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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도 주여 삼창, 하며 아주사 대부흥 재현 염원 /'농촌 목회=실패' 등식에 망치질한 두 목사
2016-04-15 00:51:19   read : 13517














미국인들도 “주여 삼창”하며 아주사 대부흥 재현 염원

110주년 맞아 열린 ‘아주사 나우’, 한인들 주도적 참여



▲아주사 나우에 참석한 중보기도자들이 인종과 민족을 뛰어넘어 미국의 대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1906년 LA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돼 전 미국을 강타했던 대부흥을 기억하며 재현시키려는 중보기도자 10만 명이 로스엔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을 가득 채웠다. 4월 9일(이하 현지시각) 열린 아주사 나우(Azusa Now)의 참석자들은 인종과 민족, 심지어 언어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으며 한마음으로 LA와 캘리포니아, 미국과 세계의 부흥을 부르짖었다.



▲한인 목회자들이 다 함께 무대에 올라 뜨겁게 기도를 인도했다.

이 집회는 미국 중보기도 단체인 더콜(The Call)이 주최했다. 루 잉글 목사가 이끄는 이 단체는 과거에도 수천 명에서 수만 명 단위의 중보기도 집회를 여러 도시에서 열었는데, 이번에는 LA의 가장 역사적 상징물 중 하나인 콜리세움에서 10만 명이 기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콜리세움의 공식 수용 좌석 9만 3천 석에 필드까지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10만 명을 예상했지만, 이미 행사 시작 며칠 전에 사전 등록자가 예상치를 수천 명이나 훌쩍 넘어서면서 주최측에는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한인들의 기도가 끝난 오전 8시 40분에 이미 좌석은 2만 석 가량 찬 상태였으며 점심을 넘어 저녁 때에 거의 대부분의 좌석이 찼다.

공식 행사는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진행됐다. 오전 6시부터 입장이 시작됐지만, 그때 이미 주차장이 대부분 만원을 이뤘고 행사장 출입구마다 긴 줄이 늘어섰다. 테러나 사고 등을 대비해 엄격한 보안 검색이 이뤄져, 긴 줄은 오전 10시가 넘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번 기도회는 기도, 설교, 찬양, 신유집회, 헌금, 새 신자 초청 및 결신의 시간 등으로 진행됐다. 주최측은 다민족의 연합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한인·유대인·라티노 크리스천 등 여러 민족 그룹이 기도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한인들의 경우, 루 잉글 목사가 직접 한인교계를 향해 "기도의 문을 열어 달라"며 행사 첫 시간을 배정했다.



▲기도자들은 북한의 구원과 주민들, 그리고 세계 평화와 한국의 통일을 위해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

수십 명의 한인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오전 7시 30분부터 무대에 올라 뜨겁게 기도를 인도했다. 먼저 신승훈 목사(주님의영광교회)가 한국에 복음을 전해 준 미국에 감사의 뜻을 표하며 "이 기도회를 통해 부흥과 연합을 기대한다"고 인사했다. 이어 김영길 목사(감사한인교회), 김인식 목사(웨스트힐장로교회), 김경진 목사(나성영락교회), 정기정 목사(샘물교회), 진유철 목사(나성순복음교회), 송정명 목사(월드미션대학교 총장)가 미국의 여러 현안들을 놓고 기도를 인도했다. 모든 내용은 영어로 동시 통역됐지만, 한인들의 "주여 삼창"에 미국인들도 한국어로 따라 기도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인 목회자들이 각각의 기도 제목을 놓고 뜨겁게 기도를 인도하고 있다. 미국인들도 이들을 따라 한국어로 “주여 삼창”하며 기도했다.

여러 기도 제목 가운데 미국인들이 가장 뜨겁게 반응한 주제는 다름 아닌 북한이었다. 진유철 목사가 아주사 대부흥과 평양 대부흥을 언급한 후 "오늘 이 기도회에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이뤄진다면, 가장 큰 응답은 바로 북한이 예수님을 향해 열리는 것"이라고 하자 미국인들이 일제히 큰 박수를 보냈다.

오전 8시 40분경 한인들의 기도회가 끝난 직후, 루 잉글 목사와 함께 무대에 올라온 한 여성 기도자는 "북한은 핵폭탄(nuclear bomb)을 만들지 말고 핵폭탄 같은 구원(nuclear salvation)을 받아야 한다"고 외쳐 다시 한 번 큰 박수를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석자 수가 늘어, 필드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기도했다.

한인들은 아주사 나우를 위해 한인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80개 교회와 24개 단체가 여기에 참여했다. 행사 전까지 교회별로 예배 때마다 중보기도하고, 당일에는 새벽에 버스를 빌려 참석하는 등 특별한 열심을 보였다.


한편 이 모든 집회는 유투브를 통해 언어별 별도 채널로 생중계됐으며, 최대 2만 명이 동시 시청했다.



▲한인 목회자들의 인도에 따라 기도하는 참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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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에 좋은 미혼자매 있는데…” 3개 교회 합작 ‘오작교’ 놓았네



서울 구로순복음교회에서 지난 9일 열린 ‘크리스천 가정세우기’ 행사에서 17명의 남녀 청년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구로구 구로중앙로 구로순복음교회. 1층 세미나실에 들어서자 원탁테이블 6개와 다과, 알록달록한 풍선 장식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어 여성청년 8명과 남성청년 9명이 들어왔다. 다들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4명의 간사들이 이름표와 음료를 건네며 자리를 안내했다.

