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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매일 400~500여명 방문 / 부산대 교수 투신자살과 그리스도인
2015-09-04 11:38:47   read : 19027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매일 400~500여명 방문

올여름 휴가철 하루 400~500명이 전남 신안군 증도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관장 김헌곤 목사)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5월 개관한 기념관에는 평소에도 하루 평균 2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는 증도를 복음화율 90%에 달하는 복음의 섬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1950년 10월 북한군에 의해 순교 당했다.

김헌곤 관장은 3일 “1년에 약 100만명의 관광객이 증도를 찾는데 이 중 10만여명이 기념관을 방문했다”며 “지난 7~8월에는 매일 400~50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밝혔다.

기념관 방문객 중에는 단체관람객도 많다. 남서울은혜교회(박완철 목사) 동안교회(김형준 목사) 은평교회(한태수 목사) 지구촌교회(진재혁 목사) 디바인카페교회(임병진 목사) 등은 주기적으로 기념관을 찾고 있다. 은평교회와 디바인카페교회는 현재까지 50여 차례 방문했다.

김 관장은 “이곳에 다녀가면 성도들의 삶이 달라지고 특히 젊은 세대들이 많이 변한다고 목회자들이 입을 모은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안군이 추진하고 있는 ‘신안 홀리랜드’가 조성되면 신안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더 많은 이들이 순교기념관을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안군은 문 전도사의 순교정신이 한국전쟁 당시 이념 대립과 갈등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데 주목해 증도 등을 휴양관광지로 조성하는 홀리랜드 사업을 추진 중이다. 52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195m 높이의 십자가탑과 성경유물관, 기독교예술관 등을 세우기 위해 국비지원을 요청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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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 주민소환 서명 3만명 넘어서

“퀴어축제 등 동성애 조장”, 신림역·서울역광장 등서 교계와 시민단체 진행



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4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이 서울지하철 2호선 신림역 4번 출구에 마련된 ‘박원순 서울시장 주민소환 투표청구인 서명부’에 서명하고 있다.

교계 및 시민단체들이 서울시 곳곳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주민소환’을 위한 서명 운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지난 7월 10일부터 시작한 서명 운동에는 지금까지 3만4000여명이 참여했다.

서울 신림동에 사는 박모(54·회사원)씨는 2일 서울지하철 2호선 신림역 4번 출구 입구에 마련된 박 시장 주민소환 투표청구인 서명부에 성명과 생년월일, 주소, 날짜를 적고 서명 날인했다.

박씨는 “박 시장이 ‘성적 지향(동성애)’ 조항이 담긴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추진한 데다, 수도 서울의 한복판인 서울광장에서 ‘퀴어(성소수자) 문화축제’를 허용하는 등 동성애를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에이즈 고위험군인 동성애자들의 동성애 문화를 더 이상 확산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3시 현재 박 시장의 주민소환 투표청구에 서명한 서울시민은 3만4312명이다.

‘서울시민 주민소환 투표청구위원회’(서청위) 김영일 대표는 “수임자를 모집하고 위원회의 체계를 잡느라 서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이달 말까지 수임자 1000명을 모집해 서명 마감일인 11월 6일까지 10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서청위는 그간 총 150명의 수임자를 모집했다. 수임자는 청구인 대표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시민을 대상으로 서명활동을 하는 이들이다.

김 대표는 “박 시장을 소환하려면 서울 유권자의 10%인 약 84만명의 서명이 필요하다”면서 “중복·무효투표까지 고려하면 전체 유권자의 15%인 126만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직·홍보사업도 강화하기로 했다. 기독당(대표 박두식 목사),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대표회장 신신묵 목사), 한사랑선교회 등 교계 및 시민단체와 연계해 수임자 확보에 나설 계획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서청위 사무실에서 수임자 및 대책 모임도 갖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 7월 2일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에 박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 대표자증명서 교부를 신청했다. 그는 “박 시장은 동성애문제 해결에 적극 대처하지 않고, 남녀의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서울시민의 전통적 가치관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소환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박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 투표가 실시되려면 주민소환 대표자 증명서를 교부받은 날로부터 120일 이내에 해당지역 유권자 10%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주민소환 투표에서 유권자 3분의 1 이상이 투표해 과반이 찬성하면 즉시 해임된다.

김 대표는 “박 시장 주민소환을 위한 서명은 신림역 4번 출구와 수유역 1번 출구, 서울역광장 등에서 진행하고 있다”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많은 시민들이 수임자로 나서고 서명에도 적극 참여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010-3021-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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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은혜교회 분립개척일기 . 교회를 분립합시다

운명처럼 찾아온 개척…왜, 또, 교회를 만들어야 하나



"교회를 분립합시다. 남 목사님이 맡아 주세요." 아닌 척했지만 무척 당황했다. 담임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뭐라고 답해야 하는데 갑자기 목이 막혔다. 컵을 집어 들었다. 물이 없었다.


3년 전 어느 날이다. 당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이었던 나는 회의 차 여러 목사님과 함께 광화문에 있었다. 그 자리에는 지금 내가 섬기는 일산은혜교회의 담임목사님도 계셨다. 마치고 일어서는데, 시간 괜찮으면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하셨다. 근처 카페에 마주 앉았다. 잠깐의 한담이 오간 뒤, 묵직한 질문이 죽비처럼 떨어졌다. "남 목사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흠칫 놀란 것을 눈치 채셨는지, 잠시 멈췄다 말씀을 이으셨다. "남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로, NGO 사무국장으로, 지역 교회 청년부 목사로 다양한 사역을 해 오셨는데, 과연 평생의 사명은 무엇인가요?" 많이 고민했던 문제였기에 즉시 답할 수 있었다. "저는 지역 교회 목사가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되받아치셨다. "그럼 교회를 개척합시다. 3년 뒤 일산은혜교회를 분립합시다. 남 목사님이 맡아 주세요."

개척을 하라고? 찰나의 시간에 수많은 상념이 휘감기더니, 유년의 기억에 멈췄다. 때는 1982년 9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는 돌연 교회를 개척했다. 부천 북부역 광장 앞 경양식 집 사장님이 갑자기 중동 주공아파트 앞 개척교회 전도사님이 된 것이다. 개척교회를 세우신 후 부모님은 돈 때문에 자주 싸웠다. 전 재산을 털어 교회를 시작했는데 교인이 거의 없어서 살림이 매우 쪼들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가서 일하겠다고 하셨고, 아버지는 "어디 사모가 세상 일을 하느냐"며 안 된다고 호통치셨다. 그때마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동생을 끌어안고 벌벌 떨며 꿈 없는 잠을 잤다.

