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나의 도움 -여호와- 2001-12-11 22:34:14 read : 9224
시편 121:1-8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들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많은 책들을 통하여 감동을 주는 분 가운데, 헨리 나우웬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책을 한 두 번쯤 읽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분은 원래 심리학자로서,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너무 풍요롭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너무 부요하게 사는 것은 아닌가? 이런 죄책감을 느끼면서, 캐나다에 있는 '데이 브레이크'라고 하는 정신지체장애자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사는 그 공동체에,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들어갔습니다. 나우웬의 이런 결정을 주변에 있는 동료들도 이해하지 못했고, 친척을 비롯한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명예와 교수직을 뒤로하고, 정신 지체자들과 더불어 그들을 도우며 살다가 1996년 심장 마비로 이 땅을 떠나기까지 그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정말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분은 살아 계실 때, 이 사회를 보며 우리의 사회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위기의 사회다. 우리는 정말 위기 속에 살고 있다. 현대인들은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세 가지로 요약하고, '위기의 사회'에 대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의 사회가 위기의 사회인가? 첫 번째는 내향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좀더 의역을 하면,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가 지극히 이기적인 곳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동물이지만 그래도 이전에는 가정은 생각했어요.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부부도 소용없고 자식도 소용없어요. 자식을 버려 두고 도망가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IMF 때, 자식을 길거리에 세워놓고 부부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가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구호단체에서 저희 교회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고아원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멀쩡히 살아있지만 도망간 부모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개인주의적으로 사회가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요합니다. 내 유익이 중요하고 내가 손해보는 것은 견딜 수 없어하는 사회! 바로 위기의 사회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가 없는 사회라는 겁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권위가 무너져 가는 사회라는 거죠. 우리도 옛날에 버릇없는 사람을 보면 "애비없는 자식이다" 이런 얘기를 했지요? 우리의 사회가 다 아버지가 없어져 가고 있다는 거예요. 저도 동감합니다.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있잖아요? 70년대만 해도 학교에서 스승의 권위가 있었고, 가정에는 아버지의 권위가 있었으며, 이 사회에는 공직자의 권위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를 보세요. 학생들이 스승을 어떻게 대합니까? 데려다가 두들겨 패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를 깎아 버립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폭행합니다. 도둑놈이 경찰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오히려 경찰을 두들겨 패고 그의 총을 빼앗는, 이런 권위가 무너진 사회에 저와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제시한 것은 충동적인 사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결정할 때 이성에 따라서, 자기의 철학을 따라서 결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충동에 의해서 따라간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에 하고 싶으면 하고, 먹고 싶으면 먹고, 안하고 싶으면 안하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훔치고 싶으면 훔치는 거예요. 오늘의 이 사회를 얼마나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는지요.
나우웬이 지적한 위기적 사회의 특성들을 우리는 매일 신문에서 확인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죠. 지난 두 달 동안의 사회면 톱 뉴스 제목을 적어와 보았습니다. 사제폭탄 제조 성능 과시하려 공개 실험 (시내에서 공개실험 했죠?), 인터넷 자살사이트 등장-자살방법 자세히 안내, 왕따놀림에 탕탕탕!(미국 고등학교에서 아이가 쌍권총을 쏘아 댔어요. 여러 명이 죽었지요?), 게임중독 중학생 동생 살해-그의 장래 희망은 살인 청부업자, 신세대 혼인신고 기피-일단 살고 나서 하자, 이혼 2.7배- 가족해체 가속,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제1위, 삶의 질-서울 세계 93위. 실업자 백만 육박, 투자 신뢰도 급속도로 추락.... 여러분,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이것이 우리가느끼는 것이 아닙니까?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로 치닫고 있어요.
