견디라고 합니다. 이럴 때는 참 맥이 빠지고 짜증이 납니다. 바울 사도도 보통 사람 같으면 실망했을 수도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시면 그는 기뻐하고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기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 했고, "약한 것들을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보통 약한 것, 약점은 숨기는 게 정상이고 할 수 있으면 드러내려고 안 하고, 할 수 있으면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약한 것들을 오히려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환경이 변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통은 계속되고 있고, 자신은 더 약해졌는데, 인간적으로 볼 때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는 오히려 이것들로 인해 크게 기뻐하고 약점들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은 10절입니다. 여기서는 자기 삶에 있는 안 좋은 것들만 골라서 얘기하면서 기뻐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했습니다. 이것들은 자랑할 것이 아니라 숨겨야 할 것이요, 없애버리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들로 인해서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를 괴롭히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그는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바울이 깨달았던 하나님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경에 매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과정에서 깨달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은 없고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육체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두 번씩이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의 고난 중에는 그가 너무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이 아니라 이유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고난만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있기에 하나님은 아픔을 무릎 쓰고 기꺼이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고난만이 이룰 수 있는 일




살이 썩어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수술이 필요합니다. 수술해서 썩은 살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영양제만 놔준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보지 못하셔서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실 때는 뭔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신비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고통 속에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의 고난은 괜한 시간낭비나 헛수고가 아닌 의미 있는 고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막힌 계획이 있습니다. 적어도 재수 없어서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겸손케 만들어 하나님께서 계속 쓰시겠다는 의도입니다. 교만하면 끝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시를 주어서라도 겸손케 하고 계속해서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가시가 있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파멸이 아니라 유익이요 축복이다




고통받을 때 제일 속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괜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필요 없는 고난으로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헛수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개개의 사건을 놓고 보면 내게 유익이 없고 상처와 아픔만 주는 것 같았는데 이 모든 것을 합해서 보면 그 나름대로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지금 고통 중입니까? 이 고통을 통해 앞으로 경험하게될 유익과 축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고통도 견딜만해집니다.




고난은 깨닫는 자에게는 은혜이고, 또 고난은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고난 없이 하나님의 축복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고난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오고 이 통로를 거친 사람에게만 고난이 축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파멸이 아니라 유익이요, 축복입니다.




약한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




9절 중간과 하반 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바울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할 때 더욱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가 존중받는 것은 세상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약한 자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약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그는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생각나는 염려는 무엇입니까? 나 때문에 하나님 영광 가리운다는 것입니다. 내가 병들면 믿는 사람들이 아프기도 너무 자주 한다고 할 것이고, 내가 가난하면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복을 못 받아 가난한 사람 있다고 말하고, 내 자녀들이 잘 안 풀리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것 같고.....




그런데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약한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라고 말입니다. 병약한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여줌으로 인해 영광 받으시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통해 부자나 학식 있는 자들이 못하는 일을 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망나니 같은 사람들 변화시켜 새 사람 만들어 새 인생으로 살게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사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가장 강했던 시대는 바티칸에 웅장한 성당이 세워졌을 때가 아니라 카타콤 지하 무덤 속에서 예배를 드리던 때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를 느끼고 좌절할 때마다 사실은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문제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결국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10절 하반 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약해질 대로 약해졌는데 사실은 그때가 가장 강해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영원한 약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그 약함이 도리어 강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들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님 손 안에서는 영원한 약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약함이 강함 되는 역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이런 일에 전문가이신데 정작 사람들이 자기들의 약점을 하나님께 내어놓지 않고 숨기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은 약점을 강점되게 만드는 전문가입니다. 약한 것을 내어놓으십시오. 약점을 하나님께 드려서 강해진 사람 많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약점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약점을 하나님께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조건이 좋다고 몸이 건강하다고 재물이 넉넉하다고 해서 의미 있게 살고 많은 일을 하고 빛을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넉넉하지 못한 환경,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이킹은 북풍에 시달릴 때 큰배를 만들었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던 사람들이나 사상가들은 다 불같은 고통 속에서 그들의 열매를 산출하였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가시 때문에 못살겠다고 가시만 제거해 주시면 정말 기쁘겠다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시를 갖고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더 즐거워하고 자랑까지 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시가 있는데도 즐거운 사람. 고통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더 자랑하는 사람, 더 강해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육체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육체의 질병일 수도 있으며, 가난일 수도 있으며, 배우지 못한 짧은 학벌일 수도 있으며, 신체적인 장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모르는 약점이나 과거, 혹은 좋지 못한 환경과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육체의 가시가, 자신의 약함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약함이 주님의 강함이 되게 하십시오. 당신의 약함이 곧 주님의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가 바로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는 때