이날 행사명은 ‘크리스천 가정세우기.’ 지난해 말 김봉준(구로순복음교회) 김용준(도봉순복음교회) 김경문(경기도 부천 순복음중동교회) 목사가 의기투합해 교회 내 신앙이 좋은 청년들을 연결해 주기로 약속한 게 이날 결실을 맺은 것이다. 17명은 모두 성품과 신앙측면에서 담임목사로부터 ‘인증’ 받은 청년들이었는데 부끄러운지 계속 아래만 쳐다봤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구로순복음교회 김경원 부목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여기 종이가 보이죠. 연도별로 여러분의 삶을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고 점을 찍은 뒤 그래프로 만들어 보세요.”

참석자들은 출생 이후 학창시절과 직장생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기 등 만족도에 따라 체크했다. 이어 차례로 나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권모(44)씨는 “나이가 많아서 결혼을 80∼90% 포기한 상태인데 목사님의 추천으로 이렇게 나오게 됐다”면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정형편상 취직을 일찍 했다. 지금은 작은 집도 하나 마련했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가정을 꾸린 뒤 아이를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35·여)씨는 “대학 재학시절까지 행복했는데 취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마음의 고통이 컸다”면서 “인생의 가장 큰 어려움 속에서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됐다. 지금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앞으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으면 행복한 감정이 높아질 것 같다”면서 “하지만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을 때가 되면 힘들어질 것 같다”고 하자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발표 후 남자 청년 2∼3명이 한 팀을 이뤄 여성 테이블로 찾아가 5분씩 대화를 나눴다. 이날 이모(38·여)씨는 3명의 남자 청년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이씨는 “다른 모임과 달리 신앙이라는 공통점 아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상대방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면서 “다른 교회도 참석자의 연령을 비슷하게 맞춘다면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웃었다.

이날 행사를 준비한 김봉준 목사는 “많은 청년들이 신앙의 배우자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면서 “뜻을 같이하는 교회가 젊은이들의 만남을 적극 주선한다면 신앙의 명문 가정을 세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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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목회=실패' 등식에 망치질한 두 목사

완주 들녘교회 이세우 목사와 영주 빛마을교회 이희진 목사의 '정주 목회' 이야기
김재광

1989년 한 목사가 시골로 내려갔다. 2010년 다른 한 목사도 시골로 내려갔다. 목회 시작 시기는 서로 20년 차이가 난다.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지역도 다르고 교단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목사 다 '정거'가 아닌 '정주'를 목표로 농촌 목회를 시작했다는 점 정도가 되겠다.

"목사님은 얼마나 있다 가실거유?"

1989년 이세우 목사가 전북 완주 들녘교회에 갔을 때, 교인들은 새로 온 목사를 환영하지 않았다. 들어 보니 교회 역사 40년 동안 왔다 간 목회자만 32명이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 있었던 목사가 4년 6개월을 보냈고, 나머지는 모두 1년을 못 버텼다.

"처음 올 때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어요. 근데 1년을 못 채우고 다들 떠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미자립이라서 생활비도 제대로 못 드리니까 할 말은 없는데, 이제는 어느 목사가 오든 정 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목사님은 얼마나 있다 가실거유?"

교인들의 첫 반응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기록을 깨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목사입니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에 오래 붙어 있을 겁니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대신 조건을 하나 달았다. 당시 교단에서 정한 목회자 최저생계비가 45만 원이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책정한 사례는 16만 원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급된 적이 별로 없었다. 목회자 생활비는 외부 지원에 의존했는데, 3개 교회에서 5만 원씩, 10만 원씩 후원을 받고 있었다.

외부 후원을 모두 끊기로 했다. 그동안 후원해 주신 데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더 이상 후원을 안 받겠다고 말씀드렸다. 교인들에게는 이제 외부 후원을 안 받을 테니 목회자 최저생계비를 교회에서 책임져 달라고 했다. 혹시 그 달에 사례를 못 채우더라도 다음 달에 나머지 부분을 덧붙여 받지는 않겠다고 했다. 일단 그 달 그 달 목회자 최저생계비를 책임지는 쪽으로 교회에서 힘을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27년이 흐르는 동안 목회자 사례가 미지급되거나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목회자가 뚝심을 가지고 교회를 지키려 하자, 교인들도 마음을 모아서 목회자 생활을 책임지려 했다. 미자립을 면치 못했던 교회가 부임 1년이 못 돼서 자립으로 돌아섰다.



▲ 교인들에게 떠나지 않겠다 약속하고 27년을 지내 왔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서울에서 온 젊은 여자 목사

2009년 이희진 목사는 대학원 졸업 직후 스물일곱 혈혈단신으로 경북 영주 산골 마을에 들어갔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15만 원의 빈집을 얻어 교회를 개척했다. 목사 안수 전 단독 목회를 3년 이상 해야 한다는 교단 규정이 있긴 했지만 그 때문에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농촌 목회를 사명으로 여겼다. 3년 후에 떠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교회 이름을 '빛마을교회'로 짓고 마을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서울서 온 젊은 여자가 참 별나게도 군다는 게 할머니들의 첫 반응이었다. 한 번 하고 그칠 줄 알았던 방문은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고, 홀로 집을 지키시는 할머니,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는 어르신들은 점점 젊은 여전도사의 방문을 낯설지 않게 여겼다. 처음에는 듣는 시늉도 잘 안 하시더니, 나중에는 고스톱 판을 멈추고 이야기를 들으셨다.