이러한 위기의 사회 속에서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로서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도대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위기에서 제외가 됩디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마음에 공포감이 다가오지 않습디까?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어요. 사고를 당하면 어찌하나? 우리의 자녀가 올바로 자라줄까? 내 인생이 올바로 성공의 길을 달려갈 수 있을까? 내가 이 신앙의 길을 아름답게 마칠 수 있을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세상의 풍랑이 너무나 거세기 때문에 위기감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제가 지금 강해하고 있는 설교의 소제목이 붙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니까 얼마나 좋은 기분으로 노래했겠는가 하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오해입니다.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해서 이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남자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1년에 세 번씩 성전을 향해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처럼 자가용으로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버스도, 비행기도 없었어요. 그들은 걸어서 올라갔다 와야 합니다. 자기가 살던 고향을 1~2주일은 비워두어야 했습니다.
모든 남자들이 다 예루살렘에 집결해 있을 때, 첫 번째로 걱정되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살던 동네에는 여자만 남아 있는 거예요. 아내들과 딸들! 만일 그때를 틈타서 적군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원수들이 그 동네를 쳐들어온다고 하면,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모든 동네를 다 내어 주어야 하는 위기 속에서, 성전을 향해 출발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올라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이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하는가? 1년에 꼭 세 번씩 드려야 한다는 말인가? 한번은 안되겠는가? 아니, 한번도 어렵지 않은가? 교대로 가면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우리 아들을 남겨둘까? 그들은 고민하며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위험은 거기에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년 3월에 성지순례를 가겠습니다만, 그 성지에 가보면 예루살렘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어요. 이스라엘은 수많은 산과 강과 계곡이 있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 어린 아이들은 실족할 위험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여리고 강도를 만난 사건을 통해서도 그 당시에 강도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명씩 떼를 지어 간 것이 아니라, 작은 동네에서 남자들만 갔기에 강도를 만나면 그들은 꼼짝없이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위험들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바알신을 섬기는 산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신들, 불안하지 않소?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되지 않소? 여기에 절을 하고 가시오. 여기에 경배하고 가면 우리의 신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오." 수많은 우상의 유혹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당시 문헌을 보면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의 처소에 바알신을 섬기며 매춘부를 고용해서 전문적으로 돈을 받고 매춘을 행했어요. 아내와 모든 여자들을 다 두고 떠난 남자들에게, 그 매춘부들이 길거리에서 유혹합니다. 쉬었다 가라고요. 스트레스를 다 해소하고 가라고요. 이런 수많은 유혹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수많은 소리들이 그들을 향해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길, 그것은 즐거운 길만은 아니었어요. 순례의 길이요, 어려운 길이었어요. 그러나 사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우리는 이 위기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악이 들끓고, 사고 많고, 병이 많은 이 세상을 보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주변의 잘못된 소리들을 들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어느 날 새마을 기차를 타고 대전을 가고 있었습니다. 차안에서 중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와 제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철학적인 얘기가 나왔어요. "지금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십니까?" 얼마나 멋있어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어요. "야! 이 위기의 사회에서 새마을호 안에서 철학을 얘기해 주나보다!" 그 다음 말은 저를 더 설레게 했어요. "당신은 미래를 준비하셨습니까?" 그 다음 "당신의 미래를 책임질 삼성보험..." 김이 팍 샜습니다. 사실 이 소리뿐이겠습니까? 우리 주위에 이러한 소리들이 너무나 많아요.
우리 인생의 문제가 경제문제라는 겁니다. 경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 지릅니까? 신앙도 좋고, 순례의 길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얘기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을 다 인정해 준 다음에, 순례의 길도 좋지만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떠나라고 합니다. "경제가 흔들리면 당신의 신앙도 별수 없소." 그것이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또 다른 소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제일이오." 수많은 헬스클럽 광고, 운동 기구들, 건강 식품들, 그것들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순례의 길도 좋지만 먼저 건강을 챙기세요. 건강을!"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일을 버리고 골프 치러 나가는 것입니다. 건강을 챙기려고요.
또 다른 이들은 얘기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소용없다고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없애고 행복하게 사는 길은 너무나도 간단한 곳에 있다며, 이 약을 먹으라는 거죠. 다른 방법이 없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알코올을 선전합니다. 한잔 술!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할 것이라고요. 지금 약국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약이 뭔 줄 압니까? Tranquilizer, 신경안정제입니다. 수많은 진통제와 신경안정제들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그 약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이 수많은 소리들을 들으며 사는 저와 여러분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이러한 현실적인 고민들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위기의 사회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시편 121편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눈에 뛰는 단어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샤-만)이라는 '지킨다'라는 단어입니다. 여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어요.
