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6월 03일 (화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목사를 막아라, 텅빈본당 /목사 연금 1,600억으로 '돈 장사'한 집사 구속/ 캄보디아 박율 목사 체포 충격               최태민 구국선교단 참여 목사들 / 십일조 하지 말라는 목사 /한우갈비’외치는 기감목사들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서울광장서 개막 /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 무죄               선교사들 위한 안식관 두 곳/ '노트북이 뭐라고' 소송 총동원한 사랑의교회               언더우드 후손 28명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군종장교 범죄               박수홍,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목사님이 운영하는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예장통합 ‘제2의 세습방지법안’ 총회 통과/ 예수님처럼 교회도 하늘에서 내려와야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적극 반대 /목회자의 고백 7가지 실수               총회장 2명을 배출한 여인의 힘! /복음화율 10% 안 되는데 주일학교만 1천 명              

  홈     이삼규     강문호.     고신일     곽선희.     김광일.     김기석.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성광.     김성수     김은호     김정호.     김홍도.     류영모.     명설교     박봉수.     오주철.     옥한흠     유기성     이동원     이성희.     이양덕.     이영무     이윤재     이재철.박영선     이정익     조봉희.     조용기.     주준태     지용수     피영민     하용조     한경직.     홍정길.임영수     해외목사님     관     괄사치유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한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사건별설교(구약)     사건별설교(신약)  

Home > 기사메일보내기


제목
받는 사람 이름
받는 사람 Email
보내는 사람 이름

cancel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요3:14-17
2016-05-25 10:42:18   read : 1436

제 지인 중에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은 꼭 일찍 우리 곁을 떠날까?”

아직 어린 지체들은 잘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우리 삶에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 잠깐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함께 활동했던 선배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과 2005 년에 – 그러니까 거의 30년 만에- 다시 만났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를 만나자마자 그 선배는 저희 부부에게 너무 과도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도착하면 차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경비를 주시고는 한국에 있는 동안 아무 불편이 없도록 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부부를 위한 여행계획까지 짜 놓으시고 동행해 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일 뿐 아니라 우리와 관련된 어떤 사람 일이라도 부탁하면, 만사 제쳐놓고 해 주셨지요.

그러나 그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만난 지 5년이 못 돼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투병을 하면서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한국을 가면 그 형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게 가장 서글플 정도로 그립습니다.

제 아내가 제게 그래요.
이 세상에 그 앞에서 자기 남편을 흉볼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사라졌다구요.

그 분이 우리 때문에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우리 교회를 오셨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2006년 겨울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때까지도 우리 교회는 음향장치 없이 예배를 드렸었는데, 그걸 보시고는 한국에 돌아가시자마자 음향기기 일체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처음 음향기기를 가질 수 있었고, 저는 6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크로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까지 제가 만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다 합쳐도 그 분 하나의 사랑에 못 미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람은 꼭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 한 사람의 사랑만 있어도 살아가기엔 넉넉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금 얘기처럼 그 하나의 사랑만 먹고도 충분히 살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가지고 계십니까?
정말 여러분을 그렇게 절실히 사랑해 주는 한 사람을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 저는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어떤 말씀일지 짐작하시겠지만, 들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말씀 가운데 은혜 있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은 설교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고 여러분이 너무나 많이 들었던 말씀입니다.
성경 66권을 요약하면 바로 이 요한복음 3:16 절이 되지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이 말씀은 거의 암송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다같이 한 번 암송해 보실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전부터 다 알고 있었고, 지금도 모르지 않는 얘기입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식상할 정도로 잘 아는 말씀, 그게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답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은, 지금처럼 말씀을 남의 이야기로 듣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저 전해 내려오는 사실이나 얘깃거리로만 듣는다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어떻게 하셨다더라"
이것보다 맥빠지는 얘기가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 한 사람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슴 깊이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런 분이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위해 온갖 희생을 하신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결국엔 목숨까지 바치신 그 분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닙니다.
우주 비행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우주 공간의 수억 개의 별 중에서 지구처럼 초라한 별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별은 지구의 몇만 배나 되는 별이 있대요.
지구는 잘 보이지도 않는답니다.