주변에 오래된 교회들이 있었지만, 마을 전도의 동력은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농촌은 교회-교인-주민의 관계 틀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착되기 쉬운 곳이다. 외부 유입 인구가 없고 구성원의 변동도 없다 보니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웬 젊은 여전도사가 와서 고요한 마을에 파문을 일으켰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울 큰 교회에 단기 선교팀을 요청했다. 1년 6개월이 지나자 마을 어린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린이 성도들이 하나둘 늘더니 17명까지 모였다. 작은 교회에는 어린이들로 북적였다. 시골 마을에서 심심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교회를 제집 드나들 듯했다. 젊은 여자 전도사가 시골 마을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한 사람'



▲ "1년 반 동안 '한 사람'만 바라보고 지낼 때, 이 사람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17명 아이들과 함께하는 농촌 목회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년이 지나고 돌연 지내던 공간을 잃었다. 집 주인이 월세를 2배로 올리면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가까스로 마을의 다른 빈집을 임시 거처로 쓰게 되긴 했지만, 여건이 너무 열악했다. 지네, 곰박살이, 모기, 파리 등이 출몰했다. 집 근처에서는 두엄 더미가 하루가 멀다 하고 타고 또 탔다. 냄새 때문에 어른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두세 달 만에 아이들 발길이 뚝 끊겼다. 이희진 목사는 그때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모두 떠나고 청년 자매 한 명만 남았다. 자매는 아스퍼거증후군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 왔다. 가뜩이나 과민하고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자매가 열악한 장소에서 목사와 일대일 관계를 맺어야 하니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이 목사는 그때 목회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고 했다. 자매에게 오히려 해를 입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1년 6개월을 한 명만 바라보며 지냈다.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 목사는 이때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믿음이 더 절실해졌다고 고백했다. 한 명 남은 자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소통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매를 끌어안고 기도하게 됐다.

그즈음 의외의 만남이 이어졌다.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서울의 한 교회 목사님이 은퇴 직전 교인이 고급 승용차를 선물하겠다는 걸 마다하고 빛마을교회 건축 비용으로 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임시 거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새로운 공간을 마련했다. 다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연이 닿은 감신대 후배들도 주말마다 내려와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기로 했다.

다시, 완주 들녘교회 이야기다. 이세우 목사는 27년 목회 여정 중에 기억나는 한 사람과의 관계를 떠올렸다. 교회에는 20년 넘게 홀로 장로 직분을 감당하신 분이 계셨다. 장로님은 한센병을 오랜 지병으로 앓아 오셨다.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장로님은 편치 않은 몸 때문에 새로 온 목사에 대해 부담을 느끼시는 듯했다. 평생 교회밖에 모르고 지낸 분이었지만 늘 불편한 몸이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이세우 목사는 장로님 댁에 일부러 자주 찾아갔다. 회의할 일이 있으면 찾아가고, 식사 자리도 여러 번 만들었다. 예배 후에는 손도 잡아 드리고 포옹도 하면서 격이 없이 대했다. 그런 모습을 본 교우들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이 목사는 그즈음부터 교회가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교회 안에 생기가 돌자 가장 먼저 동네 어린이들이 반응을 보였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처음에는 3~4명이었는데, 부임 이듬해에 갑자기 80명으로 늘었다. 마을에 아이들이 많았고 돌봄이 필요했는데, 여태 못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발걸음이 잇따르자 들녘교회는 당시 전라북도 최초로 공부방을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 들녘교회는 주일 오후 4시에 '석양 예배'를 드린다. 해질녘 풍광이 멋지기도 하고, 어르신들이 저물어 가는 빛의 아름다움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농촌에서 길어 올리는 '생명'

27년이 흘렀다. 5년 전에는 새 예배당도 지었다. 이세우 목사는 "농촌 목회가 '생명 살림'의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역지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후배 목회자들이 농촌 목회에 적극 뛰어들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대신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바로 '농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 목사는 부임 이래로 지금까지 줄곧 직접 농사를 짓고 있다. 지금은 2000평 가까이 논 농사와 밭 농사를 짓는다. 그는 후배 목회자들이 '경운기는 물론이고 트랙터 정도는 몰 수 있는 기술'을 갖추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농사 지을 땅을 마련해 직접 농사도 지어 보고, 농부들과 뒤섞여 지는 훈련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주 빛마을교회 이희진 목사는 공동체 식구들과 문화 사역을 벌이고 있다. 마을 잔치,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순회하며 창작 뮤지컬을 띄운다. 벌써 40곡 정도를 함께 만들었다. 유기 농업과 마을 품앗이 사역도 꾸준히 하고, 마을 카페와 도서관 사역도 내다 보고 있는 중이다. 농촌에 계속 있을 거냐고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목사 역시 농촌이 도시의 반생명적 문화의 대안으로 새롭게 조명될 것이고 교회의 역할이 크다고 했다.

농촌 목회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등식에 망치질을 가한 목사들을 만났다. 한 명은 27년째, 한 명은 7년째 망치질을 계속하고 있다.