개척교회 주일 예배의 흔한 일상은 이랬다. 아버지는 사회 보고 설교를 했고, 어머니는 대표 기도를 했다. 헌금 시간이 되면 우리 남매는 몇 되지도 않는 교인들 앞에 바구니를 디밀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 꼴이 거지 같다고, 지하철 앵벌이 같다고. 왜냐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헌금을 해 줘야 우리 집이 일주일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부모님이 안 싸우시려면 이분들이 헌금을 많이 해 줘야 한다는 것을. 지금도 헌금 바구니만 보면 그 시린 기억이 기어올라 뒷목이 시큰하다. 그렇게 나에게 교회 개척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빈 물잔을 내려놓고, 커피 잔을 들었다. 쌉쌀하고 시큼한 아메리카노가 흘러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말씀드렸다. "네. 목사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쉽게 수락했을까? 담임목사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부목사 마인드가 작동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싫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지난 설날, 부모님께 신년 인사를 다녀왔다. 주공아파트 앞 개척교회 전도사였던 아버지는 어느덧 은퇴목사가 되었고, 개척교회 힘들어서 나가서 일하겠다던 어머니는 암으로 고생하는 할머니가 되어 나란히 앉아 계셨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는 벌써 40대 중반의 목사가 되었고, 내 품에 안겨 잠들던 동생은 서울역 앞 옷 가게 주인 아줌마가 되어 남편이랑 아이들과 함께 와 절했다.

세배를 마치고 아버지께 개척할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개척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는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그 고생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본인이 세우신 교회를 아들이 이어가길 바라셨는데, 그걸 박차고 떠난 아들이 돌아와 개척하겠다고 하니 상심이 크셨던 것이다. "그러길래 내 말 듣지…." 아버지 눈가가 붉어졌다.

"아빠, 개척해? 그럼 우리 교회 또 떠나? 그럼 친구들하고 또 헤어져야 해? 개척 안 하면 안 돼? 개척은 왜 해?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세배드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미래의 헌금위원들이 내게 물었다. 나는 답해야 했다. 왜 개척해야 하는가? 왜 교회를 분립해야 하는가? 분립 개척의 목적은 무엇인가? 네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는 선교적 목적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배가 필요하다. 배가 있어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교회가 있어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복음의 선박을 건조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복음을 전파하려면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둘째는 전략적 목적이다. 교회는 복음의 씨앗을 세상에 뿌려야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씨앗이 잘 자라지 않는다. 왜냐면 토양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직접 파종해도 구원의 수확을 얻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다. 전도의 환경이 달라졌다. 이제는 할 수 있으면 모종을 심는 게 낫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 출발하는 게 더 좋다. 목사 개인을 통한 개척 모델이 실패하는 현실에서, 교회 분립을 통한 개척 모델을 대안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개교회적 목적이다. 자기 교회를 위하여 교회를 분립해야 한다. 교회는 그 속성상 성장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전도하여 구원받은 영혼들이 모이면 교인 수는 증가하기 나름이다. 그러면 반드시 수반하는 부작용은 교회의 세속화와 교제의 붕괴다. 사람과 돈이 모이면 권력이 생기고 이로 인해 교회는 부패한다. 교인의 증가와 친밀한 코이노니아의 가능성은 반비례한다. 그래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교회 분립이다.

넷째는 공교회적 목적이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교회를 분립 개척해야 한다. 개척이 힘들다고 지금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미래 세대가 갈 교회는 없게 된다. 더욱이 거짓 목사, 가짜 교회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바라는 올바른 신앙을 지켜 가는 남은 자들의 교회는 더욱 더 많아져야 한다. 지금 당신이 건강한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그 교회는 당신이 세운 교회가 아닐 수 있다. 누군가 눈물 흘리며 헌신했기에 당신은 건강한 교회에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세대가 심은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면, 이제는 미래 세대를 위해 새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일산은혜교회는 내년 3월 분립 개척할 예정이다. 지금 준비가 한창이다. 그 여정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이 한국교회에 유익하리라 생각하여 연재하고자 한다.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하란에 멈춰선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떠나… 가라…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 사마리아 선교에 성공하고 앉아 있는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행 8:26) 광야로 가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분립 개척, 그것은 운명이다. 우리 교회의, 그리고 한국교회의 운명이다.
남오성 / 일산은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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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97%가 “전 재산 포기하고 PCUSA 탈퇴” 찬성

시온장로교회 “말씀 타협 못 해… 배에서 나와 물 위 걸을 것”



▲시온장로교회 예배 모습.

PCUSA(미국장로교)에 속한 한 한인교회가 교단의 동성결혼 수용 정책과 자유주의화에 반대하며,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교단 탈퇴를 결의했다.

새크라멘토에 있는 시온장로교회는 8월 30일(현지시각) 공동의회 결과, 성도 약 97%(103명 중 100명)의 찬성으로 이 같이 결정했다. 이번 결정으로 교회가 잃게 되는 재산은 본당 건물과 EM 예배당, 5개의 부속 건물 등 최소 300만 달러 이상이다.

PCUSA에서 탈퇴하려는 교회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문제가 바로 재산권이다. 이 교단에 소속된 모든 교회들은 그 재산을 교단에 신탁하기에, 교단을 탈퇴할 경우 재산은 자연히 교단에 귀속되고 노회가 처분권을 가진다. 하지만 각 노회마다 “은혜로운 결별 정책(GDP)”을 수립해, 성도 절대다수의 찬성 및 선교분담금 납부를 포함한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재산을 유지하면서 교단을 탈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이 교회가 속한 새크라멘토노회는 지난 5월 정기노회에서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재산을 유지한 채로는 교단을 탈퇴할 수 없도록” 원천봉쇄했다. 현재 미주 전역에서 동성결혼 문제로 인해 교단 탈퇴가 가속화되자 일부 노회들이 GDP를 수정하고 있는데, 새크라멘토노회는 가장 강력한 수위로 GDP를 개정한 경우다. 성도 다수가 교단을 떠나기로 할 경우에도, 교회 재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노회에 처분권이 주어진다.

새크라멘토노회가 개정한 GDP에 따르면, 교회는 건물에 대해 노회에 월세를 지불하면서 리스 계약을 맺든지, 한번에 구입하든지, 할부로 구입하든지 등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GDP에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현재 교단 내의 분위기로 볼 때 재산을 과거처럼 쉽게 이양해 줄 가능성은 전무하다. 성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헌금으로 세운 건물에 하루아침에 세를 들거나 다시 구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만약 교단을 탈퇴하자는 측과 잔류하자는 측이 첨예하게 대립할 경우에는, 노회가 이를 교회 분열로 판단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노회는 잔류하겠다는 측이 몇 명이며 이들이 헌신적으로 교회를 유지해 갈 수 있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긍정적인 판단이 내려지면 이들이 교회 재산을 소유하고 교회를 운영해 갈 수 있지만, 부정적인 판단이 내려지면 교단에 남겠다는 이들도 해당 교회의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시온장로교회의 이철훈 담임목사는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물결이 거세져 성경의 말씀을 버리고, 결혼의 정의를 바꾸어 죄를 죄가 아닌 것처럼 결정한 교단과 믿음을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눈물과 땀으로 지은 성전과 교회 재산을 빼앗기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타협하지 않겠다고 한 교인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또 “청년들과 EM, 자녀들까지 300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모르나, 우리는 배에서 나와서 물 위를 걷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공동의회 결과를 노회에 보고할 계획이며, 노회와의 조정 절차를 거친 후 타 교단으로 이명하게 된다. 이 목사는 현재 ECO(복음주의언약장로회) 가입을 당회 차원에서 논의했다고 밝혔다.