우리 역시 우주공간에 나가보면 이 지구가 얼마나 작은 지 알게 되고, 그 장엄한 우주 공간에 조그맣고 푸르게 빛나는 지구를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그 광활한 우주 공간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지 알게 될 텐데…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에는 그런 경험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조그만 지구, 바로 그 지구가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주 공간의 그 조그만한 별, 지구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당신의 뜻을 심으셨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을 읽어보면, 결국 사람은 명예나 권세나 재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산다고 결론을 내린 것을 봅니다.
사랑만 있으면 인간은 삽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이기고 견뎌내기 때문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중에는 너무나 심오하고 장엄한 말씀이라서 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얘기를 하셨더라면...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데,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입니까?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이 말씀을, 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더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단 한 사람 앞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유대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지요.
여태까지 하나님을 잘 믿어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마음 깊은 곳엔 뭔가 모를 갈증이 있는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 사람의 죄는 어떻게 해결할 건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과연 있는 건가? 있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등등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의문을 풀어보려고 예수님을 찾아 온 거였는데,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오늘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왜 주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귀한 말씀을 하시지 않고, 니고데모 한 사람에게 이런 비밀을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은 일대 일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대상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뭉뚱그려서 집단으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 딱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랑이시라는 겁니다.

그 대상이 누굽니까? 하나님이 온 열정과 희생을 다해서 사랑하는 그 대상이 누굽니까?
바로 저요, 여러분 각자 각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실 이 말씀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감히 믿을 엄두도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 믿지 못해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요.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뭡니까?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았어요.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자멸했습니다.

회개란 게 뭘까요?
소극적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 크고 놀라운 용서의 사랑을 믿는 거예요.
그 사랑의 품에 자기를 집어 던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한 영혼, 그것은 이 거대한 우주보다도 더 귀한 겁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랑을 모르고 있어요.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있었던 그 해 겨울에 알래스카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쪽 바다에 살던 고래 두 마리가 알래스카로 올라갔습니다.

알래스카에는 바다가 육지 안으로 깊이 들어간 만(灣, bay, gulf)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고래들은 먹이를 찾으러 만으로 들어가서 고기를 배불리 잡아먹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유독 그 해는 알래스카의 겨울이 빨리 찾아온 거예요.

얕은 곳부터 물이 얼기 시작하더니 고래가 들어왔던 길목이 다 얼어 버렸어요.

고래가 뒤늦게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만의 입구는 이미 얼어서 나갈 수가 없게 되었지요.
얼마 후에는 만 전체가 얼어서 고래가 동사하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에스키모 몇 사람이 큰 나무 기둥을 가지고 와서, 고래가 나갈 수 있도록 얼음을 깨서 길을 뚫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겠지요..
이 일이 어찌어찌 TV 방송과 연결이 돼서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타게 됐습니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지요? 11톤 짜리 트랙터를 이용해서 얼음을 깨는가 하면 헬리콥터로 5톤짜리 시멘트 덩이를 위에서 떨어뜨려서 얼음을 깼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20톤 짜리 쇄빙선을 보내서 그 일을 도왔지요.

이렇게 해서 3 주 동안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100km나 되는 긴 얼음 길을 뚫고, 두 마리 고래를 바다로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고래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살리려고,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많은 돈을 들여 애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며칠만 늦으면 자기들이 얼음 속에 묻혀서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뭐 만을 못 빠져나가게 되자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기는 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수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 리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온갖 일을 해 놓으셨는데도 우리는 그 사랑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래보다도 못한 것 같아요.

고래는 길을 뚫어놓으니까 그 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길을 뚫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지 않다가 죽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만들어 놓으신 그 길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은 뭘까요?
그것은 바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거예요.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 온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지요.

자기 영혼에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있어서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 거예요.
여러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지요?
니고데모나 우리나 다같이 죽은 후엔 딱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롬3:23)
"죄의 값은 죽음이다"(롬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히9:27)

인간은 죄와 죽음과 심판의 운명을 지고, 다른 데 아니라 바로 지옥을 향해 사정없이 밀려가고 있습니다.
까뮈의 '전락'이란 소설을 보면 이런 상황에 대해 주인공 클라망스는 이렇게 소리치며 절망합니다.

"우리는 은총의 시대에 살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죄인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때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습니까? 무슨 기다림이 있었습니까?
무슨 참된 삶의 기쁨과 안식이 있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절망만이 태산처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토록 인간이 자랑하던 휴머니즘의 끝은 뭡니까?
아무리 돈을 들이고, 희생을 하고, 봉사를 해도, 하나님을 빠뜨린 인간에 대한 사랑은 결국 배신으로 끝나잖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거기에 어떤 휴머니티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단 한 번의 갈등은 곧 관계단절로 이어집니다. 그리곤 거기에 전쟁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결국 현대인들은 스스로 이런 죄책과 불안을 안고, 용서를 받을 길도 찾지 않고, 용서를 바라지도 않는 모습으로 살게 됐습니다. 이미 그런 건 포기한 지 오래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두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느니, 오히려 하나님 없이 맘 편하게 죄지으며 살아가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가요?

집 떠난 탕자처럼 돼지우리간으로 파고듭니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잊으려고 하지요.
쾌락, 환락, 유행, 돈, 보석, 권력, 대저택, 말초적 노래들, 살인, 사기, 강간, 폭력...
그런 것들이 바로 돼지 우리간을 채우는 쥐엄열매들입니다.
동물적 인간이 지배하는 곳이지요.