목회멘토링사역원은 5월 2일(월) 대전 늘사랑교회에서 '마을을 섬기는 시골 교회 워크숍'을 개최합니다. 농촌 목회 현장의 고민을 나누고, 마을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교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시골 교회, 농촌 목회를 놓고 고민을 나누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워크숍 프로그램 및 참가 안내(신청서 접수) 바로 가기
문의: 070-8766-2312, meet@pastormentor.kr



▲ 빛마을교회는 감신대 신학생들의 공동체 훈련 터전이기도 하다. 신학생들은 여기에서 노동과 살림, 공동체적 관계 훈련을 해 나가고 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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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담임 목사님을 초빙합니다

인공지능에게 목사직을 맡길 수 없는 이유…사명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김수원

"알파고 담임목사님을 초빙합니다."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 초빙 공고 내용이다. 물론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가설이다. 일전에 있었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 대결을 보면서 번득 스쳐 지나간 생각이다. 앞으로 교회마다 만능 담임목사를 세우려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생각해 봤다.

이 알파고 목사의 능력은 하나님 다음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기본이다. 기독교가 세워진 이후 쌓여 온 모든 신학 자료를 섭렵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성경의 창조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직분론 등등 가장 성경적인 결과물도 도출해 낸다. 어디 그뿐인가. 신학의 방향성을 정해 주기만 하면, 보수 신학, 진보 신학 등 다양한 관점의 성경 해석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교회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해, 이를 대처할 방안도 제시한다. 이만한 목사와 신학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 능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도들의 관심거리와 시대적인 상황, 분위기에 맞춰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설교를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다. 눈물, 콧물 흘리게 하는 감동적인 설교도 가능하다. 남녀 가리지 않고 최고의 성대를 가진 사람의 목소리로 골라 들을 수 있다. 서울 표준어로 설교하다가 식상하면 저 멀리 제주 방언으로 설교할 수도 있다. 심지어 영어, 불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필요한 대로 세계 모든 언어로 통·번역도 가능하다.

게다가 최고의 상담 목회자로 변신해 교인들의 심리를 파악함은 물론이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신의 한수를 처방전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예언의 은사도 충만하다.

목회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도 교인들 입장에서 고민할 이유가 없다. 교인들 취향에 맞는 목회 스타일로 프로그램 선택이 가능해, 제직회나 공동의회의 결의만 있으면 업그레이드 한 방으로 만사 해결이다.

이 알파고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시는 동안 갈등할 일은 전혀 없다. 사례비 인상 문제로 얼굴을 찌푸릴 일도, 접대하려고 값비싼 호텔 식당을 전전할 일도 없다. 심방을 받은 후에 촌지를 건네지 않아도 되고, 체력 유지를 위해 건강식을 챙겨 드릴 필요도 없다. 재정 집행의 투명성을 이유로 감사(監査)할 일도 없다. 자식이 없으니 세습 걱정도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교회를 근심케 할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가.

좀 성가신 일이 있다면 정기적으로 충전기를 갈아주어야 하고, 한 주간 쌓인 먼지를 누가 닦아 줄 것인가 정도다. 이렇게 최고의 능력으로 목회하다가, 낡고 잔고장이 많아 일선에서 물러나도 걱정할 일은 없다. 설령 원로목사로 모신다 해도 교회가 그리 큰 부담이 아니다. 쉴 만한 작은 창고 공간을 마련해 드려도 불평이 없다. 은퇴 후 후임자에게 잔소리하거나 간섭할 일도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담임목사가 어디 있겠는가. 알파고 목사님 만세!

#2.

이제 꿈결에서 깨어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이런 만능 알파고 담임목사가 있는 교회는 과연 행복(평안)할까. 지금의 한국교회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까. 알파고의 만능성이 반드시 최선의 모습일까.

이 인공지능 알파고 목사의 만능성이 지니는 치명적 결함을 우리는 모르는 바 아니다. 첫째는 목사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하나님과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프로그래머의 OS(운영체제)에 따라 학습된 대로 움직인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철저히 계산된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아무리 스스로 판단하는 인공지능을 지녔다 해도 인간의 피조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알파고가 비록 목사로서 설교하고 온갖 신학적 지식을 섭렵했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아닌 인간(교인)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 그래도 목사랍시고 성경에 비추어 교인들의 죄악 된 모습을 위아래 눈치 보지 않고 감히 질책하는 도발(?)을 감행한다면, 그런 알파고를 계속해서 자신들의 담임목사로 두려고 하겠는가.

둘째는 이 만능 기기가 처음부터 이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알파고는 태생부터 지는 법을 모른다. 승리밖에 모르는 알파고를 통해서는 감동을 얻지 못한다. 이번의 세기의 대결에서 우리가 이세돌에게서 희망을 보고 감동받았던 이유는 뭘까. 끈질기게 최선을 다하면서 한 번이라도 이겨 보였기 때문이다(이기지 못했어도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이기기만 하는 존재는 완벽할지는 모르나 감동이 없다. 하나님도 야곱에게 한 번은 져주시지 않았던가(창 32:28).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 많은 세상에 전지전능한 영광된 모습이 아닌 낮고 천한 종의 형상으로 오셨다(빌 2:5-8).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고, 죽음으로써 이기는 지혜를 갖고 계셨다. 이것만을 봐도 이 땅에서 만능이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알파고와 같은 똑똑하고 화려한 경력의 목회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장 작고도 낮은 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예수님을 닮은 자들이 없는 연고다. 만능이 능사처럼 보이지만, 알파고 영성을 갖고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복잡다단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7-8)

그런데 문제는 목사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 기대대로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세례요한을 통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굴러다니는 돌처럼, 생명 없는 인간의 창작물인 저 알파고가 담임목사 자리를 꿰차게 될 날이 불현듯 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일이 어디 목사만의 문제겠는가. 장로는 어떠하며 집사와 권사는 또 어떠한가.