한편 새크라멘토노회에 속한 한인교회 가운데 수도한인장로교회도 교단 탈퇴를 논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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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조장 사이트 '애슐리 매디슨' 불똥, 교계까지 튀어

회원 가입했던 기독교인·목사 덜미…반복되는 '싸구려 용서', 이번에도 적용될까
이은혜 기자

'인생은 짧습니다. 바람 피우세요'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대놓고 기혼자들의 불륜을 주선해 온 '애슐리 매디슨(Ashley Madison)'. 2001년 캐나다에서 시작한 이 회사는 50여 나라에 약 3,70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물론 한국도 포함된다.

지난 7월, 이 사이트를 이용해 아내 혹은 남편 몰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게 됐다. '임팩트 그룹'이라는 해킹팀은 애슐리 매디슨을 해킹해 회원들의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카드 정보 등을 빼내 세상에 공개했다. 캐나다에서는 이 일 때문에 자신의 신상이 공개된 이용자 두 명이 자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애슐리 매디슨에 가입한 유명 기독교인과 목사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난 8월 27일,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에드 스테처 편집인의 입을 빌어 약 400명의 목사와 교회 지도자가 사임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불륜 조장 사이트 때문에 사임하는 교계 인사의 수가 400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은 여러 언론에 회자되며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SNS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는 젋은 기독교인 부부 이미지로 사랑받던 샘과 니아 레이더(Sam and Nia Rader) 부부. 이들은 유튜브에서 가족 동영상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데, 구독자만 36만 명이 넘는다. 젊고 잘생긴 아빠, 예쁜 엄마가 두 아이와 함께 그려 나가는 일상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 이들은 남자와 여자가 만드는 가족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완벽한 모습이라며 동성 결혼도 공개적으로 반대해 왔다.



▲ 샘과 니아 레이더 부부는 유튜브에서 잘 나가는 인기 크리스천 커플이다. 30살이 채 안 된 젊은 부부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를 수호하며 가족의 일상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린다. 샘도 결혼 기간 동안 애슐리 매디슨에 가입한 것이 들통났다. 그는 8월 21일 자신의 채널에 '용서받음'이라는 동영상을 올렸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그러나 지난 8월 21일, 이들의 채널에 '용서받음'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이 동영상에서 아빠 샘은 자신이 온라인 만남 사이트 애슐리 매디슨의 회원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내는 내가 애슐리 매디슨에 가입한 실수를 다 용서해 줬다. 하나님께도 용서를 구했고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있다. 이 문제는 가족과 교회 안에서 이미 해결된 일"이라고 했다. 아내 니아도 그의 옆에 앉아 모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도 있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8월 31일, 플로리다 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리고니어선교회(Ligonier Ministries)의 스프라울 주니어 목사가 2016년 7월 1일까지 목사직을 사임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선교회가 운영 중인 신학교의 학장까지 맡고 있는 스프라울 목사는, 올해 7월 애슐리 매디슨 사이트가 해킹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죄인"이라는, 가입자들을 옹호하는 듯한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8월 초에는 "애슐리 매디슨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하더니, 8월 31일 사이트에 가입한 점을 인정하고 사임을 결정했다.

얼마 전 십대 성추행 문제로 한바탕 언론에 오르내린 조시 더거도 또 한 번 등장했다. 그는 19명의 남매 중 장남으로 가족연구위원회라는 보수 단체에서 활동하다, 십대 시절 여동생을 비롯한 5명의 소녀를 성추행한 사실이 알려져 사과문을 발표했다.

(관련 기사: 독실한 미국 기독교 가정의 추악한 성범죄 시리즈)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는 끔찍하지만, 어렸을 때 일이고 이미 가족과 교회,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았다고 했다. 교회 캠프 등을 거치며 극복했기 때문에, 성충동과 관련된 전문적인 치료 절차는 밟지 않겠다고 했다.



▲ '애슐리 매디슨'은 기혼자의 만남을 주선하는 불륜 조장 사이트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 3,700만 명의 가입자가 있고 한국에도 약 19만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월, 한 해킹 그룹은 이 사이트 가입자의 모든 신상 정보를 빼내 세상에 공개했다. (애슐리 매디슨 홈페이지 갈무리)

더거는 결혼 생활 중에도 애슐리 매디슨의 회원으로 활동해 온 사실이 들통났다. 그는 "나는 최악의 위선자였다. 믿음과 가족이라는 가치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인터넷으로 포르노를 즐기는 중독자였다. 나는 아내를 속여 왔다"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번 해킹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이 애슐리 매디슨에 가입했다는 사실이 실제로 드러났지만, 이런 결과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2014년 6월, 애슐리 매디슨은 사이트에 이용자들의 종교 분포를 묻는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의 25.1%가 자신을 복음주의자(evangelical)라고 했고, 22.7%가 개신교인(protestant)이라고 대답했다.

불륜 조장 사이트에 기독교인 회원이 많은 이유에 대해,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너무 쉽게 '용서'와 '죄사함'을 말하는 기독교의 풍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편집인 마크 우즈는 기독교인들이 성추문과 연관된 이후 보여 주는 패턴이 한결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명한 기독교인이 잘못을 하면 이내 성명서를 발표한다.

성명서에는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 얼마나 미안한지와 더불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적혀 있다"고 했다. 편집위원 데이빗 로버트슨(David Robertson)은, 이번 문제는 예수님의 몸 안에 있는 암 덩어리와 같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값 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비하면서, 경건 없는 삶을 사는 위선적인 행태를 보여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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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이냐 기복이냐 - 고뇌 없는 교회

속(續) 평신도를 깨운다 8(마태복음 10:1-16)
천정근 yasnayapalanya@gmail.com
1.

어떤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될 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야 할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는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거기엔 무의식과 인격에 관한 많은 정보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숨겨진 진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격의 가치 같은 비밀까지 보여 줍니다. 때문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무의식적 욕구에 의해, 주관적으로 고정된 이미지와 선입견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세상은 복수와 위선의 말들로 가득 차고 말 것입니다. 최소한 한 차례 이것을 여과해 주는 장치가 양심이지요?