그러나 탕자는 거기서 영원히 살 수 없었습니다.
쥐엄열매로는 그의 주린 영혼의 배를 채울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인간 본연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뚫어진 공허와 갈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생각이 바뀌자, 그는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고 있었던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아버지는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낮엔 물론 밤에도 불을 환히 켜 놓고 기다렸지요.
그리고 아들이 돌아오자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 온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곧 잔치를 베풀지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들은 그제야 알았습니다.
얼마나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동안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는지...
그것을 알자 그 탕자는 아버지의 품 안에 자기를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을 맘껏 받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이 탕자인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용서를 포기해 버린 인간들, 그 인간을 하나님은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 주셨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탕자같은 여러분과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분이 아니라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나와 여러분같은 못난 인간을 찾아 이 땅에 뛰어드셨어요.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라".
그렇게 친히 말씀하시면서 잃은 양 한 마리 같은 여러분과 나를 찾으셨지요. 찬이슬 맞으면서 밤잠을 주무시지 않고 헤매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를 희생시키시며 여러분과 나를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셨지요


언젠가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시더구요..

어느 농장에 병아리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그 병아리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급기야 죽게 되었습니다.
수의사가 진단을 하더니 암탉 한 마리를 잘 고와 먹이면 낫는다 그럽니다.
주인은 수의사한테 당신 정신 나갔냐고 하면서 막 화를 냈습니다.
그렇잖아요? 병아리를 살리려고 암탉을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계속되는 얘기가 "수의사가 병아리를 살리려면 송아지를 잡아 먹여야 한다고 할 때, 그 말을 따를 농장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병아리를 살리려면 하나 밖에 없는 농장주인의 어린 아들을 잡아 먹여야 한다면 그 말을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무모한 계획이고, 잘못된 계획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결행하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만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도록 하셨지요.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롬5:8)신 거였습니다.


오늘 이 말씀 한 절을 가지고 책을 쓰신 분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깊고 높은 말씀입니다.

오늘 하루에 어떻게 이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간단하게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행동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래요.

사실 오늘 말씀은 고전 같은 말씀이예요. 어찌보면 너무 당연해서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말씀이라는 것,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야 될 말씀입니다. 왜냐면 아직도 이게 머리로만 이해되고 가슴으로는 이해 못하는 분들이 있어서예요.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뭔가 해야 될 게 아니라, 마음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말씀입니다.
아주 쉬워요.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피상적으로 말고, 높은 산에서 시원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듯이 오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은 성공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시지요?

사랑을 하려면, 사랑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사양은 오히려 오만이 되는 겁니다.
진실한 맘으로 베푸는 사랑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후에는 몇 배 더 사랑하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 역시 빚지는 것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만큼은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했지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말라"

이 얘기를 뒤집어보면 "사랑으로 베푸는 것은 받아라. 대신 받은 만큼 너도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어서 빚을 지우라. 그것은 피차간에 괜찮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 고아처럼, 또는 사생자처럼 외골수 인생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사랑을 받으시고 그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66권은 모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예요..
그 사랑의 흔적과 증거를 매일매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맘껏 받아 누리면서 풍요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전도지에서 그런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갓난 아기가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것만 보면 위기 상황입니다. 그런데 조금 아래 그 아기보다 훨씬 더 큰 두 손이 아기를 향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기는 해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맨 아래 그런 글이 써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생략된 뒷 말이 뭘까요?
우리가 공중에 홀로 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큰 손이 언제나 우리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언제나 보호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

더 나아가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작정을 하는 겁니다.

지금의 삶이 권태롭습니까?
지금의 삶이 불안하고, 힘드십니까?
지금의 상황이 짜증나고 뭔가 체증이 있는 것처럼 무겁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그런 상황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위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품으로 여러분의 몸과 맘을 집어 던지십시오!
그 분의 품은 바다처럼, 우주처럼 넓습니다.
여러분은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 공중에 떠 있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든 여러분을 받을 준비를 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 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풍성히 체험하면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 다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손바닥에 내 이름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을 이루기까지는 절대로 우리를 떠나시지 않을 겁니다.
우리를 실족치 않게 하실 것이며, 우리를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황을 이해 못할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 분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고, 그분의 길은 우리보다 훨신 높고, 깊고 넓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신 그 사랑은 2000년 전에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습니다.

이 사랑을 믿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을 믿고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을 믿고 새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을 믿고 새 역사를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늘 엄청난 힘을 주시는 말씀이 있지요? (롬8:35~39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할 대상이 딱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며, 또 한 주일을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프린트하기 독자한마디


이전으로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개인정보취급방침 |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