이 시대 하나님이 간절히 찾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지고, 이웃들과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하는 선한 그리스도인들이다(마 11:15-17). 좌고우면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다(롬 12:2). 어둠의 세상 가운데서 빛을 밝히는 우리들이다(엡 5:8).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거룩한 사명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은 불신앙이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능 기기가 우리의 사명을 대신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목사의 사역을 알파고에게 맡길 수 없는 이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김수원 / 태봉교회(경기도 광주)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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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신앙의 문제인가, 번영신학의 문제인가

복을 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복의 개념이 문제



▲ 김진규 교수(백석대 구약학).

오순절파의 영향으로 요즈음 '기복신앙'에 대한 우려가 상당히 많다. 소위 삼박자 축복을 강조하는데, 결국 현세적 복을 너무 추구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서 강단에서 복에 대한 설교만 해도 닭살이 돋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복에 대한 설교가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한다. 이런 우려들로 성경에 나오는 복을 설교하는 것조차 힘든 시대가 되었다. 어느 대형 교회 목사는 공공연하게 신학자들이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해서 복에 대해 설교도 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용어 사용에 대해서 좀 재고하자는 차원에서이다. 한국에서만 '기복'(祈福)에 대한 공격을 가한다. 미국에서는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복을 비는 것'(祈福)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예를 들면 'blessing' 자체를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나온 글들은 대부분 prosperity theology/gospel(번영신학/복음)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현재 샤머니즘 신앙에 사용되는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에서 차용해서 '복을 비는 것'(祈福)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타당한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복신앙'이 주로 한국의 샤머니즘에 사용된 용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예를 들면 '재수굿'에는 주로 현세적 금전과 건강과 장수의 복을 비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재수굿에는 영적인 복에 대한 개념이 없다. 샤머니즘에서는 복을 비는 대상이 귀신들이나 조상신이다. 그리고 복의 내용도 주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샤머니즘은 신앙에 따른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없는 민속신앙의 형태이다.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규정하는 경전 자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김성례, "기복신앙의 윤리와 자본주의 문화," <종교 연구> 27 (2002): 61~86).

이런 샤머니즘 용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쓸 수 있겠는가? 주로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 샤머니즘에서 복을 구하듯이 금전, 건강, 장수의 복을 주로 추구하는 신앙 집단들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먼저 현세적인 복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경은 현세적인 복을 무시하고 있는가?

우리가 먼저 성경이 금전이나 건강이나 장수의 복을 구하는 것 자체를 전적으로 금지하고 있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것 자체를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복들은 대부분 현세적인 복들이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4-6)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면서 구한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였다. 야곱은 이날 천사와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매달려 기도한 것이다. 그가 기도한 내용은 무엇일까? 내일이면 대면하게 될 형 에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분명하다. 즉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런 기도가 잘못된 것인가? 이런 기도가 기복신앙일까?

한나가 그렇게 오랫동안 술 취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한 내용이 무엇인가? 자식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닌가? 불임 여인이 자식을 구하는 기도가 기복신앙인가?

신약으로 넘어와서 야고보 사도는 병든 자의 강건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 5:14)

이어서 16절에는 "병이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야고보는 명하고 있다. 야고보가 명한 건강을 위한 기도가 기복적인 것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 제목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이다. 예수님이 당시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를 가르친 것이 기복적인가? 어떤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영적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는 '명백한 의미'를 무시하는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에 '일용할 양식'은 꼭 음식만을 위한 기도이겠는가? 이는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복의 개념이 구약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복에 대한 강조로 넘어간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에 나오는 8복은 모두 영적인 복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하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린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 등으로 모두 영적인 복을 강조한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현세적인 복을 전혀 무시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몇몇 말씀만 보면 이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29-30)

여기에 특이한 점은 주님께서 현세적인 복과 내세의 복을 분명히 구분해서 2가지 모두를 약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는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을 대속적인 가난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여기서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영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결코 영적으로 가난한 적이 없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정말 가난한 삶을 사셨다. 그는 공생애 중에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부요함에서 가난함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다는 '대속적 가난'을 말씀하고 있다(Ralph P. Martin, <2 Corinthians (WBC 40)>, 262~264).

이런 말씀들을 보면 신약성경은 영적인 복을 강조하지만 현세적 복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이 물질적인 것을 천하게 여겼다. 그래서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했다. 당시의 스토아철학이나 영지주의 이단은 물질세계를 천하게 여겼지만 신약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은 성도의 몸을 '성령의 전'(고전 6:19)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조건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오직 현세적인 복만을 추구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축복의 장이라고 여기는 신명기 28장에서조차도 현세적인 복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영적인 복이 우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신명기 28장 1-2절을 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신 28:1-2)

하나님은 먼저 복의 조건을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신명기 28장의 복은 한국의 샤머니즘처럼 손발이 닳도록 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곧 영적인 복 중에 복이다.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물질적인 복은 따라 온다는 뜻이다. 구약의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항상 전제된 것이다. 이는 도덕성과 윤리성이 전제된 복이다.