거리낌으로 스스로가 자기를 개선하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 양심이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각적인 욕망의 반응이 너무나 강해서 양심의 소리가 묻혀 버린 겁니다. 고장 난 여과 장치. 거기서는 실존의 고뇌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과 장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절대적으로 의롭고 올바르게 인식됩니다. 곧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이미지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와 그 참소리를 듣지 못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0절에서, 방언을 설명하던 바울은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설령 특별히 기획된 의도나 생각 없이 그저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 같은 방언이라도 거기엔 다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걸 영혼의 소리, 또는 심령의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겉으로 표현되는 음성적 도구는 직접적인 의미를 나타내진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감각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숨겨진 의미를 곧 파악합니다. 곧 영성은 일종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겉으로 표명되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의 분위기를 진정한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니 하는 말들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들, '희(喜)노(怒)애(愛)락(樂)애(哀)오(惡)욕(慾)'은 반드시 언어로써만 표현되는 게 아니고 도리어 대부분의 실제적인 표현은 영적으로, 분위기로 전달됩니다. 따라서 영성이 깨어 있으면 그 영의 분위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요, 영성이 죽어 있으면 겉으로 표명되는 말에 매달릴 겁니다. 자기에게로 소급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이 깨어 있으면 자신의 영의 진실을 느낄 것이요, 영성이 죽어 있으면 무의식의 욕망이 내뱉는 거짓된 말이나 명분에 매달려 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말 한마디 없이 단지 곁에서 차 한 잔을 마셔도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식만으로도 감격할 정도로 내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종일을 함께 떠들어도 공허할 뿐이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표면적인 행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의 진실 곧 인격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인격이 훌륭하다는 것 역시 말이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고 할 때, 혹은 기독교 복음이라고 할 때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이미지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확인하십니까? 그것이 자신의 영, 곧 인격의 본질로서의 참됨과 그 참됨이 스스로 혹은 타인들에게 풍기는 분위기를 일깨워 주는 것이라면 좋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기독교적 변화라는 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체험이 될 것입니다.

2.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오늘의 본문을 편의상 네 문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정리해 보면 1)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복음의 권능을 주셨다. 2) 복음을 전파하되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3) 대가나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4)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복음의 권능이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말합니다. 곧 사람의 속에 있는 것들을 치유하는 능력이지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아까 말씀드린 고장 난 여과 장치 때문에 무의식의 노이로제가 양심을 짓누르는 상태, 곧 병적인 양상이 겉으로 분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으로 우리는 정신상의 심각한 억압이라든가 심리적인 고통이라든가 더 나가서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모든 질병에 관한 복음적 입장을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곧 복음(하나님나라)은 인간 실존이 안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것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이고 중점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것은 복음의 과녁을 벗어난 빗나간 화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인간 존재의 중점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인 고통은 개별적 인간의 심령, 곧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뭔가 잘못된 결함이 발생했는데 복음은 그것을 치료함으로써 인격을 치유하고 인간을 회복시킨다는 겁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를 첨가한다면, 이러한 병적인 고통이 인격의 표면으로 분출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지 않은 인간들에게 상처를 받음으로써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다시 그렇지 않은 인간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동료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참여할 기회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고쳐 준다는 것은 동시에 이 세계의 병적인 양상과 과정을 들추어 내는 일입니다. 곧 복음의 권능으로써 병을 고친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가 돌아가는 현실에 대해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행위라 이 말입니다.

그 다음.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로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복음을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자들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고통 가운데 소외를 당하면서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도리어 교회 안에서 유지되는 고통과 소외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교회 안에서 최고의 믿음을 내세우는 바로 그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이 이스라엘의 때나 한국교회의 때나 교회와 교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곧 시대적 영성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보다 더 즉물적으로 말하자면 대형 교회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들이야말로 복음을 필요로 하는 병적인 상태의 정점에 있는 셈인데, 그들은 스스로 최고의 복음을 가졌다고 굳게 믿고 그것으로써 마치 현대판 네피림처럼 초인적이고 신적으로 과장된 유세를 하기 때문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 상태에서 기독교인이면서도 복음의 권능으로부터 소외되고 고통당하면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전체적인 기만적 영성의 분위기를 비로소 바꿀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서 전파하라는 명령은 한층 더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가면서 전파할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종말론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론이 세상을 환기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사람살이의 핵심적인 문제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고통입니다. 그것을 치유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업이 아니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고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런 일 자체가 천국이지 이런 일을 통해서 결과물로 계산되는 어떤 이득이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일에는 사적인 야망이 개입될 수 없고, 이익이 계산될 수 없고, 심지어는 눈에 보이는 결실이나 칭찬이나 사례에 대해서도 초연해야만 하는 겁니다. 만일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이 메시지 자체를 위협하고 복음을 밥벌이와 자아실현과 출세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겁니다. 부름을 받은 자로서의 이러한 사역적 자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방식 역시 이 세계와 세상의 방식에 있어서는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3.

그러므로 제자들을 내보내시는 주님의 마지막 당부가 이해할만 합니다. 곧 복음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혹은 반복음적인 교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 같은 처지라는 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삶의 위협, 경제의 위협, 뿐만 아니라 곧 이어 나오는 문장에 보면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 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할 것이다.

또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까지 가는 겁니다. 만일 이 말씀이나 복음을 단지 사회적 봉사나 좋은 일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려야 일어나지를 않지요. 복음의 목적은 우리들을 세상이라는 이리의 소굴 가운데 ― 특히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부터 ― '양'으로 보내는 겁니다.

양인 것만으로도 위험천만인데 이리 가운데서 이리에게 붙들린 양들을 돌보라는 겁니다. 곧 세상은 그런 양들을 희생시키고 고통하게 함으로써 굴러가는 법인데 그러한 구조를 드러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뱀 같은 슬기와 비둘기 같은 순결이 아니면 자기를 유지하고 지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 속에 부대끼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세상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 교회와 복음의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양입니까? 이리입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과 삶의 방식은 위협을 받습니까? 여러분의 시선과 실천은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깨어나야 합니다. 수적인 흥청거림과 건축물의 위용과 천문학적 수입으로 운용되는 돈의 기만적 역사에 매혹을 느껴 의지하고 싶어선 안 됩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냐. 우리의 업적을 보라. 우린 남들이 못하는 일들을 한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수백억 대의 돈을 비축해 놓고 지게를 지고 일꾼의 퍼포먼스를 한다고 하나님의 진실한 종이 아닙니다. 그건 지게에 대한 모독이지요. 지게 지는 사람에 대한 모욕입니다. 홑옷에 샌들 하나 신고 밀 이삭 훑어 먹으며 풍찬 노숙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막힌 배반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3~15)

4.

