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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의 의미 ” 2001-12-13 15:37:05 read : 8608
요 9:1~12 설교자 : 임영수
우리는 인생의 도상에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질병, 재난, 신체적 장애, 정신적 고통, 죽음과 같은 역경 또는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불행한 일들을 만날 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역경 그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부정적인 경험들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역경 가운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주로 단절, 절망, 소외, 죄책감, 두려움, 공포와 같은 것들입니다. 거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서서 고난에 대한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 더욱더 고통스러워 집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불행한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과 부모가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보호 아래 있었을 때는 단지 사물을 보지 못한다는 답답함 외에는 별로 자신의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더해가며 부모가 그의 곁을 떠나가면서, 그는 자신의 생존의 문제에 대해 더욱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장애로 사회에 적응할 수 없어서 드디어 구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루 하루의 삶은 매우 지루하고 답답하였습니다. 때때로 찾아오는 절망감에서 몇 번 스스로 생명을 끊으려고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도 있지만,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절망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조그마한 희망의 빛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성전을 떠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보자 그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그가 날 때부터 보지 못하게 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인간에게 닥치는 역경은 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원인은 그 자신의 죄보다 그의 부모의 죄가 더 컸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의 역경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었던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위로와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로는 자신들은 죄를 짓지 않아서 그러한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고 있다는 자위와 자신들의 의에 대한 자만심입니다. 한편 두려움은 자기들이 앞으로 그러한 형벌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의롭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그 불행한 사람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저 사람처럼 죄를 짓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를 제자로 택하지 않았습니까?”
제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일은 인간 스스로 의롭게 살아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역경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기 전 만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사람은 율법사 아니면 서기관들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철저히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의 답변은 매우 혼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시간에는 “인간의 우연발생적인 사건과 사고가 하나님의 역사를 찾아내는 끊임없는 기회로 전환하게 된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이래 대를 물려오면서 자신의 양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자신의 생의 역사의 어두운 부분들을 숨기면서 스스로 경건한 체 하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심판관이 되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제한하면서 두려워 떱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고통에서부터 우리 자신들을 단절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가운데서는 그와는 반대로 병든 사람들이나 슬퍼하는 사람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억압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세상이나 종교적 교리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의 비전과 희망, 약속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그전에 정죄, 형벌, 파괴적으로 보이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와 목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 가운데서는 모든 관점이 뒤바뀝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가치와 판단이 기준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 공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하게 되었던 사람은 인간들의 판단, 제한으로 판단되고, 규정되었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더욱 더 절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인간의 제한 판단은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면서 우리에게 언제나 반복되는 경험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많이 억압하고 숨기고,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자신에 대한 억압, 제한, 규정,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경건한 사람, 잘 믿는 사람이라고 자위합니다.
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라는 질문은 인간들이 인간의 고난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제한한 가운데서 나온 질문입니다. 그러한 제한과 판단 가운데서는 인간의 역경에 대한 어떤 희망적인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판단에서는 오직 깊은 탄식,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가운데서는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인간의 불행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기회’가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한 기회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단계적으로 밝혀가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 내용으로 돌아가보면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로마나 유대 사회에서는 침이 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약의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사람에게 안식일에 침을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른 것은 인간적인 많은 판단과 제한으로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유대인들에게 경고를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이 불행한 사람은 그의 인생의 도상에서 그의 운명적인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에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불행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본다고 하지만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고난의 깊은 터널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다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그를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기회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고난은 저주, 형벌이 아닙니다. 고난이라는 인생의 밤에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작년에 한 불구의 소녀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서 저의 설교의 끝을 맺습니다.
“한 불구의 소녀가 오래동안 불치의 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전해 듣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과 같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이 여겨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소녀를 방문한 목사님께서는 그 소녀에게 비록 병상에서나마 열심히 기도를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소녀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그 마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되었고 이상스럽게 그 마을에 신앙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그 부흥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누구가 새로 교회에 나왔는지 가족에게 자주 묻는 것이었습니다.
수개월 후에 이 소녀는 앓던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사망한 후에 놀라운 사실이 한가지 발견되었습니다. 즉, 그 소녀의 베개 밑에서 56명의 이름이 나란히 기록된 기도의 명단이 나왔는데 이 56명은 이번 신앙부흥에서 새로 교회에 나와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이름 앞에는 빨간 십자가로 표를 해놓았는데 그것은 자기가 기도한 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 개씩 표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소녀의 생애에서 병들어 앓아 누워있던 시간은 세상의 시간에서 매우 불행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에게 그 시간은 불행한 시간입니다. 그 불행한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과 연결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에서 볼 때 그 소녀가 앓아 누워있었던 시간은 그의 생애에서 매우 소중한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 즉 아직 낯 동안에서는 이 소녀가 병든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라는 질문은 합당치 않습니다. 이 소녀가 병들어 누워있는 기간에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고난, 역경이 운명,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회개, 새로운 시작,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는 모든 어둠의 세력은 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더 이상 어둠의 권세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기도 하고, 억압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의 가치 판단으로 제한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그 자신이나 그 부모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운명을 규정해버리는 경우가 우리의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나름대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인 기준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을 굉장히 크게 문제가 되는 것처럼 크게 부각시켜 놓고 나름대로 제한하고, 그것을 철저히 지켜갑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문제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매우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많은 규정에 얽어매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직 낯 동안에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라는 물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실직 기간에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병든 기간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렇게 무거운 생의 짐을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닫혀진 미래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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