3절-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4절-지키시는 자가, 5절-지키시는 자, 6절-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지키시리로다, 8절-지키시리로다.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이 너무나도 어려워 보이는가? 천국을 위해 사는 삶이 너무나도 위험해 보이는가? 내가 하나님의 방법만 좇다가 내 사업이 망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나도 세상 사람들처럼 속이며 살아야지, 이렇게 정직하게 살다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편기자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순례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누군가가 당신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성전에 올라가시오." 당신과 우리를 지키시는 그 분이 어떠한가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자가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가? 그 세부적인 말씀을 하며, 오늘 순례의 길을 떠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121편은 많은 학자들은,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질문하고 화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시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누구와 누가 화답했을까? 고향을 떠나 성전을 향해 올라가면서 사람들이 노래를 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따로 무리를 지어서 노래하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이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1절에서 4절까지를 보겠습니다. 그 중, 1절과 2절은 아버지가 노래한 겁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편기자의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즐거운 마음이 아니에요.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고민하며 아들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산등성이 반쯤 올라와 쉬면서 자기가 남겨두고 온 아내와 딸들, 그리고 동네를 바라봅니다. 얼마나 많은 걱정이 밀려왔겠어요? 뒤를 봐도 걱정이요, 앞으로 가야 할 예루살렘을 바라보니 그 산은 험하기 한이 없어요. 날이 저물어 옵니다. 강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수많은 걱정이 가장인 아버지를 엄습해 옵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이 산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누가 나를 도울꼬! 탄식합니다. 이 머나먼 길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과 나를 누가 지킬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 구절은 고민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기도하는 가운데 대답을 찾습니다.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렇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지! 그 분이 나를 도우실거야!" 이렇게 자위(自慰)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3절에 아들들이 이렇게 노래하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런데, 3절은 약간 안타깝게 번역되었어요. 히브리 원어로 보면 3절은 기도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어요.
여호와께서 당신을 실족치 않게 하시며 당신을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가, 나의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얘기하니까, "아버지, 아버지의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면 그 아버지를 지키시는 분이 졸지 않기를 제가 원하나이다."
하고 아들이 대답하고, 4절에 "그럼, 그렇고 말고!" 의 뜻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우리도 패를 나누어서 한번 해 봅시다. 40세 이상은 1,2절을 하고 40세 미만은 3,4절을 하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실족치 않게 하시며 당신을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렇게 노래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성전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셨을까요? 순례의 길을 떠나는 저와 여러분에게 무언가 말씀할 것이 있어서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진리,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순례의 길을 떠나며 수많은 위기를 지날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가야 할 겁니다. 그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1.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키신다
1절에서 4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언제나'입니다. All the time!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 노래를 하도록 했던 겁니다. 왜 졸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까? 당시의 문헌에 보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은 평상시에 항상 주무신다고 생각했어요. 그 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자고 있는 신을 깨워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배란 무엇인가? 자고 있는 신을 깨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방신을 예배하는 광경을 보면 광란 끼가 많았던 거예요. 요즘 교회도 만세삼창 합니까? 삼창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마 거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시니까 "하나님, 일어나서 내 예배 받으십시오" 이런 것은 아닌지요? 그 구체적인 예가 성경에 나와 있어요.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와 바알신의 선지자들이 대결을 합니다. 갈멜산에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멜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문헌을 보면 하나님의 제단이 그 갈멜산에 있었지만,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다 헐어 버리고, 그곳에 바알 신당을 짓고 선포하기를, "이 갈멜산에는 바알신이 거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바알신이 거하는 곳으로 잘 알려진 산이었어요.