요컨대,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건강, 장수, 재물에 대한 복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먼저 우선되는 것은 영적인 복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이 기본적인 공식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에서 특정한 신앙 집단을 가리켜 기복신앙이라고 비난하는가? 그 이유는 영적인 것에 우선을 두지 않고 너무 현세적인 복을 강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에 성경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도 핵심 메시지인 십자가를 지는 삶이나 고난에 대한 강조점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오직 물질적인 복과 성공과 건강과 장수를 주신다고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때로는 고난이 우리의 복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했다(요 12:23). 그리스도를 본받는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두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부'가 한편으로 복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주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친다. 특히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가르치셨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도외시하고, 오직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고 축복만 따르게 되고, 부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복에 대한 편향된 가르침, 어떻게 분별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편향된 가르침을 가리켜 샤머니즘에서 사용하는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될까? 여기에 의문을 갖는다. 샤머니즘은 앞에서 본 대로 3가지 차원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1. 신앙의 대상이 다르다. 샤머니즘은 귀신과 조상신에게 주로 빈다.
2. 복의 내용은 오직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3. 말씀에 대한 순종과 같은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없이 무조건 복만을 달라고 한다.

그런데 복을 구하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이런 세속화된 복만을 추구하는가 의문을 갖는다.

1. 이들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다.
2. 복의 내용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일 수 있으나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지 않는가?
3.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없이 오직 복만을 추구하는가?

2번 항목의 테스트를 위해서 삼박자 축복에서 강조하는 요한삼서 2절을 보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2)

이 말씀대로만 기도한다면 먼저 영혼의 잘됨이 우선이다. 그리고 범사의 잘됨과 강건함이다. 범사의 잘됨과 강건함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 먼저 영혼의 잘됨이 우선인가가 중요하다. 적어도 이 구절을 올바로만 사용한다면 2번 항목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면 3번 항목은 어떤가? 이는 말씀의 원리를 아는 목회자라면 신앙에 있어서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배제하고 말씀을 가르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삶의 결과를 두고 평가해야 할 일이다. 삶의 결과 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물질적인 복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완전히 뭉개 버린 철면피가 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샤머니즘에서 쓰는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사용할 때는 상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복에 대한 설교 자체에 대해서 닭살 돋을 필요가 없다. 성경 자체가 복을 구하는 내용으로 가득하고, 복을 구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하면, '복'이라고 하면 무조건 현세적인 복만 생각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현세적인 복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영적인 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메시지도 '복음'(복된 소식)이라고 하지 않는가? 복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에 대한 바른 지도 필요해

그렇다면 요즈음 소위 현세적인 복에 강조점을 두고 현세적인 복을 추구하는 집단에게 적절한 용어는 무엇일까? 바로 '번영신학' 혹은 '번영복음'이다. 이는 미국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비판해 온 잘못된 신앙관을 가리킨다.

번영신앙은 예수 믿으면 반드시 잘살게 되고, 건강하게 되고, 장수하게 되고, 잘된다는 번영만을 외치는 신앙의 형태이다. 한국 땅에 나타난 이런 유형의 신앙도 '번영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이미 약 20년 전에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공동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 사용된 용어가 '번영신학'이었다. 그때 발표된 논문들에서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한자어로 '기복'(祈福)이는 말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적극 권장해야 할 일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비는 것은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구약시대의 제사장적 축복의 권리(민 6:24-26)를 행사하는 행위이다. 단지 바른 방향으로 지도해 줄 필요가 있다.

1.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구해야 하고.
2.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구하도록 지도해야 하고.
3. 말씀에 대한 순종과 같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복의 기초가 됨을 가르쳐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대상(우상들)에게 복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즉 도덕성과 윤리성이 문제였다. 이것이 전제된다면 복을 구하는 것은 성도가 가질 당연한 특권이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무엇보다 복중에 최고의 복인 복음의 축복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복이다.

그러나 때로 '고난'도 복에 포함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는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이들에게는 고난과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더욱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면 얼마나 큰 복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복'을 비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복이 어떤 복이냐가 더욱 중요하고 어떤 대상에게 구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 복에 합당한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는냐가 중요한 것이다.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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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변명도 기도가 될 수 있다

[책 소개] 박영선 <기도>(남포교회출판부)
강동석 기자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하나님, 도대체 계시기나 한 거예요? 하나님 안 계신 거죠, 그렇지요?"(91쪽) 같은 넋두리도 기도라 할 수 있을까. 박영선 원로목사(남포교회)는 이 또한 기도라 말한다.