우리가 복음과 복음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 존재의 방식을 자신의 구원으로 받아들이고 의식화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는 데 새로운 어려움이 생겼을 겁니다. 곧 삶의 방식, 존재하는 방식, 사유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하면서 실제로 사는 데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는다는 것이 관념과 말의 문제일 뿐 실제로 달라진 게 없는 기만이라 이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전파해 봤자 말과 관념을 전파할 뿐이지 영성을 일깨워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과 복음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 존재의 방식을 자신의 구원으로 받아들이고 의식화하게 되면,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생각과 표현, 곧 마음의 온갖 애증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하거나 아첨을 하거나 복수심같이 양심의 여과 없이 분출되는 숨겨진 의도의 말들에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이제는 무의식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선과 악을 분간 못 할 '내 마음 나도 몰라'이든 곧바로 행동하지 못하는 겁니다. 전에는 그런 욕망의 처리를 제대로 확실하게 하지 못하는 그 사실만이 괴로웠겠지만, 이제는 자신의 실존이 여전히 옛사람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때문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책임이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 자기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을 통해서 복음적 치유와 회복,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곧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했던 동물성과 야수성과 잔인함과 비열함과 교활함과 경박함이 이제는 자기에게서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니 말보다는 침묵을, 표현보다는 사색을, 행동보다는 존재를 선택하게 됩니다. 전에는 'Doing'이 최우선적 문제였지만 이제는 'Being'이 우선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변화에 대해 홀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이러한 십자가의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세상은 천국이 되겠지.' 그러나 동시에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이 천국을 미워하고 천국이 오는 것을 싫어하는 원수 마귀가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곧 진리에 대한 마귀의 마지막 발악이요 복음에 따르지 않으려는 거센 저항이 일어납니다. 항상,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두 가지가 자기 안에서 동시에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그 이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8~25)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이런 자기 고백을 하면 그것을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만족스럽게 여길 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는 견디지를 못하고 그것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 그러한 은폐의 결과를 다시 생산하게 됩니다. 도덕을 내세우던 사람이 그로 인해 가장 부도덕하게 밝혀지고 사랑과 용서를 내세우는 사람이 그로 인해 잔인한 갑질의 인간으로 드러납니다. 청빈한 덕성을 지닌 자기희생의 인격자로 알려진 지도자들이 그로 인해 실제로는 탐욕스러운 졸부들로 드러납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평상시 삶이나 메시지에 사도 바울과 같은 자기 실존의 고뇌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실존의 고뇌가 없다는 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5.

어떤 사람들은 매우 낮은 단계의 의식 수준의 문제들에 얽매여서 시달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인간은 동일한 노이로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독실한 신자라도 평상시에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믿음이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병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처음부터 새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적 입장에서 상습적으로 반복되는 신경증들은 바로 그러한 인격의 현실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곧 자기 안에서 양심이 자기에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그치는 것이지요? 동시에 하나님의 신적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실존의 고뇌를 근원적으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입니다.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데 믿음이 있으면 기도 응답에 매달리는 기복주의를 면할 수 없을 겁니다. 근원적으로 본다는 것은 표면적인 문제들로부터 고비원주(高飛遠走)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얽어매고 주저앉히고 삶을 한계 짓는 인격의 문제들로부터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서 그것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온갖 실존적 고뇌를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가리는 게 익숙해진 다음에는 고칠 약이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실존의 고뇌가 없습니다. 믿는다고 큰소리치기만 하면 자기의 모든 문제가 다 가려지는 줄 알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경솔하고 경박하고 무례하고 겸손치 못합니다. 이 무례하고 겸손치 못한 사람들이 사랑이니 겸손이니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말들을 제멋대로 사용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저 광휘로운 강단에 올라서서 자기모순과 빈약한 지식과 콤플렉스의 역동으로 스스로를 과시하는 위대한 도덕군자들, 광신자들, 그리고 개혁자들이 실은 부도덕하고 내용이라곤 하나도 없는 공허한 궤변론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에 비출 때, 그들이야말로 종말론적 복음의 걸림돌이고 개혁 대상이고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단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인격에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같이 다니는 겁니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비정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높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낮은 사람인 겁니다.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자기 안의 주관적인 욕망과 좌절로 온갖 부패와 무지몽매와 파괴적인 일들을 벌이지만,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서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들이 곧 이 세계의 폭력과 희생과 갈등과 투쟁과 전쟁을 일점 양심의 의혹도 없이 지속시키는 자들입니다

. 거기에 축복하고 거기에 열광하고 거기에 찬동하고 거기에 매혹되고 그것으로써 치부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는 한 점의 고뇌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 적대적인 대상, 잘못된 타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이단이고 동성애고 종북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신앙에 가담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동원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 개인의 실존적 고뇌가 사라진 집단의 기복주의야말로 개개인들의 노이로제보다 훨씬 더 무섭고 지겹고 끔찍한 집단적 노이로제인 겁니다.

더 이상 마취제 같은 믿음을 내세워 우리들 개인과 시대적 실존의 고뇌를 은폐하려는 기복주의 신학에 속지 마십시오. 물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여러분 자신을 복음으로부터 소외시킵니다.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필요 없이 오로지 주님만 잘 섬기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다 잊어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라고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친구도 가족도 이웃도 없이 추구할 천국은 더 이상 천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로지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친구 한 사람 갖지 못한 채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는 하나도 외롭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일생을 남들이 갖지 못한 높은 진리를 소유하고 믿음이 뛰어났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왜 그렇게 외롭게 되었을까요? 교회를 떠나면 우리 기독교도들은 무엇이 될까요? 정녕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인가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다음 세대와 청년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스스로 자기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여러분은 이리의 세상에 양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진리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합니다. 제발 성경이 '양'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비유인 줄도 생각지 못한 채 자기들이 진짜 양인 줄 알고 '매애애~' 순진한 소리나 내는 어리석은 평신도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천정근 / 열린 교제와 깊이 있는 말씀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주력하는 자유인교회 목사. 산문집 <연민이 없다는 것>(케포이북스, 2013) 저술.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졸업했으며, 한독선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논문으로 <1880~90년대 똘스또이 중편에 나타난 종교 윤리적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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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밥상이 아니다 헌금을 맹물 마시듯 쓰는 목사들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제사'와 '성직자'와 '성전'이 없다고 알려진 유일한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온전한 제물이시고,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그리고 성육신하신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로 가정에서 모이던 신약 초기 300년간의 교회에는 '신성한 건물'이나 '성직자'라는 개념조차 아예 없었습니다. 물론 제사장이나 승려나 사제 따위의 직책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 제자들의 면면을 한번 보십시오. 가난한 어부들과 천대받던 세리가 그 무슨 대단한 성직자 행세를 그리 했겠습니까. 오히려 사도들은 자신을 늘 '작은 자'로 여겼으며, 교회 내의 모든 지체들은 서로 평등하게 형제와 자매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예배'와 '목회자'와 '건물'을 지나치게 신성시하고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돈 바치는 제사가 되고, 목사가 복 내리는 무당이 되고, 예배당이 만사형통을 비는 성황당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교회를 이리도 심하게 변질시키고 있는 걸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흔히 실수하는 가장 큰 착각은 자기가 설교를 잘하고 목회를 잘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을 자기 개인의 걸작품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교만이지요. 사실 교인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다른 직분자들의 적극적인 동역이 없다면 그 어떤 성장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한글 성경에 단 한 번 '목사'로 번역된 그 '목자(포이멘)'란 직분을 오늘날 각 교단들이 규정한 목사직과 그대로 동일시하는 어리석은 신학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근거도 전무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초에 목사직이 없었다면, 장로나 집사들이 야간에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의 '설교자'와 '교사'가 되어 '자비량 공동 사역'을 했어도 이보다는 훨씬 더 순수하게 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필자는 정상적인 유급 목회는 적극 지지합니다. 그러나 상당수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님들의 터무니없는 '사치 목회'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소위 목회자란 분들이 어떻게 단지 교회 사역만으로 수십 억대의 재산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우습지도 않습니다. 교회가 목회자들의 생업과 고소득을 위한 무슨 복지 기관이라도 되는 것인지요. 교인들에게 마치 "내가 거룩한 목회하고 있으니 너희는 당연히 내가 요구하는 경비를 모두 책임지라"는 식의 선무당 같은 태도는 이만저만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언제 목사님들에게 목회의 길로 가시라고 억지로 강요를 했던가요. 아니면 목사님들 모두 개인적으로 교인들의 사전 허가라도 별도로 받고 신학교로 가신 것인지요.

