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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
2015-12-16 16:12:50   read : 6708

김 운 용(장신대, 기독교예전/설교학)

시작하면서: 설교의 중심―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가 전한 복음 메시지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 있었고, 모든 가르침과 설교에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가 있었다.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공생애의 시작과 함께 갈릴리에서 행하셨던 최초 설교의 중심 골자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선포의 요약이었으며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그의 비유는 늘 "하나님 나라는 ...과 같으니..."라고 시작된다. 그래서 노오만 페린은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라고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실 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를 기도하라고 하셨고, 팔복산에서 전하신 산상수훈도 하나님 나라의 약속들을 담고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지상 생애 가운데 가장 중심 되는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설교에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존 브라이트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언제나 중심 되는 주제가 되어 왔지만 안타깝게도 언제부턴가 오늘의 설교 가운데는 하나님 나라가 중심적인 자리를 내놓고 있다. 물론 단순논리로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역에서와 같은 자리는 놓치고 있음은 확실하다. 하나님 나라는 오늘날 설교에 있어서 본질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데이빗 버트릭은 이러한 현상을 묘사하면서 별안간 사라져 버린 별과 같이 오늘날 강단에서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한때 설교자들은 주님께서 행하셨던 설교를 함께 공유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청중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초청한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 전혀 다른 사회인 교회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새로운 실재로서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임재의 "미리 맛봄으로서의 예배"를 경험하며, 성만찬 상에서 떡이 떼어지고, 포도주가 부어질 때 그 은혜의 "향연"에서 기쁨 가득할 미래를 미리 맛본다.

그리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서 소금처럼,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속에 들어온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의와 통치하심을 언제나 최우선 순위로 두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통치하심이 중심을 이루던 하나님 나라 목회 사역은 점점 멀어지는 희미한 불빛과 같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신학계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들은 활발했지만 강단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아직 깜박거리는 희미한 불로 남아 있다.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주의 기도를 암송하지만 그 정확한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읊조리고 있고, 별다른 감동이나 기대, 기다림도 없이 반복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언어들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넘치는 경이감은 상실되었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설교는 대신 늘 과거적인 사건에 얽매여 있게 된다.

버트릭은 이런 현상을 오늘날의 설교는 마치 어떤 강박관념에 묶여 있듯이 "옛날 옛적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인 성경의 역사"에 묶여 있는 상황으로 묘사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현재적인 사건이나 미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감격이나 흥분을 잃어버리고, 오직 과거의 사건에 고착되어 있다.
오늘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역사 하심이나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사건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도 설교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설교를 계속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급변하는 시대인 21세기에도 계속되어야 할 설교는 예수님이 중점을 두었던 설교여야 한다. 메시지의 본질은 바뀔 수 없는 것이기에 오늘의 설교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 신학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는 어떠한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며, 어떠한 사실을 추구해야 하는가? 이러한 점에서 본 논문은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에 대한 하나의 설교 신학적 접근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

예수님의 설교가 그러했듯이 오늘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중심을 이루는 설교, 즉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가 되게 하기 위해 설교자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다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아주 풍성하면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상태를 지지하거나 옹호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고, 사회의 구조와 관습을 깨뜨리기도 하고 새롭게 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이상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하나님 나라를 현재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로 이해할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이 땅의 영역인가 아니면 피안의 영역인가가 여전히 대칭을 이루면서 가늠되고 있다.

또한 공간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통치개념으로 볼 것인가, 또한 이미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아직 미래에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이 논의되었고, 학자들마다 타당한 논리들을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상이한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실 때나 비유를 통해 가르치실 때 그 의미를 정의해주신 적이 없었다. 그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최소한의 공통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던 것 같다.

그 말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위해 거의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고, 청중들도 특별히 질문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나라"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던 같다.

다양한 논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도 어떤 하나의 모델이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형태와 시간적, 장소적인 관점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이해들이 모두가 성경으로부터 유추되고 있다는 점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단일의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신학적 이해를 "모델"(model)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특별히 신학적 모델은 신비를 이해하고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샐리 맥패그(Sallie McFague)는 "모델은 본질상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은유"라고 했다.

즉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신학적인 주제나 현실을 설명하거나 탐구할 때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신학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공식화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위해서 구성된 모델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논의된 것들이어서 이것을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들은 "미래 소망의 모델"과 "현재적인 축복의 모델," 그리고 "순수한 선취(anticipation)의 모델"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델과 관련하여 스나이더는 그렇게 주장한다:

만약 성경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천상적이면서도 지상적이고,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며,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과 피조 질서의 본질을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둘 다에 의해서 임하나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으로 임하나 강력한 계시나 단절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시점이나 순간들이 있다.