"기도는 무작정 달려와 내뱉는 호소나 절규일 수 있고, 때로 변명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인격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두서없이 매끄럽지 않은 문장으로 기도하는 것이 그리 큰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칙만 내세우시는 분이 아니라, 깊은 공감과 이해로 우리를 대하시는 인격자이기 때문입니다." (127쪽)

박영선 목사의 <기도>는 '기도의 자리'를 되짚어 보는 책이다. 우리가 기도한답시고 버티고 있는 그 자리가 과연 올바른 위치인지 질문을 던진다. 기도에 대해 흔히 가질 수 있는 오해나 착각을 짚으며, 기도의 의미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신자의 태도를 다뤘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는 것



▲ <박영선의 기도> / 박영선 지음 / 남포교회출판부 펴냄 / 152쪽 / 9,000원

보통 교회에서는 얼마나 기도하고, 말씀을 읽었는지가 신앙의 기준이 된다. 저자 박영선 목사는 기도의 분량과 응답 횟수가 바른 기도, 바른 신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기도를 의무적으로 하는 숙제라고 생각할 때, 자신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도가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자들이 기도를 얼마나 많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흔히 '기도했더니 문제가 해결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기도한 것이 큰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랑이 아닌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16쪽)

저자는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 일하심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도가 단지 무언가를 받는 '거래 수단'이라면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는 제자리에 머물게 된다. <기도>는 이 지점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기도의 첫걸음이 이런 인식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응답받은 횟수가 많을수록 숙제를 완벽히 해냈다는 성취감이 생깁니다. 마치 기도 응답을 신앙의 책임을 완수한 성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잊히고 기도만이 홀로 남아 기도한 사람의 훌륭한 신앙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내세워집니다." (140쪽)

"기도 그 자체에 독립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홀로 존재하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일 수 없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계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간절함이나 치열함, 우리가 받은 증거나 안심은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입니다." (140쪽)

응답 없는 기도, 하나님의 침묵

<기도>가 다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다. 저자는 불의한 재판장 비유를 다루면서 응답 없는 기도의 불가해성을 살핀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때, 자기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를 내치는 일은 없으며, 기도의 응답을 내 눈 앞에 보이는 시점으로 제한하는 것은 인간이 원하는 해결 방식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약화되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의지가 없어지거나 약화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외면받는 일은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31쪽)

"기도의 궁극적 응답은 우리 당대에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되는 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완결은 인간이 원하는 해결 방식일 뿐입니다." (134쪽)

어떤 기도 같은 경우, 응답을 받는 시점이 당대가 아닌 그 이후로 미뤄진다는 말이다. 저자는 막막한 현실은 그대로 있지만, 그 현실에 대한 신자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몸부림을 치면서 현실을 견디는 것입니다. 눈물과 한숨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136쪽)


▲ "응석이나 절규조차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하는 말이라면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붙들어 가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기도의 표현이 어떻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이는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91쪽)

기도란 무엇인가

응답 없는 기도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좌절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기도는 결국 몸부림치고 현실을 견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인내 가운데 얻어지는 열매들은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또 다른 의미를 낳을 수 있을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저자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삶의 온갖 문제는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꽃씨를 심어 꽃을 피우십니다. 세상이 만드는 답과 하나님이 만드는 답이 다르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 주십니다. 어느 땅에서든지 창조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거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절망의 자리라서 피하고 싶어 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십니다. 만들어 낼 수도, 찾아낼 수도 없던 하나님이 거기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147~148쪽)

"우리가 드린 기도의 열매가 우리 생애 속에 다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는 낙심하지만, 현실이 우리를 삼켜 버린 것으로 끝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남루한 현실을 꽃밭으로 일구시는 하나님의 큰 일하심 속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149쪽)

좀 더 곱씹으며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은 기도에 대한 이해를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역사'라는 거시적 관점이 아니라,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기도를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저자는 '순종'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후의 걸음은 오롯이 현실과 부딪치며 기도를 실천하는 이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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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성 범죄에 빛을 비춰야 할 때[취재 수첩]

영화 '스포트라이트'로 본 목회자 성범죄와 교회의 은폐
유영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 유영 기자]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성범죄와 교회 차원에서 이뤄진 조직적인 범죄 은폐를 다뤘다. 보스턴 지역 신문인 <보스턴글로브>가 2002년 실제로 보도한 사건과 취재팀의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한 영화다. 가톨릭교회가 사회 주류인 보스턴에서 사제들이 저지른 아동 성범죄와 교회의 조직적 사건 은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용은 이렇다. <보스턴글로브> 스포트라이트(탐사보도) 팀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성추행 사건을 취재하게 된다. 사제 한 명이 저지른 범죄를 다룬 칼럼이 시작이었다. 9명을 거쳐 70명까지 확대되는 가해 사제들을 확인하며, 취재팀과 신문사는 충격에 휩싸인다. 법적 기록은 남기지 않고 교회와 피해자가 합의하도록 유력한 변호사들이 중재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숨겨진 이야기를 들춰내고, 범죄에 침묵했던 사람들을 깨운다. 이들이 들춰낸 이야기는 주류 사회와 손잡은 가톨릭교회가 숨기려고 했던 사제가 아동에게 저지른 성범죄와 교회가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사실이었다.