필자는 손봉호 장로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고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좋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목사님들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목사를 보면 화가 납니다. 그게 목사님들을 비판하는 이유입니다." 손 장로님은 사랑이 있기에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요즘 분수를 모르고 우쭐하는 귀족 목사들처럼 그렇게 시건방 떨며 잘 먹고 잘살다가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수시로 주일 점심에 출장 요리사까지 불러 평균 25만 원 짜리 초호화 식사를 즐긴 목사는 도대체 뭐 하는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게 무슨 새로 나온 '주일 성수' 비법인가요. 아무튼 이처럼 고도의 사치를 부리는 질이 안 좋은 목사는 아예 조기에 퇴출시켜서 그냥 고향에서 편안히 여생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 생각합니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사실 교회 돈을 맹물 마시듯 쓰는 이런 부류의 목회자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습니다. 이건 필자가 지난 30년간 직접 목격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이 사람들이 정말 목사인지 '먹사'인지 영 헷갈리는 것입니다. 여하튼 그런 황제 식사는 일부 목사들이 교인들의 소중한 헌금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득권 포기 없는 '교회 회복'이란 결단코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 목사님들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특히 중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님들은 강단에서 말로만 거룩하지 마시고, 진정 공교회의 바른 회복을 원하신다면, 더 이상 '교회의 것'이나 '교인들의 것'으로 생색내지 말고 목사님들 '자신의 것'을 먼저 바치시기 바랍니다.

부당하게 독점한 교권을 내려 놓고, 과도하게 소유한 부를 내려 놓고, 그리고 부질없이 부풀린 종교적 야망을 모두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과거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한평생 교회의 혜택만 받고 살려 하지 마시고 진정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역은 결코 목회가 아닙니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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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교수 투신자살과 그리스도인
김달성

지난 8월 17일, 부산대 국문과 고현철(54) 교수가 자살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대학 본관 4층 국기게양대에서 투신했다. 국문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유서를 남겼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의 일부분이다.

"문제는 현 상황에서 교육부의 방침대로 일종의 간선제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서 올려도 시국선언 전력 등을 문제 삼아 여러 국·공립대에서 올린 총장 후보를 총장으로 임용하지 않아 대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란 점이다. 교육부의 방침대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후보를 임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학의 자율성은 전혀 없고 대학에서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오직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 사건부터 무뎌 있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교묘하게 민주주의는 억압되어 있는데 무뎌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

그의 죽음은 교육부의 대학 총장 직선제 폐지 압박에 대한 저항임이 틀림없다. 종처럼 타율적인 존재로 살 것이냐, 자율적인 자유인으로 살 것이냐의 기로에서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것 같다. 정권의 비민주적인 대학 정책에 항의하며 분신하거나 투신자살한 경우는 지난 어두운 권위주의시대에 종종 있었으나 교수가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건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부산대를 비롯한 전국 9개 국립대 교수 연합회는 20일 총회를 열어 국립대 총장 직선제 회복을 위한 투쟁을 결의했다.

국립대 총장 선정 과정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우리 헌법은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 정부는 대학 총장 선정 방식에 개입하여 대학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한다. 대학에 주는 지원금을 갖고 총장 직선제 폐지를 유도하는 치사한 행태도 보이고 있다. 마지못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선정한 총장 후보를 교육부가 임용 거부한 사례도 있다. 경북대가 그 경우다.

총장 임용을 거부당한 경북대 교수는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정부는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정부는 임용 거부 사유를 한마디도 내놓지 않고 있다. 교수가 투신자살을 해도 국립대 총장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답답한 현실이다. 총장을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했던 과거 독재시대로 회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는 상황이다.

답답한 현장은 대학만이 아니다. 대학이 이러할진대 다른 곳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대학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이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추세가 역력하다. '87년 이후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하고자 했던 활동은 어느새 미미해지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근본적인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 많은 사람들은 권위주의를 과감히 탈피하고, 보다 민주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삶으로 힘차게 나아가지 않을까. 왜 대중들은 일방통행적인 사회를 선호할까. 상명하복적인 서열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왜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선택할까. 형식적 민주주의에 만족한 채, 진정한 민주주의- 참여적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머뭇거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권위주의적인 종교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이유는 또 뭘까?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원인(배경)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서너 가지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화두를 던지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아울러 복음이 말하는 대안도 들어보자.

(1)돈이 왕 노릇하는 사회 구조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와 권위주의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 사회는 개인의 권위주의적인 심리를 조장한다. 나아가 권위주의적인 성격도 만든다. 결국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꾸려가는 사회의 성격도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된다. 막강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사는 사람들은 무력감에 쉽게 빠진다.

마치 원시시대에 자연 앞에서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꼈던 것처럼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력 앞에서 몹시 두려워하고 떤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는 마치 거대한 공룡 같아서 어느 누구도 제어하거나 다스릴 수 없다. 언제 경제공황이 쓰나미처럼 덮칠지, 언제 전쟁(대부분의 전쟁의 주요 원인은 경제에 있다)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도 어렵고, 설사 예측을 한다 해도 속수무책일 경우가 흔하다. 미연에 방지하거나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해고되어 실업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직장에서 일회용품처럼 쓰임받다 아무 대책도 없이 버려질까봐 전전긍긍한다. 흉측한 자본주의의 민낯에 화장이라도 한 유럽 같은 곳은 그래도 좀 덜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극도로 불안해 할 뿐 아니라 무력감에 더욱 젖게 된다.

돈이 왕 노릇하는 사회에서 장기간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성격도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굳어진다. 무력감에 빠진 사람이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흔히 선택하는 두 가지 방법(병리적인)이 있다. 하나는 강자가 되어 약자들을 지배하며 어깨에 힘주고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자에게 빌붙어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은 이렇게 양면성을 갖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자는 흔히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이 사회에서 돈(자본)은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행정 관료사회, 법원, 군대, 교육, 문화 ,언론, 종교 등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부자, 자본가는 소수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강자에게 빌붙어 사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은 그 사회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부자-강자(독점자본)에게 굴종하며 사는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독점자본)을 위한 정당을 지지하는 기이한 현상도 생긴다. 물론 이를 위해 언론을 통한 여론 조작과 세뇌 작업은 기본이다. 형식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름 합법적 과정을 통해 권위주의적인 정당이 대두되면, 그 정권은 일반 대중 특히 가난한자, 약한 자들을 무시하며 마구 누르고 짓밟는다. 이는 독점자본의 원활한 착취를 돕기 위해서다. 소위 엘리트 집단이요 중산층인 대학 교수 사회까지 무데뽀로 무시하고 막 대하는 정권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군대

우리 사회에서 군대는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조장하는 주요 기관이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을 사람들은 흔히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는 군대에서 막상 받는 교육과 훈련은 권위주의적인 문화다. 징집제를 가진 한국 남성들의 현역 복무율은 89%이다. 열 명 중 아홉이 군대에 가서 배우는 가장 큰 것은 물론 사람 죽이는 기술이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많이 배우고 익히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문화다.

