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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이 듣도록 돕는 설교형태: 귀납적 설교(I)1) 2015-12-17 09:49:50 read : 8205
김운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겨울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전쟁
2차 포에니 전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의 유명한 장군 한니발은 상상을 초월한 발상의 전환, 즉 패러다임의 혁신을 통해 전투를 늘 승리로 이끌어온 장수였다. 겨울에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코끼리 떼를 이끌고 넘어와 로마로 진격해 들어온다.
그는 눈 내리는 알프스의 겨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평가한다. 전투의 달인이요,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1812년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정복에 나섰다가 결국 군사들 대부분을 잃고 겨우 5천여 병사만 살아 돌아왔다.
완전한 참패였다. 참패의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추위 때문이었다. 자신 만만했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겨울을 잘 알지 못했기에 패배로 끝나게 된다. 한 사람은 겨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길 수 있었고, 한 사람은 잘 알지 못하여 패배하고 만다.
일전에 한 일간지에 상하이의 유통업계 생존전략이 소개된 적이 있다. 자고 나면 달라져 있을 정도로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상하이에서는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을 나날이 깨닫는다고 한 주재원이 고백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많은 유통회사가 세워졌다가 없어지는, 한치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장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정확한 소비자 분석과 그에 대한 발빠른 대응력에 좌우된다고 했다. 그래서 상하이에서 살아남는 유통회사는 흔히 세계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맥도날드가 자회사의 고유 판매방법인 셀프서비스를 상하이에서만은 포기해야만 했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판매전략이지만 상하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그 전략을 바꿈으로서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겨울 전쟁, 유통업계의 판매전략 만큼이나 치열한 것이 있다면 급변하는 이 시대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 사역이다. 오늘의 설교자는 변하는 시대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능력 있는 말씀 사역을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도 필요하고 오늘의 청중도 알아야 하며, 상황의 변화도 알아야 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말씀을 듣게 할 방법론(형태)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자들은 겨울 전쟁에 나서는 것만큼, 혹은 생존을 위해서 뛰는 사람들과 같은 절박한 마음과 그에 대한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설교 사역은 오늘 생명을 건져내고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확대해 가는 영적 전쟁과 같기 때문이다.
하찮게 여겨지는 소중한 것
영적 전쟁과 같은 설교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본 연재에서는 설교의 방법론, 즉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다루게 된다. 다른 요소에 비해서 설교의 형태는 설교자들에게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는 요소였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한가지 형태에 거의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었다. 설교를 듣고 돌아가는 청중들에게 오늘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묻는다면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모아 대답을 하겠지만 오늘 들은 설교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청중들을 당황해 할 것이다.
이렇게 설교의 형태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의미와 효과에 있어서 실질적이고 절대적인 요소”이다.2) 설교에 있어서 어떤 구조를 가지느냐는 설교의 효율성을 증대하며, 설교의 힘을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소중한 요소이다.
설교의 형태는 내용을 담기 위한 단순한 그릇이나, 선물의 포장 정도가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그 설교의 메시지와 목표들을 가장 잘 이루어 갈 수 있는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여 적절하게 활용한다는 것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중요한 과제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어떠한 설교의 형태는 하찮은 요소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를 역동적이게 하며, 명확성과 생명력을 가져오는 소중한 요소이다.
설교의 형태는 마치 진흙을 어떤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설교를 형성하는 모형(模型, shape)과 같은 역할을 하며, 설교 자료들을 배열하는 구조(structure)가 된다.3) 이렇듯 어떠한 모형에 담을 것인가와 설교의 자료들은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 설교의 중심 명제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지배하는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효과와 전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형태는 다양성해 질 수밖에 없다. 성경은 어떤 단일 형태로 되어지기보다는 다양한 형태, 혹은 방법론을 사용한다. “창조적인 설교를 위한 방법론적 접근”이라는 제목으로 계속되는 본 연재는 이러한 설교의 형태의 다양한 방법론을 강구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먼저 이번 호부터 몇 차례에 걸쳐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에서 제시된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형성된 현대 설교학은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구하면서 전통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추구하게 되었다.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청중들이 전혀 다른 청취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발전된 설교의 이론들은 오늘의 청중들이 어떻게 하면 말씀을 듣게 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점에서 1970년대 이후 형성된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명제로 정리해 볼 수 있을 만큼 오늘의 청중들에게 어떻게 말씀이 들려지게 할 것인가에 깊이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설교의 형태”가 중요한 이슈로 자리잡게 된다.4)
사람들이 듣는 방식
대학원 과정 세미나에서 농촌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한 학생이 진지하게 털어놓는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왜 설교가 시작되면 우리 교인들은 졸기 시작할까? 설교가 시작되면 졸지 않은 교인들은 왜 교회 밖을 주시할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하여, 열심히 외치는데도 왜 유리창 밖을 주시할까? 유리창 밖은 일주일 내내 언제든 볼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설교시간에 유리창 너머에만 시선을 두는 것일까?