성경은 인자의 최후 강림의 날을 대격변의 절정으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 나라의 모델들을 연속된 선 위에 나타낸다면 지상의 유토피아는 한 끝점이 될 것이며, 하늘의 도성은 다른 한 끝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모델 중 어느 것도 완전히 성경적이거나 완전히 충분하지는 않다.

이와 같이 성경이 언급하는 하나님 나라는 한 두 가지로 단정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개념이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대로 사실 하나님 나라는 "신비" 혹은 "비밀"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신비의 측면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다중적인 의미로 혹은 상반되는 개념들로 제시된다.

그래서 스나이더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신비"라고 칭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는 더 깊이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행위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참여와 응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또 어떤 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믿음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성육신의 신비와 얽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비이다.

즉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곳(롬 11:33)에 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인간의 역사와 인격, 그리고 문화의 신비가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 중에 어느 하나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를 들었던 1세기 청중들도 이에 대해 다양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의 신비의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당시에 하나님의 왕국(realm)은 뜨거운 이슈 중의 하나였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온 땅을 흔들어 놓을 것이며, 이 땅의 악한 왕국들은 다 망하게 될 것으로 믿었던 종말론적인 긴박성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제국이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권세자들은 흩으시고 하나님의 신정을 친히 베푸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에도 다양한 주장들이 나타나고 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즉 예수님과 함께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보는가 하면, 예수님까지도 유대 묵시적인 영향을 받아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양극성을 보여주며, 긴장점을 만들어 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극성을 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양극성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면서 이해하고, 선포할 수 있는 개념은 무엇인가? 브라우어(Brauer)에 의하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하나님의 왕권 통치 혹은 주권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하나님이 개인과 사회의 모든 삶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통치가 아니라 아주 독특한 통치이다. 유대교가 율법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와 만났다면 신약성경은 아주 새롭고도 독특한 형태로 이미 임하였다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면 이미 "너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도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으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을 통해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모든 시대가 보기를 원했던 것이 이제 여기(here),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안에서 옛 질서는 끝이 나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삶이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는 삶에 대해 단순히 진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권능, 그리고 힘이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새로운 선언이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는 구약과 신약을 묶어주는 틀이며, 모든 시대가 보기를 열망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선언한다. 예수 안에서는 옛 질서는 끝이 나고 이제 새로운 질서(new order)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Now)"과 "새로움(New)"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는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제에 대해 묻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형인가 아니면 미래형인가? 즉 오늘에 실현된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 도래할 것인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혹은 "너희 안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는가 하면(막 1:15),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마6:10). 그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며, 이미 성취된 개념으로 제시되면서도 아직 성취되지 않은 개념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여기의 개념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저기의 개념으로도 나타난다. 때로는 희망과 성취, 시작과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소개된다. 이러한 다양한 개념들을 하나로 묶을 뿐만 아니라 통일성을 갖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역동적인 개념"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이해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통일성과 일치성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행적들과 말씀들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하여 볼 때 현재시제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구약성경에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일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신약성경의 중심부에도 놓여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갑작스럽게 중요한 시제(時制)의 변화를 보여준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승리는 언제나 미래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언제나 종말론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그러한 사실들은 미래시제로 표현된다: "보라 그날이 오리라"; "그것은 그날에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현재 서술형으로 바뀌고 있는 시제의 변화를 보게 된다―"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새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다는 복음의 소식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들을 실재의 사건으로 바꾸었으며, 오늘 그 실제를 맛볼 수 있게 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약속의 성취로서의 "새 것"(the New)이며 오늘 "여기의 사건"(the Now)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언제나 현재시제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지금"(now)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설교에 대한 묘사를 보면,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을 본문으로 삼아 말씀을 전하시면서 "오늘"(today),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다.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에 관해 설교하시면서 종말론적인 강력함을 가지시고, 오늘, 지금 여기에 임하였음을 선언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전파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설교는 언제나 예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보내심을 받았던 사도들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선포의 내용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과 동일시하거나 병렬로 제시하고 있다.

사도들의 증거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마지막 장인 사도행전 28장도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의 일로 권하였다고 증언한다(행 28:23, 30-31). 이와 같이 초대교회와 설교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전파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며, 기대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으며 경험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신다. 그래서 터툴리안이 말한 "신약성서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는 의미는 이것을 뜻한다.