여러분은 지금 어떤 환경 가운데 있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고, 기도해도 벗어나지 못하고 약해지게 만드는 어떤 환경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없어지면 춤이라도 추겠는데, 이것만 해결되면 하나님 영광 드러날 텐데..."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을 없애지 않고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춤추게 하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십시오. 환경은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 주어진 환경을 수용하고 순종하고 감사할 때 자아는 깨지고 하나님의 은혜는 임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려고 하고 도망가려고 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불평하게 됩니다. 죄짓게 됩니다. 환경은 하나도 개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경은 더 강한 족쇄로 나를 조여옵니다. 지금 주신 환경이 내게 최선의 환경임을 믿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라 확신하고 믿으십시오. 당신이 약할 때가 바로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약한 사람을 품어주고 버리지 않으시듯 성도들도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쓸모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품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버리지 않고 품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점이 있을 때에 그 단점 까닭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더욱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아파할 때 버리지 마십시오, 상대방에 허물이 보일 때 버리지 마십시오. 상대방에게 단점이 보이고 상처가 나타날 때 품어보십시오.




우리의 약함은 오히려 축복의 그릇




어느 부모가 갓 태어난 아이가 수술하도록 허가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그 수술은 아이에게 아픔이 다 전달되는 그런 수술이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참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자기의 고통을 지켜만 보는 부모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더욱 아팠습니다. 고통 당하는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는 더욱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그 아픔을 이겨야 건강을 얻을 수 있기에 참고 지켜봅니다. 이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때로 그런 아름을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결국은 웃게 하십니다. 결국은 좋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약함이 있을 때, 고난이 있을 때, 힘든 일이 있을 때 주님을 우리들 곁에서 함께 하셔서 결국은 그러한 것들이 유익한 것들로, 축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우리도 이제 우리의 약함은 오히려 축복의 그릇으로 믿고 더욱 주님 앞으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제 주님의 넉넉한 이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연약함은 통로입니다. 어느 부분이 비어 있습니까? 어느 부분이 약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강점을 통해서도 역사 하시지만 내가 약해졌을 때 그 부분을 통하여 더 큰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이 빈 부분을 통로로 삼아 내 삶 속에 또 다른 사람들 속에 흘러 넘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약함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가졌던 가시 같은 약함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괴롭히기 위하여 주신 약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머물게 하기 위한 은혜의 안전장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게 하기 위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계속해서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한 은혜의 장막터입니다. 그러므로 약함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부족함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지난 시간의 고통과 아픔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자신의 장점만을 자랑하지 마시고, 여러 약한 것들을 인하여 자랑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강함으로 변하는 약함의 은혜




성공만을 감사하지 마시고 나의 실패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약함이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강함으로 변하는 약함의 은혜가 우리 속에 충만해서 약한 자가 주님의 은혜를 받아 강하게 되는 이 약함의 은혜를 체험하고 사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남북 전쟁 당시에 한 무명 군인 지은 시를 읽어 드림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한 몸을 구했으나


도리어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부를 얻어 행복하기를 간구 하였으나


가난한 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지혜를 배웠노라


한 번 세도를 부려 만민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세력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


생을 즐기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바랬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사 온갖 좋은 것을 즐길 수 있게 하셨다


내가 바라고 원하던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은연중 나의 희망은 모든 것을 얻었나니


나는 부족한데 내가 간구하지 않은 기도까지 다 응답되었으며


이제 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가장 충족한 은혜를 받았노라



admin



프린트하기 독자한마디


이전으로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개인정보취급방침 |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