엘리야가 바알신에게 도전을 하면서, 갈멜산에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이 얘기는, 축구 경기를 할 때, 일본 팀을 우리나라에 불러서 경기에 이겨본들 실력이 별로 인정되지 않아요. 홈 경기니까요. 홈그라운드에서 이긴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에 가서 이기면 아주 큰 축제가 열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우리가 홈경기에서 이기면 별로니까 너희들 신이 사는 갈멜산, away 경기(원정 경기)에서 한번 붙어보자" 하면서 도전장을 낸 겁니다. 엘리야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래서 공격권을 먼저 주었어요. "너희들 먼저 공격하거라." 그래서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바알신의 응답을 얻기 위해 아침부터 외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바알신이여! 응답하소서!" 바알신을 깨워야 되니까요. 그런데 바알신이 안 일어나고, 대답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단 위에서 댄스를 하면서 별짓을 다했어요. 그래도 안됩니다. 정오가 다 되었는데 대답을 안 해요. 그때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합니다. "얘들아 더 크게 부르라. 저가 혹 묵상 중에 있는지, 산보를 나갔는지, 주무시고 계신지 모르니까 더 크게 부르라" 그 말을 들은 바알 선지자들이 이제는 칼을 들어서 자기의 몸에 대고 그어, 몸에서 피를 냅니다. 왜요?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죽겠습니다! 할복자살 할 겁니다!" 하고 피를 냅니다. 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어요.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방신들은 보통 때는 자고 있으니, 깨워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의 이방 사람들의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이방신의 문화를 본받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도하거나 금식기도 할 때만 하나님이 들으시고, 자기가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때는 하나님도 자기를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운전할 때는 하나님은 관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가? 교회 안에서만 들으시고, 예배당 안에서만 들으시고, 예배 드릴 때만 깨어 있으시고, 우리가 운전할 때나, 사업할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주무시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 이러한 교인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바로 이런 환경 때문에, 바로 이런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은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들을 어떻게 지키시는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언제나, 24시간 내내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잠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때도, 우리의 믿음이 약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에도, 능력이 많고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감찰하시고,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성가 중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짐이 무거우냐' 입니다.
짐이 무거우냐 홀로 지고 가기에 험한 대로 갈까 두렵지는 않느냐
온갖 일에 메여 고달프지 않느냐 주가 도우시리 요청만 하면
우리 기도를 언제 어디나 들으시며 큰사랑으로 감싸주시며 동행하니
네가 실망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 가면 주 네게 오리라
여러분, 인생의 길은 짐이 무거운 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독수리의 눈으로 저와 여러분을 감찰하시고 지키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의 말씀입니다. "얘들아, 믿으라. 내가 너를 항상 지킨다. 안심하라. 이 위기의 사회에 풍랑을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보아라!"
2.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지키신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지키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지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5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모든 일에서'입니다. All the things. All circumstances.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세요. 6절을 보세요.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걱정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아! 큰일났다. 그렇다면 별은 우리를 해치겠구나. 이 정도 수준이면 큰일납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의 문학적인 용법입니다. '전체 대치법'이라고 합니다.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표현하는 겁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너무나 많습니다.
옛날에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기도하는 것 기억나시죠?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저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너무너무 궁금했어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이 되신 하나님" 항상 그렇게 기도하는 분이 계셨어요.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처음과 나중이에요. 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이것을 보고 머리 좋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가 앉아서 하는 것도 아시고 일어서서 하는 것도 아시지만 누워서 하는 것은 모르겠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것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부분으로 전체[전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낮의 해는 정말 뜨겁습니다. 상상이 안 갈 겁니다. 한여름의 해!