메시아의 향연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몰트만이 주장한 대로 예수님은 "메시아적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그것은 언제나 그의 설교의 중심 주제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메시아의 향연으로 묘사하셨다. 메시아의 향연은 복음에로의 초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허락하시는 은혜의 향연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자체가 죄인들을 은혜의 세계로 부르셔서 가지신 메시아의 향연이었다.

예수님이 비난받고 반대를 받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율법적으로 완전치 못한 죄인들을 가까이하고 그들과 음식을 먹으며 교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버트릭은 이것을 "죄인들과의 파티"라고 명명한다. 이 "향연"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은 사실 종교적인 이슈였다.

비난의 이유는 유대인의 정결법을 깨뜨리고 있었기 때문이요, 의인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향연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신뢰해 왔던 하나님의 구원사의 성취이며, "약속된 메시아의 향연의 상징적인 경축"이었다. 메시아 향연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파토스(pathos)이며, 예언자들의 전통의 완결점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 메시아의 향연은 모든 사람, 모든 지역을 향해 열려있는 개방적인 특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으며, 향연의 공동체는 누구도 배제될 수 없는 포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그러한 향연을 배설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누린다.

은혜로 주어지는 향연을 거절하는 모든 기득권자들 대신에 거리에 부랑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그 문이 열려진다. 이제 제자들을 그의 이름으로 보내시며 왕국에로 초대하도록 하신다(마 22:2-10). 예수님에게서 성취되고 있는 메시아의 향연은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그 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기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메시아 향연의 대상이다. "만민"과 "모든 민족," "열방," "모든 얼굴"로 표현되어 그 범위가 범세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심 내용은 생명, 풍성함, 해방, 치유였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꿈꾸었던 메시아의 향연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다. 버트릭은 메시아 향연의 대상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있는 메시아의 향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난한 사람들을―그래서 그 사회 속에서는 자동적으로 정결치 못한 사람들이 되었던―배제하고서 원을 그렸을 때, 예수님은 보다 넓은 원을 그리셨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국외자들까지 포함한 전 세계를 지향하셨다.

약속된 메시아의 향연의 생생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비전 안에서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경축의 사건이었으며, 포괄적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포근한 구원의 은혜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기독교의 설교는 메시아의 향연에로의 "초대"로서의 특성을 가진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음을 선포하시면서 사람들을 그 나라에로 초대하신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설교자들로 세움 받은 제자들로 하여금 "길거리로 나가"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요청하셨다.

이 초대는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 배설하는 향연이 가져오는 생명의 풍요에로의 부르심이었다. 그 초대는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서 만인을 향한 것이었고 무조건적인 것이었으나 반드시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향연에 초대로서의 설교가 가지는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초대를 받는 사람은 이제 나아가던 길에서 돌이켜 은혜의 부름으로 나아가는 "응답과 되돌이킴"을 요청 받는다.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대는 메타노이아(Metanoia)를 전제하는데, 그 나라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에게 직면해 온 회개(Umkehr)에로 인도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새로움의 세계로의 인도이며, 메시아가 가져오는 생명과 풍요에로의 인도이다. 그 초대에 응하여 인도하심 가운데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자리로부터의 메타노이아를 요구받는다.

복음의 메시아적인 선포는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부른다. 성도들이 듣는 그 부름은 메시아 공동체인 교회로의 입교인 세례에로 인도한다. 이러한 세례를 가리켜 몰트만은 "단번에 유효한 시작의 표징"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시작된 초대받은 삶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재정 하신 성만찬에로 나아가게 되는데, 몰트만에 의하면 이것은 "도상의 표징"이다. 이러한 표징은 메시아의 향연을 누리게 하며 그의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권을 허락 받게 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를 누리며 희망하게 한다.

메시아의 향연에 초대로서의 설교가 가지는 두 번째의 특성은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행해진다는 점이다. 설교는 종말론적인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선포라는 점에서와 그의 임재 혹은 다시 오심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간구로 시작되고 종결된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다.

몰트만은 교회가 종말론적인 공동체임을 밝히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를 동시에 종말론적 구원 사건으로서 설교하는 그리스도의 선포에 참여"하는 공동체로 규정한다. 아람어 표현인 "마라나타!"는 몇 가지 형태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이다.

긴박한 요청의 뜻으로 해석되면 "주 예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의미가 되며, 동시에 신실하게 믿음으로 함께 모인 공동체 속에 "주님은 오셔서 현존하신다"는 선언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이다.