그들의 온 관심을 설교에 쏟아놓도록 하고 싶은데 왜 그것이 되지 않을까?” 힘든 농사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해서 조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보지만 예배 후 함께 하는 애찬 시간에는 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커튼이라도 해서 창문을 가리고 싶지만 그렇게 풍경이 좋아서도 아닌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한국선교연구원에서 발표한 “1999년 한국교회 연감”에 의하면 한국에 약 4만여 교회가 있다는데,5) 그렇다면 매주일 4만의 설교가 선포되는 셈이다.
4만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는지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그런 쓸데없는 조사를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고 구태여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청중들이 왜 조는가 하는 문제는 설교자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피곤해서? 믿음이 약해서? 혹은 예배자의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간단히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 시간에 조는 문제는 오늘날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바울 당시에도 유두고라는 청년이 설교가 길어지자 졸았다는 기록이 있으며(행 20장), 17세기 미국 메사츄세츠주 청교도들은 교회에서 조는 사람들은 징치(懲治)하기 위해 아주 특별한 기구를 고안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긴 막대기에 조그만 나무 공을 줄로 매달아 만든 도구였는데, 긴 예배를 견디지 못해 조는 사람이 있으면 이 일을 위해 특별히 임명된 사람이 일어나 그 막대기를 들고 이 사악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무로 만든 공으로 머리를 때려서 깨웠다고 한다. 우리의 설교 가운데 설교자들이 깨어있게 하는 더 좋은 방법, 혹은 더 신사적인 방법은 없을까?
고민을 털어놓는 그 목회자에게 어떻게 설교를 시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설교를 진행하는지... 몇 가지를 물었다. 농촌 지역이었고, 연로한 교인들이 많기 때문에 쉽게 설교하려고 노력한다는 그 목회자는 성경말씀을 충실하게 강해하고, 그 뜻을 정확히 해석해서 설명해 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가지를 더 물었다. 설교의 초점을 사람에게 맞추는지, 아니면 신학적인 교리에 맞추는지를 물었다.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다가 아마도 교인들이 한참 바쁜 농사철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발뺌을 했다. 몇 가지를 토론하다가 설교를 그들의 삶으로부터 시작해보라고,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하면 듣겠는지를 깊이 고려하며 설교를 시작하고, 진행하도록 충고했다.
다음 주, 그 목회자는 오늘은 조는 사람이 없었고, 유리창 너머도 보지 않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설교를 구성했고, 어떻게 전개했는지를 물었다. 조직신학 전공이었던 그는 지금까지 그의 전공만큼 조직신학적인 원리를 따라 신학적인 교리를 충실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론을 다르게 접근했다고 한다.
그가 지난 주일예배에서 전했던 설교의 본문은 시 121편이었으며, 주제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정했다고 했다. 그 설교에서는 신학을 설교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설교를 할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고 한다. 심방을 다녀오는데 모내기가 끝난 논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을 보면서 힌트를 얻어서 그는 그렇게 설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모내기철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바쁘게 지냅니다. 모내기가 다 끝났으니 이제는 좀 한가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어제 심방을 다녀오다 보니까 모내기가 끝난 논에 사람들이 나와서 모내기가 끝난 논을 살펴보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종(移種)을 한 후에 깊이 심어지지 않아 물위에 뜬 모포기를 다시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조심조심 다니면서 물에 둥둥 떠있는 모 포기들을 다시 심어주며 돌보는 농부의 손길은 정성스러웠습니다. 애써 심어주었는데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물에 둥둥 떠있는 모 포기는 포기해 버릴만도 한데 농부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설교가 시작되었을 때, 아예 잠잘 준비를 하는 듯 하던 교인들의 눈동자는 달랐으며, 더 이상 창 밖을 보는 교인들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설교자는 그가 전하려는 신학과 교리에 충실했을 뿐, 청중들이 어떻게 듣는가에 대해서는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는 그는 청중들의 삶의 자리로부터 시작했다. 종전의 방식은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신학적인 명제를 첫째, 둘째, 셋째 대지를 나누어서 설명하는 형태였다고 했다. 졸지 않고 지키시는 하나님, 함께 하시면 지키시는 하나님... 아마도 그렇게 교리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춘 설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모내기가 끝난 논을 돌보고 있는 농부의 이야기, 즉 청중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들판에서 불렀던 노래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위험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오늘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심에 대해서 언급해 가는 전개형태를 취하여 설교하였다. 그러한 움직임이 진행되는 동안 청중들은 그들이 들판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물위에 떠있던 모 포기를 다시 심어주고, 그것이 잘 자리잡았는지 새벽같이 나가 보고,
그 중의 일부는 여전히 떠있는 보면서 다시 또 심어주고... 하던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지금 그렇게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온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귀로 듣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에 관해(about)에 배우고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을(of) 경험하게 되었기에 그들의 시선은 유리창 너머에 머물 수가 없었다.