저는 콜로라도에 놀러 갔다가 우리 아이들 극기 훈련을 시켰습니다. 광진이가 10살쯤 되었고 호진이가 4살쯤 되었어요. 수통에 물을 채워 가지고 "남자가 씩씩하게 자라야지!" 하면서 아무도 없는 콜로라도의 산 속으로 올라갔습니다. 15분 정도만 더 갔으면 삼부자가 거기에 묻혔을 겁니다.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물을 마셔도 소용없어요. 45도가 넘는 태양이 내리쬐는데 어지러워요. "아빠, 어지러워" 큰일났구나! "조금만 더 가자. 조금만" 얘기를 하며 머리를 쓰다듬으며 겨우 돌아왔던 기억이 있어요. 그 날 체험이후,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낮의 해가 우리를 상(傷)할 수 있다는 거죠.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에요. 명절이 끼어 있기에 한여름에 그들은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달은 무엇인가? 그 당시에는 달빛을 받으면 뇌가 파괴된다고 믿은 거예요. 무슨 X-Ray가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밤에 다닐 때는 항상 두건을 쓰고 다녔어요. 그러나 그런 국한된 의미만을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은 해와 달을 비교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 그 누구도, 그 어떤 환경도 너희를 해칠 수 없다고 말씀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일에서 지키신다는 겁니다. 모든 일에서!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기서 환난은 악(惡)이에요. Evil! 여호와께서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안 믿는 사람이 교통사고 날 때, 우리 믿는 자들은 교통사고 당하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암에 걸려도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겁니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지키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병이 올 수 있고, 교통사고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키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지키세요. 이 땅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난과 어려움들은 다 하나님의 손아래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시험은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우리는 병에 걸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할 때에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어요. 왜요? 하나님은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 고난과 환난을 주시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환난은 하나님의 손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우리의 삶에 환난이 한가지라도 찾아올 수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난은 우리가 기뻐해야 되잖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 우리의 인격을 빚으시기 위해, 때로 고난과 사고와 환난을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모든 악에서 나를 건지니까요. 악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우리의 인생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을 지키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마지막 8절에서 시편기자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이룰 때까지 우리를 지키십니다.
3. 하나님은 사명을 이룰 때까지 우리를 지키신다
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출입'이 뭡니까?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죠. 왜 이런 얘기를 할까요?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는 아버지가, 저 산등성이에서 자기의 동네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동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내가 돌아왔을 때 혹시 적군들이 이 동네를 점령하고, 내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길을 떠났다가 강도를 만나 죽으면 어떻게 하는가? 이런 걱정을 하며 동네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출입을 지키실 거야! 걱정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거라. 하나님이 너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었어요. 왜요? 그들만을 위한 말씀이었다면 마지막 단어는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언제까지 지키신다고 하셨습니까? 영원까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의 평생, 우리가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라" 이 무슨 말씀입니까? 사고 당할까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암 걸려 죽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명자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행하는 한, 하나님의 사명을 다 이루기전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의 목숨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 죽는가? 당신은 언제 죽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다 이루는 그 날, 이 땅을 떠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복 받은 존재입니까?
약 30년 전, 달나라에 갔다 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카널 어윙 대령입니다. 한국에도 왔기 때문에 이름을 들어본 분이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이니까 과학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달나라에 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돌아오는 건 더 어려웠어요. 캡슐을 타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낙하산이 두 개가 펴져야 땅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낙하산이 하나만 펴졌어요. 모든 언론(TV, 신문 등)이 생중계로 보도하고 있었어요. 승무원들이 모두 긴장해서 모든 기계를 다 조작했지만, 한 개의 낙하산은 펴지지 않았습니다. 휴스턴 본부에서도 너무 당황했어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어윙 대령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우리 기도하자!" 기도하자는 딱 한마디였어요. 그리고 모든 기계를 다 스톱시키고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휴스턴 본부에서도 그 말을 전화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기도하자!" 하고, 그 짧은 시간에 무릎을 꿇고 다 같이 통성으로 "아버지,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기도했어요.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땅에서 회오리바람이 불었어요. 미국에는 가끔 강한 회오리바람이 붑니다. 회오리바람이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데, 그 캡슐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그 캡슐을 덮쳤어요. 그 바람의 세기는 기가 막히게도 나머지 하나의 낙하산이 펴질 만큼이었어요. 그 누구도 털끝하나 상하지 않고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어요. 그 날 그것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얼싸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하나님의 기적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다!" 라고 외쳤어요. 이 사람은 그 날 이후에 우주선 조종을 포기하고, 세계를 다니며 이 일을 간증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와서 간증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기적이 없다고요? 당신의 힘만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 옆에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사회는 위기의 사회입니다. 앞으로 이 사회는 점점 불 속으로 들어가듯이 위기로 치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원하는 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고 있는 동안엔, 하나님은 당신을 지키실 것입니다.
 |
 |
|
 |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  | Contact Webmast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