우리 군대는 그동안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일제시대의 군대문화와 체질이 버젓이 남아 있다. 그것은 철저한 상명하복문화요 서열문화다. 이는 장병들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권위주의적인 성격까지 갖게 만든다. 군대에서 사병들은 상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배우고 익힌다. 불합리한 명령이 떨어져도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여기서 합리적인 생각이나 판단이나 질문은 있을 수 없다. 합리적인 의문을 갖거나 저항이라도 하면 그는 즉각 불이익을 당하거나 관심병사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상담 같지 않은 상담도 받아야 한다.

무조건 참고 잘 적응해보라는 상담이 대부분이다. 시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잘 때우라는 상담이다. 이는 마치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연고나 발라주는 격이다. 이렇게 기존 틀이나 상관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따르는 사람으로 길들여진 늠름한(?) 군인은 후임이나 약한 병사를 괴롭히는 사람노릇을 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당한 사람일수록 남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게 된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군대에서 몸에 익힌 권위주의적인 문화는 그대로 가정으로 옮아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군대에서 2-3년 동안 익힌 청년들의 그 권위주의는 그들이 머지않아 결혼하여 이루는 가정에서 알게 모르게 확대 재생산된다. 그리고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권위주의적인 구조로 꽉 짜여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 회사가 선호하는 인재로서 곧잘 쓰임받기도 한다.

(3) 학교

우리나라 제도권 학교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은 무엇인가?

합리적이거나 비판적인 사고를 키워주는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가. 보통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갖고 살 역량을 닦아주는가.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되 서로 도와야만 평안히 공생하고 성장한다는 자리이타의 정신을 북돋아주는가. 하늘이 주신 저마다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그것을 꽃피우는 교육환경이 되는가. 불의한 강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겸허하고 약한 인물로 성장하도록 돕는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오로지 점수를 갖고 줄을 세우는 교육, 자유로운 대화나 토론보다는 일방적인 주입과 암기 일색인 교육 ,그런 교육을 장기간 받은 사람에게 익숙한 것은 권위주의적인 문화다. 권위주의적인 심리로 굳어진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다.

그저 강자에게 무조건 굴종하고, 약자는 무시하며 그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교육이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이미 만들어진 틀을 받아들이고 그 틀 안에서 경쟁하는 데는 재빠른데, 주어진 틀이 없으면 어쩔 줄을 모른다. 불안에 떤다. 기능적인 인간은 만들지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돕지 못하는 구조가 우리 교육 현장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4)한국 교회

해방 이후만 놓고 볼 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퍼트리는 노릇을 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권위주의를 확산시켰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권위주의적인 이승만 정권을 적극 지지했다. 자유당 정권보다 한층 더 권위주의적인 군사독재정권도 힘껏 지지했다. 침묵으로 지지한 경우도 많았다.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정교유착을 했다. 소수만이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향해 '아니오'라 말하며 저항했을 뿐이다. 그 이후에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불의한 강자에게 약하고 고난당하는 약자에게 거칠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자되게 해준다는 정당을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기복적인 한국교회의 몸은 비대해졌지만 그 몸에 흐르는 피는 권위주의적인 피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자유로운 대화를 한 사람이다.(창18:16-33) 마치 협상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이 자유롭게 대화를 하듯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아무 격의 없이 말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했다. 거기서 하나님의 고압적인 자세는 조금도 볼 수 없다.

하나님에게 비굴하게 굴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도 전혀 없다. 다만 진정성이 있는 자세가 돋보일 뿐이다. 토론 주제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중을 드러내셨다. 그 성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 심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이까.

주께서 이 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을 악인과 같이 하심도 부당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세기 18:23-25)

이렇게 매우 중대한 주제를 놓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여러 차례 생각을 주고받으며 토론하였다.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아브라함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러다 주님께서는 생각을 주고받다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기도 하셨다. 매우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대화요 소통이었다. 일방통행적인 소통이 아니라 그야말로 쌍방통행적인 소통이다.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하는 형식적인 소통이 아니라 자유로운 소통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세가 보여주는 인상도 강렬하지만 그 아브라함을 상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참으로 멋지시다. 야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저절로 존경하고 사랑하고픈 마음이 솟아나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다. 당대 권위주의적인 종교들이 내세우는 신들과는 유를 달리하고도 남는다. 가히 비교를 할 수 없다.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 이 하나님에게 매력을 느껴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 이전 나는 교회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성탄절에 사탕 얻어먹으러 간 적도 없었다. 이 매력적인 하나님에게 더욱 빠진 나는 전공을 신학으로 바꾸었고, 처음 판자촌에서 목회를 하다가 고질병으로 사선을 넘을 때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 하나님의 영을 모신 가슴을 가진 나에게 이생과 저생의 경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느 날 밤, 하나님의 영에 취해 누워있던 내 몸의 옆구리에서 아주 흉측한 벌레 한 마리가 빠져나가는 환상을 보았다. 그 다음날부터 내 옆구리에서 5년 동안 줄기차게 흘러나오던 피고름이 멈추기 시작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 결핵성늑막염으로 인한 수술로 옆구리를 뚫고 고무호스를 박아놓은 채 지냈던 것인데…. 여기서나 저기서나 오로지 주님으로 인하여 설레는 마음뿐이다.

창조주지만 이 땅에 내려오시어 피조물인 인간과 만나 자유로운 대화와 소통을 얼마든지 하시는 분, 무슨 이야기든지 인간과 대등한 입장에서 토론이 가능한 분, 그가 바로 야훼 하나님이시다. 권위주의적인 모습은 그에게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분에게는 오직 사랑으로 인한 권위와 위엄만 있을 뿐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는 법이다. 한국교회에서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얼마나 찾아볼 수 있는가?