제프리 웨인라이트는 이 말이 가지는 힘은 여전히 오고 계시며,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실 것이라는 임재 하심에 대한 약속을 주시는 분을 향한 "환호성"에 있다고 했다. 교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대망하며,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변함없이 임재 하심에 대해 환호하며 그 사실을 경축하고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늘과 땅이 이어지며, 현재와 영원이 연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며, 그 임재에로 새롭게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의 예배와 설교는 종말론적인 특성을 가진다. "찬양과 말씀 봉독과 가르침, 기도와 성찬을 거행하기 위해 모이는 기독교 예배의 모임은 그 자체가 종말론적인 표징"이다.

초대 교회로부터 예배의 날이었던 주일을 "제 8일"(eighth day)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그 주간의 시간과 "다가오는 미래에 참여"하는 날로 이해했다. 이것은 1세기 말, 혹은 2세기초의 편지로 알려진 "바나바의 서신"에도 "제 8일의 시작," "다른 세계의 시작"으로 이해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자신을 드러내시며 천국으로 승천하신 제 8일을 즐거움으로 경축하는 날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설교는 "제 8일"에 함께 모여, 오시는 주님, 이미 오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임재 하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경축하는 메시아의 향연이며,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새롭게 선포하는 종말론적인 행동이다.

세 번째로 메시아의 향연에로의 초대로서의 설교가 가지는 특징은 "회상"이다. 회상은 기독교 예전에서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공동체인 교회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회상을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 된 사람들의 가장 요소이다. 이러한 특성은 주의 만찬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특성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명령에서 "기념(anamnesis)"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사건의 회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이나 기념의 뜻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사건으로 경험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본래 히브리 민족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현재 속으로 끌어와 새롭게 경험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받은 것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현재적인 구원의 역사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제 메시아의 향연으로서의 설교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위를 위하여 일어났던 구원의 역사를 우리로 기억 속에 회상하게 해준다. 그리스도의 해방하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현재화하면서 미래가 선취되고 이 희망을 축하하게 한다.

이러한 향연에서의 회상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실 미래와 영광의 예표로 역할 하게 되며, 현재화시켜 준다. 이러한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로 인도하는 세계의 모든 세력들과 법칙들로부터 해방해 주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미래를 확신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루돌프 보렌은 기독교의 설교는 "그 자체가 회상"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회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회상은 모든 설교의 근본 구조"라고 주장한다.

넷째로 메시아의 향연으로서의 설교는 세상 속에로의 "참여"를 강조한다. 말씀의 선포와 세례, 성만찬, 기도 등을 통해 메시아의 향연을 맛본 공동체는 이제 성령의 중재와 권능을 통해 자신을 뛰어 넘어 고난 가운데 있는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게 한다.

메시아적인 공동체는 이제 세상의 고통과 하나님의 미래 안으로 참여하게 된다.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향연을 맛본 공동체는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섬김의 공동체로 그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교회는 필연적으로 세상과 타인의 고난과 하나님의 희망의 미래에로 참여하도록 규정된 공동체이며, 몰트만이 말한 대로 성령의 현존 아래 있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성령의 현존 아래 있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여로부터 시작된 공동체였으며, 하늘 보좌를 떠나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세상과 사람들의 고난에로의 참여였다.

이것은 성만찬적인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세상을 위해 화목제로 주시는 행동이었다. 메시아의 향연을 위해 되돌이킴, 혹은 회개를 요청 받았던 사람들은 이제 그 향연을 맛본 후에 이제 다시 세상으로의 참여하도록 강권함을 받고 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만찬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고, 의심의 여정을 벗어나야 했다면, 그 향연을 맛본 후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음(눅 24)은 이러한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에 대한 사도적인 선포를 통해 성장했고, 선포의 행동을 통해서 살고 있다면 그들은 이제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의 고난의 삶에로 참여하며, 하나님의 미래―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는다. 이런 점에서 메시아적 향연으로서의 설교는 사회적인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이 향연에 동참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축하하고 기뻐하면서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는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로서의 메시아의 향연을 즐기는 공동체이며, 장래 완전히 성취될 메시아의 향연을 기대(anticipation)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교회의 친교는 교회를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한 희망 안에서 자신을 "메시아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할 때 바로 교회는 성령의 현재와 과정 안에서 자신의 현재와 자신의 길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 공동체가 누리는 향연은 "마지막 때의 구원의 잔치의 선취"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시온에서의 민족들의 큰 기쁨의 잔치"(사 25:6-8)에 관한 예언적인 약속의 지평 안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

기독교의 설교는 메시아의 향연의 특성인 민족들의 종말적인 평화와 기쁨의 잔치에로 초대의 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또한 기독교 예배의 특성이기도 하며, 공동체의 삶의 특성이기도 한다. 몰트만은 그러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메시아의 향연은 메시아 시대와 그것의 표징의 언어에 속한다. 이것은 함께 모인 공동체의 잔치인데, 그 향연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경험된 해방에 응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태동의 표징으로서 세례를 베풀며, 주님의 식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사귐을 기대한다.

