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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의 몸 6월 10일
2001-12-10 18:42:42   read : 7970





□ 교회는 그의 몸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에베소서 1: 22-23)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된지 54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세기 동안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앞으로 50년의 세월을 전망하면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며 교회의 교회다움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오늘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진 대로 보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 너무나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아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십니까?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누가, 무엇이 잘못 되었기에 그렇게 비춰졌다고 보십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도 머리가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있는데 머리가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머리 없는 몸처럼 흉물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미(南美)에서 들은 말이지만, 남미에는 '성당은 있어도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말이 그것을 증명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 없는 예수 교회! 머리 없는 몸! 시체와 같이 형식만 남아있는 교회들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체온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머리의 지시대로 피가 통하고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체온이 없어진 교회, 그것이 바로 시체입니다.
중세기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형식>과 <교리>와 <전통>에 사로잡혀 이단의 시비와 정죄와 심판만 있었던 것이 중세 교회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몸에는 피가 흘러서 서로의 유기적 관계가 교류됩니다. 핏줄과 힘줄과 근육과 뼈와 그리고 모든 지체들이 제각기 자기의 역할 분담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한 기관이라도 마비되거나 정지되면 바로 병든 몸이 됩니다.

오늘의 교회가 머리인 주님께 붙어 있는 교회인가?
과연 내 자신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증거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를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동행중에 있는 줄 알았다가 사흘만에 발견하고 다시 성전에서 찾은 것처럼, 오늘의 교회들이 바로 그런 모습들이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많은 교회의 행사들로 분주한 중에 머리되신 주님을 잃어버린 채 동행중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는 교회들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만물(萬物)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정치(政治), 경제(經濟), 교육(敎育), 문화(文化), 예술(藝術)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교인끼리만의 모임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참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신앙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제란 동업인, 동향인의 교제(Fellowship)와는 다른 것입니다. 나눔의 참여(Diakonia=partake)가 있어야 합니다.
'휄로쉽'과 '디아코니아'는 다른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교제가(Diakonia)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기중심(自己中心)일 때 신앙도 자기 중심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수직적 관계만 형성될 뿐 수평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고, 이웃과의 관계는 없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없는 신앙이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 십자가 없는 교회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십자가를 걸어놓고 보기만 했지 십자가대로 살지는 못하는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저 십자가가 조롱을 받게 되었고,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였습니까?

십자가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수직의 관계와 함께 횡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종횡(縱橫)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희생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희생이 없이 교제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약한 자들, 나보다 못한 사람들, 나보다 못 가진 사람들, 나보다 못 배운
사람들과 나눔의 교제가 있으려면 십자가의 희생의 관계가 있어야 이루어
집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귀족 교회, 있는 사람들의 교회, 권세 있고 부자들의 모임으로 전락되어
간다면 그리고 그런 왕국을 건설해 간다면 그것은 주님 없는, 즉 머리 없
는 몸일 뿐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세기 교회 상이었습니다.

3. 교회는 <말씀>안에서 계속적으로 자기 개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상에서 온전한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켜 새사람이라고 일컬음 받게 하여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용서함 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를 평론하면서 "교회는 병신들만이 모인 곳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서 불구자처럼 살던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기에 때때로 혈육에 치우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은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육(肉)을 가진 인간들이기에 교회도 성화 되지 못한 상태로 세속적인 것들로 오염되고, 동화되고 타협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자기 갱신(更新)과 개혁(改革)이 필요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에서도 보면, 교회가 너무나 성경 말씀에서 멀리 떠나 있었기에 다시 말씀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 속권(俗權)까지도 지배하던 그 당시에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교회에 있기 때문에 <속죄 표>까지 팔아 교회당을 건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은 교회가 지금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이었습니다.
유럽의 수많은 하늘을 찌를 듯한 교회당을 보면, 모두 그 당시에 지은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런 교회에 비하면 한국의 교회는 너무나 초라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개혁이 일어났던 것 같이,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도 이 점을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전통과 제도와 관행이라는 것에 젖어서 말씀에서 떠나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면 항상 <말씀>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개혁교회(Reformed-Church)의 신앙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개혁이란 말씀으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멀리 떠난 일체의 관행을 말씀대로 되돌려 놓는 일입니다.
이것을 항상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특징이요, 본질적 사명입니다.
<말씀> 자체는 변할 수 없지만, <말씀>의 적용은 화석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기에 <말씀>이 <말씀 되도록> 항상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해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관행들로 굳어진 비 성서적인 모든 것들을 항상 개혁해 나가는 교회라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말씀>안에 거하는 삶은 절로 과실을 맺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국 말라질 것 뿐이라고 하였습니다.(요15:1-5)
오늘 우리 교회 창립 54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스스로 말씀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 무엇일까?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스스로 결단하는 행위들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 교회를 담임한 목사로서 한가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다워 지려면 먼저 바른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신앙의 꽃이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예배자가 되도록 키우기 위하여 교회 교육이 필요하고, 말씀 공부가 필요하고, 전도와 봉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학박사면 무엇합니까?
아무리 성경을 통달했으면 무엇합니까?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아무리 말 잘하면 무엇합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는 자기 표현이요,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당면과제가 바로 바른 예배자들을 길러내는데 있습니다.

구약적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이었습니다.
범죄에 대한 회개의 표현으로 속죄물의 드림이었고, 한편 보호하심과 돌보심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바로 제사이었습니다.
신약적 의미에서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보십니까?
예배는 자기 신앙의 표현이기에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① 정성 없는 예배, ② 성의 없는 예배, ③ 준비 없는 예배, ④ 감사 없는 예배는 형식일 뿐이요, 행사일 뿐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지적을 보면, 오늘 교회들에게서 예배는 사라지고 '종교 놀이' 만 번성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 놀이는 놀이일 뿐, 제물의 받침과 속죄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는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런 지적을 받아 마땅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유럽의 교회들이 종교 세를 국가가 거두기 때문에 헌금이란 사라져 버리게 되었고, 그러기에 가시적인 교회의 예배의 행위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성이 담긴 예배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 편의로 생각하며 드리는 예배가 아닐 것입니다.
예배에는 항상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을 향한 제물이 따라야 합니다. 제물이란 희생입니다.
성경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영을 모신 거룩한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참 예배자란 외적인 면에서 형식적인 예배에 참여자일 뿐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 자신의 삶이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를 등한히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의 봉사와 성도의 교제를 등한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의 행위의 꽃은 예배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상도교회가 54년의 연륜을 쌓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나이로 보면 장년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했던 것처럼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못 먹는 어린아이의 단계를 넘어서, 세상 초등학문과 신화와 족보이야기에서 떠나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듯이(딤전4:7)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이제 좀더 성숙한 교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활 예배자들로 성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 예배자들이 될 때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게 내릴 줄 믿습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충만하게 내리게 될 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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