본래 권위주의는 무력한 자, 속이 빈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사랑이 없기에 스스로 권위를 세우고 똥폼을 잡는다. 허약하고 심약한 자들이 힘에 목말라하고 스스로 자신을 높인다. 허세를 만들어 그것으로 남을 억누르려 한다. 팔뚝에 완장이라도 채워지면 그들은 많은 사람을 이제 지위나 주먹으로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행복에 겨워 즐거워한다. 그에게서 공감이나 연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구약성경의 알맹이는 출애굽사건이다. 고대 노예제시대에 일어난 그 사건의 핵심은 바로왕의 권위주의 체제를 부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 체제에서 노예들이 탈출하는 것이다. 바로왕을 중심으로 한 애굽의 권위주의 체제를 부순 분이 야훼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의 영을 받고 그와 연합된 사람은 권위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 그 체제에 적응할 수도 없다. 마치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람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에서든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그 체제를 변혁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신약성서의 핵심은 십자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미 세례 요한이 말했듯이 모든 높아진 것을 허물어 낮추고, 낮아진 것은 돋우어 높이는 사역의 결정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다. 당시 소외된 지역인 그곳에서 그는 약자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들을 만날 때 그들이 입을 열어 자기 말을 하도록 했다.

누가 봐도 치료 받으러 온 게 뻔한 병자에게도 예수께서는 '뭐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자기 말을 하도록. 불의하고 권위주의적인 지배자들에게 눌려 자기 말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에게 자기의 말을 하도록 하신 것은 그들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도록 도우신 것이다. 그러다 그는 공생애 막판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거기서 그는 결판을 내셨다. 당대 세계를 주무르던 로마제국의 세력과 그와 짝한 유대 지배계층과 직접 맞붙은 것이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사회의 본거지에 들어가 온몸을 던져 권위주의의 핵을 깨트리신 것이다. 힘으로? 무력으로? 아니다 . 진리로!

그는 결국 정치범이 달려죽는 십자가 나무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3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옳았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사건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예수를 통한 구원을 설파하면서,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 것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경험을 가진 바울이 전한 칭의稱義,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다는 칭의(Justification)는 '법정적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관계적 의미'이다. 법정적 의미가 이제까지 추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 산 죄를 용서받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은총이라면 ,관계적 의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 자체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데 달려있다. 이제까지 품고 산 죄된 마음을 성령의 도움으로 밀어내고, 이제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칭의요 구원이다.(골1:13-14) 우리가 품어야할 예수의 마음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한국교회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기를 빈다.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진 권위주의적인 속성을 성령께서 더욱 지워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리스도인의 가슴마다 예수의 마음이 차고 넘쳐 우리 사회 구석구석까지 흘러가기를 바란다.

끝으로 고인에게 하늘나라의 소망과 평안이 있기를 빈다.

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 . '옆구리 뚫린 아담의 기쁨'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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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자리, 죽을 자리

백훈 | 샌디에고 한인뉴스 발행인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서정시 ‘낙화’의 첫째 연이다. 오래전의 추억, 애인의 절교 통보를 받은 내 친구 하나가 학교 앞 대포집에서 내게 처음으로 이 시를 들려주었다. 친구는 결코 매달리지 않겠노라며 자못 비장한 태도로 노트에 적어놓은 시를 읽었는데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는 둘째 연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라는 구절들이 내 가슴에도 새겨지던 시간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주로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망신을 당한 뒤에도 자리에 연연하고 있을 때 언론들이 이 구절을 인용해 비판하는 것을 보곤 했다. 알다시피 얼마 전에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던 문 모라는 양반이 사퇴해야 할 처지가 되었음에도 계속 버티자 일부에선 ‘문 모씨의 추한 뒷모습’ 하며 역설적으로 이 시를 인용해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았다는 문 모씨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 언론을 원망하며 사퇴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오죽 했으면 자기가 몸담은 언론계에서도 저렇게 비판을 할까’ 하면서 국무총리 지명이라는 영예보다도 ‘아, 이 양반은 정말 인생을 잘 못 살았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나를 더 소개하자. ‘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일제시대 윤봉길 의사가 고향집을 떠나며 남긴 글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식민치하를 사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결단이 한눈에 느껴지는 글이다. 이 글을 대하며 나는 ‘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이 자기의 죽을 자리임을 분명히 알고 떠난 것이구나’하며 마음이 숙연해졌었다.

역사적인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관찰해보면 그 현장에서 의롭게 죽기보다는 비겁하고 추하게라도 살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소위 고관대작들의 백성들에 대한 배반의 역사는 유구하다. 생각나는 대로, 거칠게나마 몇 사례를 적어보자.

1905년 경운궁 어전회의의 을사조약 체결 건,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다섯 명이 찬성을 함으로써 가결되었는데 (을사5적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다섯 명은 '살 자리'를, 끝까지 반대했던 세 명은 '죽을지도 모를 자리'를 택했다고 할 수 있다.

6.25가 터지자 이승만은 서울을 ‘사수(죽음으로 지킴)’하겠노라고 발표하여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자기는 몰래 도망쳤다. 국부가 죽으면 나라가 망하는 거라고 고관들이 자기 ‘살 자리’를 위해 아부를 보탠 탓이다.

박정희 장군의 구테타도 당시 정부의 책임자가 '목숨을 걸고'라도 맞섰다면 실패로 끝났을 터였다. 전두환에게 대통령 자리를 안겨준 것은 최규하라는 양반이 자기 '살 자리'에 연연했기에 가능했다.

현재 북한의 경우도 나라를 다스리는 고위층들이 새파란 김정은 밑에 엎드려 제 '살 자리'만 찾고 있기에 국민들은 아이들은 굶어 죽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개인사를 고백할 때가 되었다. 나는 소설가로 등단한 후 누가 뭐라 하든 공인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공인의식이라는 것이 뭐 거창한 것은 아니다. 내가 쓴 글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 거짓말을 쓰거나 과장을 하거나 지나친 자기 미화를 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를 말한다. 솔직히 삶과 글의 일치에 대해서 말하라면 자신이 없다. 작가란 작품으로 말하는 사람이지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그럴듯한 변명도 있지 않은가. 나는 '삶과 예술은 별개의 사건'이라는 내용의 글을 쓰기도 했다. 요는 살 자리에서 살고 죽을 자리라면 반드시 죽겠다는 결기같은 것이 요구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글이란 것이 결국은 작가의 삶을 반영하는 것일 진데 어찌 회한이 없었겠는가. 나는 자주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심해하고 슬퍼했다. 요즘도 문학적 진실과 현실 사실 앞에서 자주 갈등한다. 매일 허점투성이의 삶을 반성한다.

여기에 아마도 동료의식이 앞서기 때문일 게다. 나는 공인들이 저지르는 소위 ‘생계형 비리’에는 관대한 마음이 되곤 한다. 그야말로 먹고 살자고 저지른 부정이라면 한번쯤은 봐 줄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국방장관이란 사람이 불량무기를 들여온 별들의 부정을 생계형 비리라 말했다가 언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는데 그런 것은 명백한 도둑질이다. 생계형 비리란 군대의 졸병이 배가 고파 건빵을 훔쳐 먹는 그런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실연당한 친구의 옆에는 있었지만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는 있어보지 못한 이 시대 이 땅의 소시민의 한사람으로 살아온 나의 인생을 긍정하며 고마워한다.

시 한편을 더 소개하며 끝내자. 영원한 자유의 시인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내가 청년시절부터 정말 좋아하고 흠모한 시인의 시는 이렇게 끝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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