영화는 가톨릭교회가 범죄를 은폐하는 일에 보스턴 전체가 동참했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한 아이를 학대하는 일에도 마을이 필요하다." 피해자 변호사의 말이다. 심지어 <보스턴글로브>가 그동안 사건을 외면했다는 내용에서 기자들은 시쳇말로 '멘붕'을 경험한다. 피해자와 변호사가 <보스턴글로브>에 자료를 보내 취재를 요청했지만, 기자들은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한다.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성범죄는 한 사람 문제가 아니라 오랜 세월 이뤄진 뿌리 깊은 나무였다. 주류 사회는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는 눈 밖에 두었다. 사제들의 성범죄로 정신이상을 경험하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아직 살아있는 피해자들은 스스로 생존자라고 불렀다.) 불안함을 늘 안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보이는 예민한 반응에 피해자들은 더 밀려났다. 이들의 주장은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목회자 성범죄를 대하는 한인 교회의 태도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성범죄와 은폐는 현재 진행형 사건이다. 미국만 아니라 세계 각 곳에서 집단적 범죄와 조직적 은폐를 두고 조사와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이러한 성범죄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한인 교회에서 일어나는 목회자 관련 성문제는 더 심각하다. 한인 사회가 교회를 중심으로 집단성,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분위기가 여전한 탓이다. 교회가 눈감으면 사회적으로도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개신교회는 무수한 성 문제를 눈감아 왔다. 최근 일어난 E 교회 L 목사의 성 추문만 해도 그렇다. 뉴욕 교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다한 소문이 돌았다. 오히려 왜 보도하지 않는지 물어오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 사건은 조용히 지나가는 중이다. L 목사가 이전에 성폭행 혐의로 법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L 목사 변호사 비용을 지원했고, 피해 여성은 정신이상으로 매도됐다.

목회자가 성범죄를 일으키면 주변 사람들은 혀만 찰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교회가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E 교회의 경우, 사건이 더 커지기 전에 목사 사임으로 교회와 관계를 끊었다. 피해자가 사건이 더 드러나기 바라지 않는다는 말로 해결되었다고 강조한다. '스포트라이트' 속 가톨릭교회처럼 말이다.

교회는 사건 보도가 반기독교 정서를 부추긴다며, 취재와 기사화를 만류했다. 장로는 "다 해결되고, 조용해진 문제를 들추는 건 기독교 안티만 늘린다"고 말하면서 교회 편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교인들도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회복을 위한 노력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피해자에게 위로 연락만 할 뿐 다른 조치를 요구하지는 않는다니 말이다. 한 마을이 나서서 아이들 문제에 눈을 감은 꼴이다.


E 교회의 경우, 사건이 더 커지기 전에 목사 사임으로 교회와 관계를 끊었다. 피해자가 사건이 더 드러나기 바라지 않는다는 말로 해결되었다고 강조한다. '스포트라이트' 속 가톨릭교회처럼 말이다.

피해자 회복에 더 헌신해야

정신과 전문의들은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를 위해 문제를 덮으려는 태도가 능사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덮으려고 하는 주변의 태도에서 오히려 2차 피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주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 지가 중요하다. 없었던 일로 하라든지 피해자를 탓하면 2차 피해가 훨씬 더 심해질 수 있다. 주변에서 피해자가 고통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가해자에게 일방적인 분노를 표현할 수 없을 때, 피해자의 심리적 문제가 커진다. 흔히 '양가감정'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목회자의 성범죄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교인일수록 목회자가 저지른 성범죄에 일방적인 분노를 표현하기 쉽지 않다. 주로 목회자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까닭이다. 고마운 마음과 분노가 동시에 들어 혼란에 빠지기 쉽다.

'스포트라이트'에도 양가감정을 경험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사제들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영적인 부분까지 지배당하는 구조에서 성범죄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고마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성범죄 대상으로 삼아줘서 고마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사제가 범죄에 앞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어, 피해자가 사랑받는다고 느낀 부분에서 감사해 한다. 이러한 마음은 범죄를 당하고 나서 분노와 함께 피해자를 괴롭힌다.

심리 전문가들은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올바른 대책과 심리치료,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함께 극복해 나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먼저 가해자가 정확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교회와 한인 교회의 특성은 한국 사회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다. 성범죄에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전병욱 목사가 일으킨 연쇄 성범죄에서도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양가감정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 같다고 생각한 전병욱 목사에게 성범죄를 당한 후,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혼란함이 있었다. 스포트라이트에 나오는 피해자 말처럼 목회자가 저지르는 성범죄는 영혼에도 치명상을 입히는 큰 문제다. 사회에서 인식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회복적 정의가 필요하다

한동안 미국 법조계는 회복적 정의 개념을 중요한 화두로 법체계를 정립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법이 가해자 처벌에만 집중해 피해자 회복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메노나이트 등 평화와 회복, 화해를 강조하는 기독교 전통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아쉽게도 기독교가 차별과 혐오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세상이 회복적 정의를 들고나온 상황이다.

한인 교회가 성범죄 피해자를 위해 더 헌신해야 할 때다. 교회가 안정되고 있다는 주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지려면 말이다. 그래야 교회가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 있고,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에 가해자 편에 서서 범죄를 눈감아준 사람들이 이런 말은 한다.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필요하다. 세상을 위한다면 더는 알려고 하지 마라."

정말 사회에 좋은 역할을 하고 싶다면 가해자는 진심으로 사죄하고, 돌이키기 위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회는 피해자 회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자정의 노력이 있다면 외부에서 반감을 살 이유가 없다. 회개는 빛(스포트라이트)이 비칠 때 해야 한다. 선지자 나단의 말에 다윗이 회개했던 것처럼 말이다.

유영 neovoca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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