진리의 말씀이 지금 그들의 심령을 파고 들어와 그들의 가슴에서 용솟음 치는데 어떻게 졸 수 있을 것인가? 설교에 있어서 신학도 중요하고, 교리도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과 같다.
식탁에 신론, 성령론, 기독론.... 등 신학적 용기만 늘어놓았지 그 안에 담긴 생명의 음식은 내놓지 않았기에 그들은 졸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다 왔으며, 그들의 피곤한 몸을 쉬게 하기에 아버지의 집은 얼마나 편안한가? 거기에다가 잠재우는 잔잔한 설교자의 목소리까지 합세하니 졸음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간단한 예를 통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으나 그는 설교의 형태에 있어서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한 것이다. 명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분석해주며, 그에 대한 정보와 논리, 개념 등을 제시해주는 형태에서 그는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느끼게 하면서 그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형태로 전환을 하고 있었다.
즉 좌뇌적인 방법에서 우뇌적인 방법으로의 전환을 이룬 것이다. 사실 1960년대 이후 인간의 두뇌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밝혀진 내용인데, 인간의 두뇌는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전혀 다른 두 부분으로 되어있음을 발견해냈다.
즉 좌뇌는 어떤 주제나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나누고 그것을 분석함을 통해서 이해하며, 주어진 정보를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며 세분하여 정리하는 구실을 한다.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좌뇌가 세부적으로 분석한다면 우뇌는 어떤 입력되는 내용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며 조각들을 함께 조립하고, 연결 지으며, 제시되는 내용들을 종합하면서 그에 대해 이해를 갖게 된다.
어떤 것이 효과적이고 우월한 방법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무리이겠으나 일반적으로 어떤 사실을 가르치거나 교리나 신학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는 좌뇌적인 방법이 효과적이겠고, 무엇을 경험하게 하여 감격하게 하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우뇌적인 방법이 효과적일 것이다.6)
그러나 설교가 어떤 교리적인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단순히 교리의 전달이 아니라 청중들의 삶의 변화(transformation)와 결단과 심령의 부흥(revival)을 지향해야 한다고 볼 때 두 방법론을 병행해야겠지만 이러한 설교의 목적을 위해서는 우뇌적인 방법이 더 선호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토론장”으로가 아니라 상상력과 이미지로 채워지는 “화랑”(畵廊)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7)
설교는 일종의 전달 행위라고 볼 때 유능한 설교자일수록 청중들이 어떻게 정보를 받는가, 어떻게 메시지가 전달되는가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즉 ‘어떻게’(how)에 해당되는 설교의 방법론과 청중들이 어떻게 메시지를 받는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청중들이 말씀 속에 몰입(involvement)해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청중들이 듣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었다. 그분은 사람들의 필요를 아셨으며, 그들이 어떻게 듣는가에 대해서 잘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설교는 청중들의 주의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메시지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 위해서 신학적인 교리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목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들은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온 가슴으로 느끼며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예수님이 늘 귀납적으로 설교하신 이유는 사람이 어떻게 듣는지에 대해서 잘 아셨기 때문이다. 청중들이 어떻게 듣는가가 고려되는 청중 중심의 설교(listener-centered preaching)는 오늘의 시대 속에서의 설교 사역에서 깊이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다.