메시아의 향연은 그리스도의 회상을 새롭게 하며, 그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메시아의 향연은 회상과 희망을 오가면서 매일의 삶을 세워 나간다. 메시아의 향연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 가는 엑스타시는 결코 아니며, 이 세계의 질적인 개조(alteration)에 대한 체험이다.

설교의 중심 주제로서의 하나님 나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1세기의 수많은 청중들에게 "완전히 크고 새로운 것"을 그들에게 약속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이루셔서 그들 가운데서 맛보게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큰 것"이라고 이해할 때 우리는 다분히 물량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건으로서 운동과 도래, 동 속에서 있는 것으로서 파악되고 이해될 수 있으며, 그것이 선포되는 곳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계속해서 오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미 당도하여 오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생성되고 있는 것"이며, 현재와 미래에서의 하나님의 활동하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선포로 연결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그 나라가 회중들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사람들을 깨우며, 그 나라안으로의 초대가 일어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존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선포와 함께 우리 가운데 존재하게 되었다(눅 17:21).

그것은 피안적인 것이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실재가 된다. 선포를 통해 이제 피안적인 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침입해 들어오시며, 점령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사건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의 모든 행위의 통합인 목회는 선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교회의 선포는 하나님의 현존과 통치,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인의 봉사"이다. 증인으로서의 설교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현존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자로 세움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설교의 중심 주제가 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여기에서는 목회의 가장 소중한 직능은 선포에 있으며,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하는 설교의 중심주제라는 전제하에 몇 가지 관련 주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선언이다. "나라"로 번역되는 ‘바실레이아’는 "왕국"의 관점을 강하게 포함하는 단어이다. 특별히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 백성들을 대대로 다스리는 합법적인 제사장적인 왕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이다. 이것은 국가적인 군주나 대속적인 왕을 의미할 때 쓰여졌다. 또한 이 단어는 왕의 존재, 왕의 속성, 그리고 왕의 나라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여진다.

이것은 통치의 의미를 강하게 포함하는 단어이며, 신정정권(theocracy)과 깊이 연관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사상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간절히 대망 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이 되시며(becoming), 왕으로 존재하시며(being), 왕으로 다스리심(acting)을 고백했다. 그는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공의의 심판과 구원의 능력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시다. 혹자는 이러한 군주적인 이해는 너무 억압적이고, 전제적이라는 점에서 거부하거나, 혹은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강조하는 말이며, 통치의 특성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이사야는 이러한 왕 되신 하나님을 "평강의 왕"으로 묘사하며, 그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될 것이며, 영원히 유지될 것이고,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성취되어 갈 것임을 강조한다(사 9:7).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다. 하나님의 왕되심과 관련하여 중요한 또 하나의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믿음의 고백이었으며 비전이었다. 이것은 믿음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으며 유지케 했던 원동력이었다.

이 한 문장은 여호와께서 왕되심(becoming)과 왕으로 존재하심(being), 왕으로 통치하심(acting)을 설명해주는 성경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원천으로서의 내용과 관련된 표현이다. 이 말은 모든 성경에 나오는 선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으며, 교회 생활의 가장 중심 되는 신앙고백이었다.

그런 점에서 "여호와의 통치"는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주제요, 교회의 삶의 중심 내용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의 선포의 주제여야 한다. 제임스 메이(James May)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찬양의 찬송으로서의 믿음의 공동체인 시편 공동체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제시되는 주제라고 밝히고 있다.

선포의 기원은 찬양이었으며, 찬양은 스피치의 장르에 속했는데, 그 찬양에는 언제나 이 문장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찬양을 통해서 회중들이 믿고 있는 바와 고백하는 바를 표현하며 함께 나누는 형태였으며, 이러한 신앙의 모임과 선포의 가장 중심 되는 주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고백의 성격을 가졌으며, 또한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선포의 특성을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어느 시대에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면서 기뻐하고 찬양하였는가 하면, 어느 시대에는 숨겨져 있어 인식하지 못하게 되므로 절규하고 탄식하기도 한다. 이것을 윌리암 존슨은 "하나님의 통치의 실재(reality)와 숨겨짐(hiddenness)"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 땅의 삶의 한복판에 실재하는 것이면서도 신비 가운데 감추어 있다. 그러므로 신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밝혀내고 드러내는 것은 신학의 임무이자 설교의 중요한 임무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고백하는 것은 자연과 역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오늘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 가운데서 친히 역사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서 "새로운 일"을 행하심으로 통치하신다(사 43:19, 계 21:5). 그럼으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구한다는 것은 오늘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앞으로 있어야 할 다가오는 현실 사이의 긴장 가운데서 사로잡힘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때때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인식되지 않고, 감추어진 것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밝히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단코 이해할 수 없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의 주제는 회개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새로운 세계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되돌이킴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오는 사람은 모두 옛 세계의 단절을 필요로 하며, 그 후에야 다가오는 새 세계의 태동 속으로 인도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향연은 당연히 옛 세계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셨다(막 1:14-15). 이것은 하나님의 날의 빛 안에서의 새로운 삶, 새로운 변화를 뜻하며, 하나님 나라 시민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산상수훈은 되돌이킴과 새로운 추구―"하나님 나라와 그 의"―로서의 삶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통치하시는 그분의 통치하심과 지배하심 가운데서 밝은 낮처럼 사는 삶을 추구하도록 요청하신다.

이것은 몰트만이 말한 "살아있는 희망에로의 거듭남"이다. 이것은 이미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지향하며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선포로서의 목회는 언제나 이러한 "변화를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의 주제는 그 나라의 완성으로서의 종말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도상 가운데 있다. 그 나라는 "지금 벌써(already)"를 누리게 하지만 "아직 아니(not yet)"의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

오고 있는 그 나라는 모든 것에 종말을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옛 인간의 종말과 새 인간의 각성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옛 세계의 종말과 새 세계에의 돌입을 선포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옛 세계의 단절을 요구하셨고, 그 부름에 응하는 모든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의 태동 속으로 인도하신다. 이런 점에서 뚜르나이젠은 예수님의 목회는 "종말론적인 목회"였다고 주장한다.

나가는 말/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자들의 모임"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선취적인 표징"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그 자체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의의가 결정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의 설교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를 통해 그 능력을 체험하고, 그 복을 누리는 모임이자, 구성원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끊임없이 교회와 설교자들을 도전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와 그것의 선포로서의 설교에 대한 약속이요, 위임이며, 명령이다.

또한 그것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출발지점이다. 또한 그것은 최종적인 목적지이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 선포를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설교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능력에 대한 사자요, 증인이며, 종이다. 설교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된 서기관"이며,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아야 한다(마 13:52).

예수님의 설교가 하나님 나라의 소식들과 가르침으로 가득 담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한번 더 하나님 나라의 설교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설교자들도 그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하도록 세움 받았다. 얼마나 많은 예수님의 비유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으니"와 같이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산상 수훈에 나오는 팔복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통치하심에 대한 대헌장이 아니었는가? 각 시대를 통해 마치 진자가 흔들리듯이 교회의 설교는 예수님을 설교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는 것, 즉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해 설교하는 것 사이를 오가며 강조점을 두었다.

앞으로 설교는 실존적인 측면보다는 종말론적인 측면을 더 강하게 가져야 할 것이며, 자기 중심적 유아기적인 특성보다는 사회적인 특성을 더 강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주신 말씀과 그 사건들을 오늘의 청중들에게 선포해주는 "회상의 활동"일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의 삶과 오늘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서의 미래와 종말을 대망 하는 "희망의 활동"이어야 한다.

몰트만이 주장한 대로, 인간들의 삶은 전통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미래의 예견을 통해서 사는 것임을 선포해야 한다. "두려움과 희망 속에서 인간들은 아직 모르는 미래를 미리 앞당겨 경험하고 그 미래를 자기의 삶 속에 집어넣어 현재화시키고 이 미래에 상응하도록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양면적인 해석학적 과정"이며, "창조적 긴장" 속에서 행해진다. 혼동의 시대 속에 설교자로 세우신 하나님은 우리 부정한 입술에 제단 숯불을 대시고 메시지를 담아 주셨다.

세속 시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그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세움 받았다. 이제 세움 받은 이 시대의 설교자들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새 피조물, 새 인간성, 새로운 질서를 그려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설교자로 세움 받았으며, 이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역(ministry)이다. "주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주의 것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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