귀납적 설교에 대한 이론적 이해
연역법과 귀납법은 헬라의 수사학에서 널리 사용되던 대표적인 방법론이었다. 전자는 보편적인 사실을 먼저 제시한 후 그것을 분석하고 설명해 나가면서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형태라면, 후자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보편적인 사실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연역법이 어떤 개념을 분석하여 전달하는데 효과적이며, 좌뇌적인 특성을 따라 전개되는 방식이라면 귀납법은 청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할 수 있는 강화(講話) 방식이며, 주로 우뇌적인 특성에 가까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귀납법의 특성을 설교에 도입하여 신학화한 사람은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의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에모리대학의 설교학 교수였던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이었다. 그의 기념비적인 책,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8)이 출판되면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고 대중화된다.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서 귀납적 설교는 전통적인 연역적인 형태의 설교에 대한 도전으로 등장한다. 연역적인 설교 방법론은 계몽주의와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발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문자시대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는 설교 형태로 기독교의 설교에서 300년이 넘게 맹위를 떨쳐온 설교의 형태였다.
연역적 설교는 보편적이고 명제적인 결론, 즉 설교의 주제나 중심사상이 먼저 제시된 다음에 그것을 몇 개의 대지 혹은 하위 주제들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예증하면서 권면하는, 그리고 그것들을 청중들의 삶의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어떤 주제나 교리에 대해서 명료하게 가르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반면 귀납적 설교 방법론은 전통적인 연역적인 방법과는 달리 인간의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의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갖는다. 다시 말해 “아하!”의 순간(Ah-point)을 향하여 발전되어 가는 형태로 각 부분들을 결론을 향하여 집약적으로 세워져 나가는 작은 단편들 혹은 움직임들로 구성된다.
강의나 강연이 주로 연역적인 형태를 취한다면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는 귀납적인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중요한 것은 설교에 있어서 독특한 움직임(movement) 혹은 전개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귀납적인 설교는 청중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자신의 느낌을 느끼며, 그리고 자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격려하는 기본적인 틀을 가진다.
그렇게 하여 청중들 자신이 메시지의 소유권을 갖도록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피동적인 위치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가진다.9)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를 통해 귀납적 설교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다루려고 한다. 첫째는 전개형태로서의 귀납적 설교와 설교 방법론으로서의 귀납적 설교가 그것이다.
이 두 요소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는 어렵지만 전자는 주로 크래독이 제시한 대로 설교의 방법론적인 틀과 전체적인 설교의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후자에서는 이러한 틀을 따라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크래독은 이 후자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번 호에서는 전개 형태로서의 귀납적 설교까지 다루려고 한다.
전개형태로서의 귀납법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귀납적 설교에 있어서 설교의 전개형태의 측면에 대해서 논의해 볼 것이다. 설교도 그렇고 성경의 본문도 말씀하려는 중심 개념(idea)을 가진다. 이것을 설교의 주제라고 한다. 어느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주제가 나타날 수도 있으나 가능하면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논리의 전개에 있어서나 메시지의 선명성에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설교의 주제를 전개하는 데에는 근본적으로는 연역적인 방법과 귀납적인 방법이 있다. 이것은 설교자가 결정해야 할 것이지만 설교의 목적, 본문, 혹은 청중들을 고려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귀납적 설교가 가지는 전개 형태에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귀납적 설교의 전개는 언제나 개인적이고 특별한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연역적인 움직임이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시작해서 특별한 적용이나 경험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귀납적인 방법은 그 반대로 움직인다.
주제의 전개나 강화의 전개는 언제나 모래시계의 각기 다른 부분과 같은 두 삼각형의 형태를 취하는데, 하나는 결론을 향하여 집약적으로 움직이는 귀납적인 전개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결론이 먼저 제시되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적용하는 연역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
귀납적인 전개는 청중들이 삶의 자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론을 향한 움직임을 따라 진행되어 간다는 점에서 청중들이 몰입(involvement)과 참여(participation)가 가능하게 해준다.
흔히 청중들은 그들의 삶의 경험들이 나누어지게 되면 고개를 들게 되어 있다. 예컨대 오늘의 설교에서 결론과 주제로서 “그리스도인은 기도해야 한다”로 정했다면, 연역적인 설교자는 그렇게 시작할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보여주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한다’는 주제로 말씀 드릴 때 함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기도하시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본문으로 삶의 고난 가운데서 신앙인들이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함을 잘 말씀해 줍니다. 본문이 주시는 교훈은 첫째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의 전개는 무엇보다도 청중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귀납적인 전개는 청중들이 듣는 방식에 대해 보다 철저하게 고려한다.
제가 아는 한 분은 IMF를 맞으면서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10년이 넘게 오직 성실함으로 세워온 회사가 부도나고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좌절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너무 바빠서 도무지 기도할 틈을 얻지 못하던 그가 회사 부도 후에 많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시간들을 기도하는 일에 쏟았습니다. 기도하는 일로 그의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앞의 전개가 기도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로부터 출발했다면 뒤의 전개는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우리들 주변에서 만나볼수 있는, 어려움 가운데서 기도로 이겨나간 사람에 대해 언급하면서, 고난 가운데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계속해서 고난으로 얼룩진 우리의 삶의 모습을 언급하고, 기도했던 사람들은 승리했음을 결론으로 전하는 형태를 취한다.
반면 연역적인 전개를 하는 설교에서 청중들은 ‘겟세마네의 기도,’ ‘기도해야 한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너무 익숙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신앙생활한 사람은 설교에 대한 전개과정을 거의 짐작하게 되면서 별다른 기대감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귀납적 설교의 가장 중심적인 이미지는 설교자와 청중들이 함께 말씀을 찾아가는 여행(homiletical journey)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연역적인 전개 형태는 결론이 제시되고, 설교가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면서 설교가 시작되기 때문에 말씀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의 특성이 배제된다.
결론이 먼저 제시되고 그것을 설명해 가는 형태를 취한다면 여기에서는 청중들은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며, 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지루함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가령 영화를 관람하는데 오늘 영화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가서 죽게 될 것이며,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될 결론은 이것이라고 제시하고 영화가 시작된다면 흥미는 상실되고, 기대감이 없이 영화를 보게 되기 때문에 지루하고, 감동도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귀납법은 청중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할 수 있으며, 그들이 함께 참여하여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청중들이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움직임을 따라 설교학적인 여행을 가졌다면 거기에 찾게 된 것은 진한 감동으로 남을 것이며 확실한 그들 자신의 결론이 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귀납적으로 움직이는 설교는 권고적이기 보다는 설명적(descriptive)이며, 명령적이기보다는 확인해 나가는(affirmative) 과정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그러므로 귀납적 설교의 전개에 있어서 설교자는 주로 산파(midwife)와 같은 역할을 한다.
셋째로 귀납적 설교의 전개 방식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되기 때문에 설교 한편이 완전한 일체성(unity)과 움직임(movement)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덩어리로 제시하는 공간적인 틀은 고정되고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기대감을 갖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귀납적 설교는 시작부터 결론, 특히 아하 지점을 향하여 집약적으로 움직여 나간다.
이야기와 경험, 혹은 성경의 이야기 등이 함께 엮어지면서 이야기와 같이 움직임을 가지고 진행해 간다. 그러므로 귀납적 설교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여행”(trip)이다. 이렇게 귀납적 설교는 여러 요소들의 배열과 움직임을 통해 나아가는데 이것의 성패는 설교의 구성에 있어서 일체성에 달려 있다.10)
단일 개념을 따라 움직임을 통해 전개되어 갈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단일 개념은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하고, 힘이 있게 하며, 효과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또한 설교 내용의 앞뒤가 통일성 있게 잘 조직되는 것은 설교의 진행과 움직임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진다. 그러므로 설교의 통일성을 설교의 한 목표를 지향하게 하며, 설교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로 집중되게 하는 효과를 갖게 한다.
생명력 있는 말씀을 위해
귀납적 설교는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하나의 방법론이다. 현대 설교학에 중요한 틀을 제시하면서 중요한 공헌을 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크래독의 이론들은 많은 것들을 시사해 준다. 청중을 정확히 알았던 예수님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면서도 적절한 방법을 따라 메시지를 전하셨다.
주님의 충성스런 종들이라면 그러므로 효과적이지 않는 방법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청중들이 어떻게 잘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오늘도 말씀의 역사가 계속해 일어나게 할 것인가는 충성스런 설교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사여야 한다. 귀납적 설교는 청중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그들이 듣도록 돕는 하나의 설교 방법론이다.
다음 호에서는 귀납적 설교의 방법론과 실제에 대해 언급하게 될 것이다. 18세기 영적 부흥기에 행해졌던 설교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였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직접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오랫동안 설교의 특징을 이루어 온 흐릿하고 냉냉하고 무겁고 생명 없는 전달 양태를 과감히 던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믿음의 말씀들을 선포했으며 생명으로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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